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봉 산장의 추억 그리고 소금강 -
진고개 산장의 아침이 밝아왔다.
옅은 구름에 가려진 햇볕이 부드럽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인지 날은 별로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산장 주위는 꽤 넓은 공터로 되어 있었다. 밤에 와서 보지 못했던 부서진 나무조각, 가스통, 비닐 등의 쓰레기도 보인다.
그리고 앞 쪽으로 쭉 트여진 평평한 공터에는 선행의 등산객이 밟고 간 흔적이 남아 있는 솜처럼 부드러운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오대산의 점잖은 봉우리가 눈모자와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향이와 숙이가 먼저 일어나 밥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일이는 잠자리가 불편해서 인지 옅은 잠을 뒤치닥 거리고 있었고 선이는 텐트 바깥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만으로 잘도 자고 있다. 새삼스럽게 저런 체구에서 그런 깡다구가 하는 심정이 들었다.
어제 일도 생각이 났다. 믿고 의지해야 할 남자들 중의 하나가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헤실 되는 꼴이라니. 그 당시 말은 안 했지만 초행의 겨울산, 그것도 끝없는 길과 점점 깊어만 가는 밤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았다.
그래서 정신 없이 자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별로 부끄럽지가 않다는 것이다. 향이, 숙이, 선이 모두 나에 대한 질책은 한 마디도 없었고 다들 피곤할 테니 일찍 자라는 얘기 밖에 없었다.
힘들다면 그녀들이 더 힘들었을 텐데도. 그리고 아침에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잘 잤느냐고, 몸은 좀 풀렸냐고. 사실 어제 일이 있는 후 우리는 훨씬 가까워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향이는 일이의 동생이기는 하지만 내가 일이에게 술먹이는 원흉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눈초리가 살갑지 않았다. 숙이와 선이는 이번 산행 때문에 사전에 두 번 정도 만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선이와 숙이가 스스럼 없이 나보고 오빠라고 했다.
향이는 살갑게 친 오빠 보다 나를 더 챙겨주었다. 숙이와 선이는 일이에게는 오빠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부르곤 했었다. ‘저기요’ 같은 것. 그녀들은 나로 인해 모성애가 생긴 것일까?
부끄럽다는 생각 대신 그냥 훈훈한 정으로 만 다가 오는 것이 정말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것이 산이 주는 넉넉함과 자연에의 동화일까? 그냥 산속에서는 남자, 여자, 너, 나가 없이 그냥 우리로만 남는 것 같다.
향이가 과감하게 일이를 깨웠다. 밥을 할 테니 물을 떠오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눈을 녹여 먹는 것은 번거로운 것도 있지만 깨끗하다고는 해도 녹였을 때 이물질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 몫을 못한 미안함에 먼저 물통을 들었지만 향이가 막았다. 몸이 덜 풀렸을 테니 여기서 텐트나 걷으라는 것이었다. 일이는 불만투성이의 얼굴로 물통을 나꿔채서는 어디에 있을 지도 모를 물을 가지러 떠났다. 숙이가 같이 가겠다고 일어섰다.
엊저녁에 먹고서 눈으로 대충 씻은 설거지를 해오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숙이는 일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일이도 마찬가지였지만 관습이 그들을 막았다. 동성동본이라는 것. 아마 그것이 아니었으면 좋은 커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선이는 주위의 부산함에도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 고생, 몸 고생이 심했나 보다. 내가 텐트를 다 걷고 향이와 어제 있은 일을 얘기하며 “왜 이리 늦지” 할 때쯤에야 그들이 돌아왔다.
일이의 얼굴에 상처가 보인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숙이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이었다. 물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절개지에 얼음과 눈이 덮힌 곳을 밟아 빠질 뻔 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크레바스를 만났다는 말이었다.
향이가 퉁명을 준다. 너무 호들갑을 부리지 말라고. 일이와 숙이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선이는 잠꼬대처럼 밥이 다되었냐고 묻는다. 밥이 다되면 깨우라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밥을 앉히고 카레를 끓였다. 가지고 온 김치도 꺼냈다. 산에서 가장 많이 해먹는 음식 중에 하나가 카레일 것이다. 나는 카레를 싫어한다. 아니 대부분의 서양음식을 싫어한다.
