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용 참여정부 인사수석 블로그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또 우연히 만난 글. 그런저런 감정으로 읽다 검게 먹쇄한 부분에서 잠시 숨이 멎었다. 공터에 선 노무현을 보고 미칠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영웅이 거쳐야 할 필연적인 무용담으로 보기엔 개같이 슬프고 비감하게 보기엔 좃나게 웃긴다.
내 가슴 속 노무현
1985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창YMCA 총무로서 나는 시민과 농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산YMCA 전점석 시민사회부장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산에 좋은 변호사가 한 명 있는데 노동자들을 몇 십명 모아서 풍광이 좋은 곳에서 연수를 하고 싶어합니다. 안내 좀 해주세요.”
노동자들도 깊은 산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니 나더러 좋은 장소를 안내해주고 농업문제에 대해 강의 좀 해주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하고 대기업 노조가 막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동문제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탄압도 점차 심해질 때였다. 그 변호사는 부산Y 시민중계실 자문변호사를 맡고 있었다. 그 변호사 이름이 노무현이었다. 전점석 부장이 말하는 노 변호사는 이런 사람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성실하기 짝이 없는 젊은 변호사다. 판사생활 1년도 안 되어 변호사가 되었는데 바다와 관련된 해사 변론을 아주 잘해 돈을 벌어서 요트도 탔을 정도였다. 만나보니 참 좋은데 세상 물정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시민권익변호인단으로 알게 되었는데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 계속 사회과학서적을 주었다. 주면 또 달라고 하고, 또 주면 또 달라고 하면서 이틀 만에 한 권씩 읽어내더라. 책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한 달에 한 20권도 읽어 치운다.’
노 변호사가 노동자 60여명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첫인상이 매우 겸손하고 진지했다. 나는 거창 북상면 수승대라는 유명한 계곡으로 그와 일행을 안내했다. 나는 ‘한국 농업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1시간 30분정도 강의했다. 공식 행사를 마치고 그와 식사를 같이 했다.
그와 나는 부조리한 세상과 불의한 정권에 대해 같이 불같은 분노를 토해 냈었다. 노동자와 농민과 약자들의 서러운 삶에 대해 얘기하면서 각자 위치에서 길을 뚫어가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진정성을 알았다. 그는 소위 ‘부림사건’이라는 사건을 우연히 맡으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만 보아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고, 고문이 실제로 그토록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불의한 현실에 무감감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농민운동과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농민의 현실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날 밤 거창읍으로 들어가는 막차를 놓치고 캠프에서 잤다. 그는 나에게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공손했다. 변호사치고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도 먼저 일어나서 캠프를 돌면서 먼저 아침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여간 그는 보통 변호사는 아니었다.
이 시기는 그가 소위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고 인권 변호사로서 삶의 방향을 튼 직후였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을 정부 전복집단으로 조작하여 22명을 구속한 제5공화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 중 하나다. 노무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문재인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이 사건에 대한 무료변론에 나서면서 시국사건 노동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게 된다. 그 뒤 잘 나가던 조세전문 변호사의 길도 접고 요트를 타는 것도 그만 두었다.
내가 노무현변호사를 다시 본 것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양강 구도로 치러진 선거였다.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적으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한 뒤다. 무관으로 김대중 후보의 선거지원유세를 위해 거창에 온 것이었다. 영호강 강 둔치에서 열린 유세라고 해서 가보니 민망했다. 청중이래야 조무래기들을 포함해서 20명 정도였다. 선거판이라고 그 숫자 속에서도 야유가 나오니 코미디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 이전 장날에 열린 김영삼 후보 유세에는 2만 명이 운집한 자리였다.
나 같았으면 맥이 빠져서 대충하고 일찍 도망을 가버렸을 것이다. 그는 둔치 아래서 둑에 않은 청중들을 올려다보면서 젖은 장작에 성냥불 붙이 듯 공들여서 정말 열심히 유세를 했다. 청중 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열변을 토하니 점자 숫자가 불었다. 그래보았자 100여명이었지만.
유세가 끝나고 내가 다가가서 물었다.
“이런 상태에서 유세가 가능합니까?”
“어쩝니까? 김대중 선생 밖에는 대통령 하실 분이 안계시잖아요? 5명이라도 데리고 유세를 해야죠.”
1995년 부산시장 낙선 후엔 정말 분노에 차서 광주에 왔다. '악마의 주술' 같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꿈이 자꾸 좌절되는 현실 앞에서 울분에 찬 그는 한 마리 범처럼 포효했다. 그도 떨어지는 선거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나 자신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고, 그러나 현실은 또 이렇게 떨어졌다고, 좌절감과 배신감 그리고 정치에 대한 절망감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술을 많이 안 하던 평소와는 달리 그날 강연 후 폭음을 했다. 나는 그를 위로를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술잔 부딛쳐 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밖에는. 그의 행동과 진정성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