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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영등포구 신길동 우신극장 부근에 있는 산동네의 두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당시 대학을 다니던 형과 사촌형 그리고 저, 이렇게 세명이 자취를 했습니다. 이 자취방은 같은 써클의 형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자주 들러 밤새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시국얘기를 나누는 소위 그 시절 꼴통(?)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저는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지라 제가 경험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의 대화가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감히 끼어 들지는 못하고 옆에서 살짝 귀동냥만 하곤 했지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형이랑 어느 분이 막걸리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엊그제는 수유리에서 터졌어"
"수유리? 그럼 한신대생들?
"응 그래. 매번 신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니 정부당국도 골치깨나 아플거야."
"그 친구들은 잡혀가서 고문당해도 오히려 고난이라 생각하고 버텨내니 ..."
"그러고보면, 종교없이 버텨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거지?"
"그렇지 ... 더 위대하다고 봐야지 ..."
순간 저는 이게 몬말인가 했습니다. 한신대는 뭐며, 신학생들이 터트린 거는 또 뭐고 ... 정말이지 귀가 솔깃했습니다. 듣고보니,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의 학생들이 꽤 큰 규모로 데모를 한 모양입니다. 허참, 목사될 사람들이 데모라니 ...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 왜 그런거지? 일반학생들이라면 몰라도 ... 정말 이해가 안갔습니다. 참다 못해 넌즈시 끼어들어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들 목사될 사람들인데, 데모하는 이유가 몹니까?
"응, 한신대는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교인데 말야. 1940년대 중반, 독일에 본회퍼라는 목사가 있었지.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는데, 이 사람의 현실참여 논리 중에 '술취한 운전사'라는게 있어. 말하자면 승객을 싣고 낭떠러지를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할 때, 만약 운전사가 술에 취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거지. 목사라고해서 기도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차를 정지시키고 운전대를 뺏어야 한다 이거야. 한신대생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데모를 하는거고 ..."
아, 종교란 것이 단순히 나만 잘 살자고 기도하는게 아니었구나. 이날의 대화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무지에서 탈피하는 걸음마의 시작. 그 다음날부터 형이 보던 책들을 슬쩍슬쩍 훔쳐보기 시작했습니다.
누렇게 빛이 바랜 수권의 사상계(1953년 4월, 한국신학대학 출신의 장준하 주재로 창간된 월간 종합교양지/그러고 보면, 장준하 선생과 본 회퍼는 동시대의 피끓는 현실참여적인 젊은 신학도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길은 달라서, 본 회퍼가 히틀러에 저항하다 39세의 나이로 총살을 당한 반면, 장 선생님은 포천의 한 야산에서 의문사로 돌아가실 때까지 신학자가 아닌 철저한 반정부 사회운동가로 평생 동안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갓 출간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 한창 출간 중인 월간<창작과 비평>, 월간<대화>, 월간<다리>, 월간<민족과 지성>, 송건호 선생의 <민족지성의 탐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던 많은 책들, 정신없이 읽었던거 같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들이 책 속에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라는 책도 있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장준하를 알게 되었고, 이 분이 한국신학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약력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형들의 대화를 통해 전태일이라는 분도 알게 되었구요. 어느 정도 한번 훑어 본 후에는 제가 마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장인이라 가슴만 설레일뿐 딱히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나간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구요.
특히, 저의 눈길을 끌었던 작은 책이 있었습니다. 책이라기보다는 A4용지를 반으로 접어 타이핑한 문고본 크기의 제본인데, 저자도 없고 아무런 도서정보도 없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저자가 독일인이었습니다. 농촌이나 빈민촌 등에 들어가서 어떻게 활동하고 조직해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메뉴얼이었어요. 이 독일인이 아마 목회자였던거 같습니다. 여기에서 상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었어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착한 사라마리아 사람>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다시피 이 얘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피해를 당한 사람을 돕는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여기서 이렇게 설파를 합니다. 종교(기독교)란게 늘 당하고 난 다음에 뒷처리나 해주는게 종교가 해야할 역할은 아니다. 그 이전에 당하지 않도록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할게 아닌가! 허걱, 놀랬습니다. 아, 그렇구나. 일리가 있다 ... 그렇지, 죽고 난 다음에 기도만하는 종교라면 온전한 종교로서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 맞아 ...