그러나 산에서 그것도 고생 끝에 기분 좋은 잠을 자고 난 눈 속에서의 카레는 그 냄새부터 달랐다. 그리고 고소한 밥 내음. 선이는 일어나라고 할 것도 없이 침낭 사이로 몸을 일으키더니 제일 먼저 밥을 건네 받았다.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듬뿍 카레를 얹어 맛있게 비비고, 한 가득 김치를 들어 입이 터져나가라 맛있게 먹었다. 남은 누릉지에 물을 부어 만든 숭늉도 맛있게 들이키고, 커피 물을 끓였다. 그리고 투박한 코펠잔으로의 커피 한 잔.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보다 조화로운 음식이 어디 있으랴! 일이와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식후의 여유로움을 한껏 누렸다. 향이와 숙이는 눈을 녹여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옷과 장비를 다시 추스러고 노인봉을 향해 출발. 노인봉으로 향하는 길은 동대산과는 달리 힘들지 않았다.
나는 처음 출발 시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동대산에서 처럼 추태를 부리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선이가 주는 사탕, 쵸콜렛도 열심히 먹었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 그래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6부 능선은 넘어서 가파른 길이 없어서 인지 모두들 여유를 부리면서 노인봉을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노인봉을 거쳐 바로 소금강을 향해 가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역시 점심도 간단히 라면으로 해결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날은 점점 찌프러져 가고 있었다. 눈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노인봉 산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 산장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식수대도 있었고 그릇 씻는 곳도 있었다. 산장 안의 구조는 단순했다. 문을 열자 정면에 벽난로가 보였다.
불은 없었다. 벽난로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바닥이 나무로 된 턱이 높은 잠자리가 있었다. 왼편 잠자리만 이층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 이층에는 선행의 등산객 한 팀이 막 짐을 풀고 있었다.
산장주인에게 우리의 여정에 대해 물었다. 산장주인의 말로는 날씨를 봐서 지금 소금강으로 출발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퍼부을 것 같았고 바람도 점점 세지고 있었다. 우리는 산장주인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에 짐을 풀고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다들 동대산의 악몽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짐을 풀고 쉬려는 데 갑자기 산장주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들은 모두 나가 나무를 해오라는 것이다. 곧 날이 저물고 추워질 테니 벽난로에 피울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 해졌다. ‘어 내가 여기 손님이 아니었던가? 아니 웬 놈의 산장이 땔감도 없단 말인가?’라고 내심 투덜대면서 바로 누군가 항의를 할 것으로 여겼는데 다들 아무런 말도 없이 주섬주섬 신발을 꿰차는 것이 아닌가. 나와 일이는 바로 알아채 릴 수 있었다. 이것이 산장의 법칙이라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산장주인은 주인이 아니라 등산객을 대신해 거의 공짜로 관리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장주인은 구조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밤이 깊었을 때 해주는 산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로 알았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산장주인의 말을 안 듣고 소금강행을 강행했더라면 그가 말하는 산의 무서움(특히 겨울산)을 모르는 죽을라고 환장한 놈들 중에 끼여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놈들 때문에 산장주인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허풍도 있음 직 하다는 생각이다. 산장주인의 외모는 내가 상상하는 그런 외모는 아니었다. 수염은 제멋대로 나있고 키는 작았으며 얼굴은 삐쩍 마른 데다 눈꼬리가 찢어져 일견 보기에 괴팍한 성격으로 보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있으면 외로우니까 찾아오는 등산객에 살갑게 굴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노인봉의 산장은 소금강으로 가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라 외로울 틈새가 없었는 지도 몰랐다. 여하튼 나의 깊은 산중에 산장을 외로이 지키는 후덕한 산할아버지의 환상은 그렇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투덜대면서 나무를 구하기 위해 일이와 같이 바깥에 나갔다. 산장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꺽여진 나뭇가지나 이미 죽어 있는 나무가 있는가 둘러보았다. 좀처럼 보이지 않다가 노인봉 정상쪽으로 올라가니 나의 팔뚝 두 개 정도 합친 굵기의 나뭇가지를 볼 수 있었다. 일이와 나는 그것을 끌고 산장으로 왔고, 그런 것을 몇 번에 걸쳐서 했다.
눈을 맞으면서도 몸에는 땀이 배여 나왔다. 그런데 이게 솔찮이 재미있는 것이었다. 일이와 내가 끌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은 선객들과 함께 끌었고 나뭇가지로 미끄럼도 탔다. 다들 경쟁하듯 나무를 끌어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힘들다는 표정이 아니라 즐겁다는 표정들이었다. 한 시간 정도 했을까. 드디어 산장주인이 그만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다들 수고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꼭 부모에게 착한 일을 한 후 칭찬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이와 내가 담배를 꺼내 물고 산장 아래쪽을 바라보았을 때 멀리 산장을 향해 오는 또 다른 등산객 일행을 볼 수 있었다.
