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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0년대 중반. 3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자정을 갓 넘긴 시각.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학생회관에 빼곡히 들어앉은 농성자들 무리에 끼어있었다.
대개 철야 농성을 하면 건물 밖에서 집회를 끝내고 들어와서 과별, 단과대학별 토론회를 열고, 다시 전체 집회를 가지고, 풍물패가 공연을 하고 ~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자정이 지나 졸음이 쏟아질 무렵 '집행부'에서는 대형 TV를 설치한 뒤 다큐멘터리 영상 자료를 보여준다.
나는 거기서 보았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80년 5월이지만 내가 실제로 그 사건의 실상을 목격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화면 상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VHS 비디오 테이프 탓인지, 아니면 원래 화면 자료가 그랬는지 화질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영상이 보여주는 장면 속으로 몰입하는 걸 방해하진 않았다.
- 민간인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계엄군.
- 군용 트럭에 차곡차곡 쌓여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청년들.
- 임시 들것에 실린 머리가 으깨진 주검들.
- 태극기가 덮인 채 줄로 묶인 관.
- 통곡과 오열에 넋을 놓은 여인들.
- 총성이 울리는 현장 속에서 과감하게 시위 대열 앞에 서서 무엇이라 외치는 시민들.
-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급히 휘갈겨 쓴 플래카드.
[영상 자료에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독일어 자막이 간간히 나왔다. 십 수년 뒤에 알고보니 이 화면은 당시 광주에 잠입 취재를 했던 독일 출신 기자 '유르겐 힌츠페터'의 영상 기록물을 편집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 그저 귓등으로만 흘려 듣던 "광주 사태"는 바로 위와 같은 사태였던 것이다. 불과 수 년 전에 일어난 저 엄청난 사건에 대해 학교는, 교과서는, 어른들은, 언론들은, 대학에서 월급받고 앉아 지성인 행세를 하던 교수 씩이나 되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시대엔 "광주"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와 불온의 대명사처럼 간주될 정도였다.
충격과 분노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오후가 되어도,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나도 좀체로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에 복수심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내 핏줄 속에는 "이 X같은 세상 갈아엎자." "거대한 사기 집단인 국가를 전복시키고 싶다."는 고동소리만 가득 차 올랐다.
-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 도대체 무엇이 저 가공할 폭력을 용인했으며,
- 도대체 왜 저렇게 엄청난 사건을 두고 모든 국민이 수 년 동안이나 쉬쉬거리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 한 나라 안에서 저런 야만적 폭력이 난무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돈 벌고, 권력에 아부하고, TV 앞에 앉아 히히덕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당시까지 별다른 사회과학 지식도 없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깊지 않았던 나에겐 이런 저급한 수준의 분노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 해 오월 무렵. <광주민중항쟁의 민중운동사적 조명>이라는 자료집이 나왔다. 자료집이라곤 하지만 아주 조악한 수준이었는데, 요즘 복사기로 카피한 것보다 못한 인쇄 품질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자료를 인쇄한 분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며, 이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행여 불심검문에라도 걸리면 곧장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역사적 맥락에서 가늠해 볼 수 있었고,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한 사람들의 "계급적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통계 자료로 나와 있었으니까. 그 분들의 직업은 교수도, 대학생도, 인텔리겐챠도, 소설가도, 기자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대학생이라는 게 한없이 부끄러웠고, 그런 부끄러움을 그냥 안고만 살아갈 수 없었기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다. 나름 열심히 싸우면서 살았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면 언제나 허탈감이 밀려왔다. 술을 엄청 퍼마셨고, 동료들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우는 날도 많았다.
이른바 '사회과학' 이론이란 걸 공부했다. 역사와 철학, 혁명사, 좌파 이론 등을 두루 읽었고, 사람들과 토론을 했다. 하지만 끝내 내 마음 속에 응어리진 그 무엇인가는 결코 해소되지 않더라.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광주 망월동 묘역(국립묘지가 되기 이전)에 두 번 찾아갔었다. 518 영령들 무덤 앞에 소줏잔 올리고나서 울지 말자고 다짐하고 갔건만 할 수 없이 또 울고 왔었다. 그러고 나니까 좀 낫더라. 사회과학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
결국 그 날 철야농성장에서 우연히 시청했던 다큐멘터리 영상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나 아직 부족한 거 많고, 방황도 끝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20대 이전의 행복했던 나날들은 그 날 이후심각하고, 우울했던 나날들로 바뀌었다. 뭐 내내 인상 긁으며 살아온 건 아니지만 내면적으로 더 어두워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후회는 없다.
흔히 광주를 대한민국의 십자가라고 비유한다.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할 우리 시대의 숙제이며, 화두인 것은 분명하다. 총 맞아 죽고, 부상한 시민들은 있는데, 누가 그 총을 쏘라고 명령 내렸는지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책임자를 처벌하지도 못했다. 법제화가 이뤄져서 피해 보상이 이뤄진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당시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부상자 가운데 40여 명이 넘는 분들이 자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사건의 범죄적 실상이 무엇인지 대변해 준다.
광주항쟁을 나처럼 '스쳐지나간' 사람들도 이러한데, 직접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분들은 어떨까? 5*18을 상대적으로 잘 기억하는 분들은 다시 우리 삶을 추스리고, 각자 올바른 길을 걷도 있는지 재확인 하자. 5*18을 잘 모르는 분들은 다시금 자료를 찾아보고,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자. 예전 같으면 국보법에 걸린만한 자료들 주변에 차고 넘친다. 사람들이 잘 안 봐서 그렇지.
민주주의 제대로 하는 것. 그 게 계엄군들의 총부리 앞에 굴하지 않고, 새하얗고 여린 가슴 열어 젖힌 광주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의 헌신에 보답하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전두화-노태우 일당의 후예들인 한나라당의 차기 집권. 이것부터 막아야 한다. 벌써 내년 총선이 코 앞이고, 대선도 멀지 않았다. 올해에도 MB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 가지 않았다. 3년째다. 명확하지 않은가? 왜 우리가 민주주의 제대로 해야 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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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