혹시나 하고 다시 책들을 뒤집었습니다. (방이 비좁아 책을 박스로 저장해 두어서 ...) 그중에 겉장이 널부러진 까만 표지의 오래된 성서가 한 권 있었습니다. 어? 형은 교회 안다니는데? 의아하고 궁금해서 후루룩 살펴보니 형의 것이 아니라 이름모를 형 친구의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맨 뒷면에 <아직은 이름없는 교회 000>라고 적혀 있는걸로 봐서는 일반적인 교회를 다니는 분이 아니고 다락방교회를 다니는 분 같았습니다. 아직은 이름없는 교회 ... 이름이 참 좋았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진지한 크리스찬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같은 박스에 들어있는 창작과 비평을 살펴보다가 또 한번 충격을 먹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문학서적하면 시/소설 등만 연상하기 마련인데, 이 책에는 사회의 모든 것이 실려 있었습니다. 농촌문제/종교문제/경제문제/정치문제 ... 그야말로 그 당시 초미한 문제들을 책 분량의 반에 해당할 정도로 싣고, 나머지 반 정도만 문학작품을 실었는데 ... 문학이란게 이런건가? 사회참여? 나참 모를 일이로다. 실로 내가 알던 기독교/내가 알던 문학 ... 모든게 뒤집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뒤집어지기 보다는 그러한 세계를 제가 몰랐던거지요. 지금도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창작과 비평 1975년 가을판에 <예수와 그 시대>라는게 있는데, 일본의 아라이 사사구가 쓴 글을 서남동 교수가 번역해서 실은 것이더라구요. 내용이 대단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별천지의 세계 ... 여기서 또 놀랜 것은 얼마나 분석적으로 공부를 했는지, 온통 밑줄과 깨알같은 글씨들로 ... 햐, 성서를 이렇게 공부하는건가? 대단했습니다. 근데 우리 형 글씨체는 아니고 ... 누굴까나 ... 이름없는 교회다니는 분 000 이분일까? 근데, 왜 교회도 안다니는 형이 이 책을 가지고 있지? 에라~ 몰것다, 스리슬쩍 감추자 ㅎㅎ~~ 이리해서 이 책만큼은 지금도 제가 보관중이네요 ㅋ~
그러던중 마침, 그 때 발간된 1978년 봄호에 신춘특별대담이라는 형식으로 <한국기독교와 민족현실>이라는 주제로 박형규 목사와 백낙청교수의 대담이 실렸어요. 그런데 내용중에 본회퍼가 또 나오는거예요. 참 흥미로운 사실이구나.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 (그 당시는 인터넷이 없을 때라 오로지 책에만 의존했는데 지금 마치 박봉팔닷컴/서프라이즈/무브온/ 등등이 어떻고 저떻고 하듯, 그 때는 오로지 월간 또는 계간이 창작과 비평/다리/대화/문학과지성 등등이었어요. 그리고 뭐가 어떤 일로 폐간당했니 어땠니 소문이 무성하고요 ... 창작과 비평도 몇 번의 휴간을 거친 걸로 기억됩니다.) 아뭏든 대담 내용을 보니, 해방자 예수/새교회운동/기독교와 공산주의/폭력과 비폭력 등등인데 ... 이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교회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연설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찾고 독일민족이 기독교의 세계화에 기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니까,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여기에 이용당하고 소위 <독일적 기독교>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을 포섭했는데, 거기에 반발한 사람이 카알 바르트, 본 회퍼, 니 묄러 이런 사람들이라는 대목(p.18)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본회퍼로부터 영향받은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이 있구요. 궁금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들 ... 그리고 그 생각들 ...
또한 루터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외친 까닭은, 루터가 제후들의 힘을 빌어 종교개혁을 한 뒤에 이런 정치가들이, 제후들이 개혁된 교회를 다시 이용하려고 하자 이것을 막기 위해서 정교분리라는 것을 내세웠는데 이후로 이게 전통화되었다고 하는 대목 ...(p.17)
이렇게 저의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기독교적 뷰 또는 종교관은 기독교를 입문하기 전에 우연한 궁금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당근, 교회는 안다녔지요.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그러다가 형들은 군대를 갔고 조금 후 저는 다니던 은행을 퇴직하고,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다가 제2차 오일쇼크를 만나 쫄딱 망해버렸습니다. 와중에 행내에서 만나 결혼한 안사람도 퇴직시키고는 그 퇴직금까지 깡그리 ... 큰 아이가 태중에 있었는데 ... 곧, 아이는 낳아야 하고 ... 하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파워프레스를 영등포 고물가게에 팔았더니 기계가 아닌 무쇠로 취급해서 키로당 얼마를 쳐주더라구요. 그걸로 아이 낳을 준비하고 ... 쌀 사고 ... 후휴~~ 앞이 캄캄했습니다. 길거리 행상이라도 하려고 돈계산을 해보니, 리어카 살 돈마저도 떨어지고 없어서 ...
이 때, 우연찮게 한국전력공사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해서, 부랴부랴 원서 접수하고 ... 책은 친구가 사준 것으로 공부를 하는데 ... 공부를 시작한게 9월 28일 ... 시험이 10월 13일 ... 아이는 도중에 10월 5일 낳았구요. 공부하는 기간이라야 딱 15일 ... 막막하더군요. 정말 초인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하는 중간에 아이 낳는거 확인하고 바로 책을 들어야 했어요. 그 때가 새벽인데 ... 답답해서 밖에 나가서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새벽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고개 아래에 비치는 빠알간 십자가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이것 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정신줄 놓고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가자마자 바로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이 계시는겁니까? 계신다면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요. 저를 살려주신다면 제 평생 당신이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 눈물콧물로 울부짖으면서 방식도 모르고 뭐도 모르고 무작정 기도부터 드렸습니다. 몇 시간 전에 낳은 핏덩이 ... 돈은 없고 ... 살아갈 길은 막막하고 ... 그나마 한전에 입사하는거 이게 일말의 희망인데 ... 그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서 근무하던 책상들도 없어지고 등등 ... 그야말로 실업자가 급증하던 때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치루는 초긴장의 시험이었지요. 실제로 엄청나게 지원했더군요. 전국의 각 도시에서/서울은 마포 환일중학교에서/ ... 서울만 하더라도 운동장에 깔린 그 새까만 머리들 ... 시험을 치루고 난 후 텅빈 교실에 혼자 남아 다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독교에 정식입문했습니다. 30여년 전, 서울 흑석동에서의 일입니다.
<다음 편은, 본회퍼의 기독교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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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