눈이 점점 많아져 그들이 내리는 눈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산장 안에서는 산장주인이 벽난로에 불을 지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작이 우리가 가져온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사실 나뭇가지를 가져오면서 내내 눈에 젖은 나무를 어떻게 태울 것인지 궁금했었다. 역시 산장에는 준비된 땔감이 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나뭇가지는 다음의 등산객을 위해 말려지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산장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장작을 넣고 석유인지 모르는 기름을 붓더니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검은 연기가 났지만 이내 불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었다. 벽난로에 불이 없는 산장은 앙꼬 없는 찐빵일 게 분명했다. 벽난로의 불만으로 산장 안의 분위기가 이렇게 확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만 여겨졌다.
멀리 산장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던 등산객 일행이 도착했다. 우리는 턱에 걸터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깥은 바람과 함께 눈발이 거세져 있었다. 하얗게 덮어쓴 눈을 털고 우리 맞은편에 자리잡은 일행들. 등산복이 참으로 휘황찬란하다.
빨갛고 파란, 원색이 조화롭게 어울려져 있고 가벼우면서도 방수 방한이 저절로 될 것 같은 그런 옷이었다. 등산화는 또 어떤 가. 첫 눈에 비쌀 것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아이젠. 우리가 착용하는 여섯발 짜리가 아니었다.
전문 산악인이나 신어 봄직한 제대로 된 아이젠이었다. 그리고 모든 등산장비를 고루 갖춘 다섯 명의 일행들. 그들을 쳐다보는 나는 그들의 차림에서 부러움과 은근히 기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옷차림 새는 참으로 가관이다. 일이와 나는 빌딩 청소하는 분들이 겨울에 입는 어깨끈 일체형 솜바지에 구루마표 파커를 입었다.(특히 내 것은 파커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옷. 사진을 못 보여 주는 것이 아쉽다)
향이와 숙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선이만 겨우 등산복이라 할 수 있는 차림새였다. 아마 이미 산악회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침낭 또한 선이를 제외하고 깡통시장에서 구입한 군인들이 야전에서 사용했을 법한 투박한 것이었다. 저들처럼 오리털이 들어가고 숨을 내쉬는 완벽한 방한, 방수의 색깔도 보기 좋은 침낭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자 둘, 남자 셋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눈을 대충 털고 나자 그들이 모습과 하는 행동에 나와 일이 그리고 우리 여자들의 입은 다물어 질 줄 몰랐다. 모자를 벗자 나타난 두 여자의 얼굴. 금방 화장을 한 듯이 하얀 얼굴에 선명한 붉은 빛의 입술. 정말 대단한 화장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예뻐 보였다. 그리고 남자들의 행동.
한 명은 짐을 푸느라 부산했고, 다른 두 명은 각각 한 여자씩을 맡아 남은 눈을 털어주고 등산화를 벗겨주고 양말도 벗겨주고 수건으로 발까지 닦아 주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자들은 모습은 당연하다는 듯이 보였다.
일이와 나는 힐끗 우리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들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었지만 별 대수로운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까 상상하며 괜히 내 마음이 찔렸다.
우리는 저녁을 일찍 해먹기로 했다. 별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식수대에서 물을 받아 주고 버너를 켜주었다. 그녀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일이와 나는 밖에 나와 담배 한 대 피웠다.
날씨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날아갈 것만 같은 바람과 그 바람을 타고 내리는 눈발. 바람으로 인해 거의 누운 듯이 내리는 눈 속에서 보는 오대산의 풍경은 온통 회색 빛이었다.
멀리 보이는 능선을 경계로 진한 회색 빛의 하늘과 비명을 지르며 불어대는 세찬 바람, 우박처럼 내리는 눈, 그리고 광풍 속의 일엽편주처럼 눈을 맞으며 서있는 가녀린 나. 그림이 된다고 생각하여 일이로 하여금 한 컷 하도록 했다.
다시 산장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아차 했다. 산장 안의 풍경은 극과 극이었다. 먼저 들어간 일이 녀석은 담요를 깔고 누워 있었고, 향이와 숙이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맞은편의 그들의 행동은 정반대였다.
두 여자는 화장을 고치고 있고, 남자들이 식사 준비를 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화장을 고치는 여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고고해 보였다. 타고난 공주들이지 싶었다.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도와줄 거 없냐고 말도 못하고 그냥 걸터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이 녀석의 표정은 당연하다는 듯이 보였다. 자기 친동생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이윽고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런데 산장주인이 와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식사 준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향이와 숙이가 만든 것은 된장찌개였다. 두부 대신 김치를 넣고, 감자, 호박을 넣어 만든 좀 변형된 된장찌개였다.
산장주인의 표정으로 봐서 굳이 이 깊은 산속에 까지 와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용감한 여자들과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차려주는 밥만 낼름 먹겠다는 간 큰 남자들에 대한 찬탄과 어이없어 하는 생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향이와 숙이가 만든 된장찌개는 더 할 수 없이 맛있었다.
어느새 산장주인이 슬그머니 우리 식탁에 밥그릇을 내밀고 있었다. 그 댓가로 꽁쳐 둔 소주 한 병. 맞은편을 보니 여자들의 못마땅한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평범한 꽁치 통조림으로 식사 준비를 한 모양인데 그것이 맛이 없었는지, 우리가 부러웠는지, 아니면 우리의 된장찌개 냄새가 거슬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끓였다. 쵸콜릿을 넣고 비장의 무기인 보드카를 꺼내 커피에 조금씩 탔다. 커피향과 쵸콜릿향, 그리고 보드카의 향기가 어우러진 지상 최고의 커피를 끝으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산장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끔 무엇인지 모르는 덜컹대는 소리도 들린다. 산장주인과 등산객 중 몇이 얘기를 하고 있는 지 벽난로 뒤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린다.
동대산에서 부터 먹어온 과자, 사탕, 쵸콜릿, 그리고 마지막의 지상 최고의 커피가 그만 탈을 일으켜 버렸다. 평소 충치가 있는 나는 단 것을 거의 먹질 않았다. 커피도 블랙만 마셨다.
그런데 체력 보존을 위한 간식 때문에 충치의 벌레들이 그만 제 세상을 만나고 만 것이었다. 이빨로 인해 밤새도록 끙끙댔다. 산장주인에게 진통제 한 알을 얻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왜 그리 밤은 길고 지루하던 지. 아무런 기척 없이 자고 있는 일행이 야속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빨과의 전쟁을 한 지 얼마나 되었을 까. 나의 신경이 지쳤는지 충치의 벌레들이 지쳤는지는 모르지만 얼핏 잠이 들 수 있었다.
소란스러움에 깨어보니 산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깨어있었다. 역시 향이와 숙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맞은편의 여자들은 토닥토닥 화장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시종 같은 그 일행의 남자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고. 내가 깬 것을 본 향이와 숙이가 다시 자라고 말한다. 식사가 다되면 깨워 준다고. 밤새 아파 잠 못 이룬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나는 힘없이 그러고마 하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새삼 그녀들의 배려가 가슴에 찡하다. 잠깐 사이지만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식사하라고 깨우는 일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한결 정신이 개운해져 있었다.
이빨의 통증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건너편 일행처럼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뜻에서 ‘부럽지’ 했다. 향이와 숙이 선이는 별반 흥미가 없다는 듯이 저런 것은 오히려 더 꼴불견이라는 얘기를 한다.
산에 와서 남자, 여자 할 일 가려가며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음식 잘하는 사람이 음식하면 되고 힘쎈 사람은 무거운 것 들면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여기까지 와서 겨우 하는 것이 화장이라니 쯧쯧’ 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감동 먹을 뻔 했다. 할 수 있다면 뽀뽀라도 해주었겠지만 그냥 ‘그렇지’하는 맞장구로 끝낼 수 밖에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렇게 마음이 넓고 고운 그녀들로 인해 나는 왕자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맞은편의 남자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을 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든든한 아침식사를 하고 소금강으로의 출발을 시작했다. 밤새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바람과 눈은 거짓말처럼 말끔이 개여 있었고 하늘은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푸르름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내린 눈이 만든 온 산에 펼쳐진 설화의 잔치. 소금강으로 향하는 우리는 연방 신이 만든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사를 터뜨려야 했다.
파란하늘과 햇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순백의 눈이 만든 조화. 내리막의 소금강 길은 한 발만 헛딛으면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험한 길도 있었고 눈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길도 있었다.
동대산과 노인봉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 우리는 최대한 속도를 내며 걸었다. 어떤 곳은 진고개를 내려갈 때와 같은 길도 있어서 다시 한 번 배낭 눈썰매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걷고 뒹굴고 하면서 소금강 계곡을 내려왔다.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 격으로 내려온 소금강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는 경치를 만나면 기념촬영은 잊지 않았다.
소금강에서 의아해 하는 것은 구룡폭포였는데 아무리봐도 구룡폭포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아마 여름용 폭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드디어 소금강의 끝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명승지답게 기념품가게, 향토음식을 파는 가게, 식당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일이와 나는 동동주에 파전이 간절했지만 향이의 눈길 하나 만으로 모든 것을 접어야 했다.
사람들이 모두 힐끗힐끗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자는 빵모자에 등산복도 아닌 제각각의 복장을 한 남녀 일행이 온 몸이 눈에 젖은 듯 달려온 열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데다 손에는 공사판 인부들이 끼는 면장갑이라니. 아마 굉장히 서프라이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감한 우리는 소금강을 끝으로 이박삼일의 오대산을 뒤로한 채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