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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외미마을 이야기>는 제가 이 동네로 이사온 후 친구가 된 털보네 주변 이야기입니다.
"한잔 할래요?" 털보는 바깥사회에서 만난 최초의 친구입니다.
참여정부 집권 말기. 저는 몸담았던 회사를 퇴직하고 처오빠의 일과 연관하여 춘천에서 의정부 호원동 외미마을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동네 모퉁이에서 자그마한 슈퍼를 하는 털보는 제가 바깥사회에서 만난 최초의 친구입니다. 아다시피 오십 넘어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단순호칭 정도의 친구야 언제고 어디서고 가능하지만 상호간 소통되는 진정어린 친구를 말함입니다.
 제가 털보와 친구가 된 것은 이사온 후로도 한참 뒤였습니다. 청년기부터 줄곧 춘천에서만 살아왔던 저로서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문화가 상당히 서먹하고 낯설기만 했습니다. 이사 와서 맨 처음 한 것이라곤 .... 그저 일 끝나고 퇴근할 때면 동네입구에 있는 털보가게에 들러 달랑 소주 한병 사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암말 없이 .... 하루도 빼지않고 어김없이 .... 그렇게 지내기를 6개월여 ....
나중에 털보가 말하기를 '참, 희한한 사람이다 .... 모하는 사람이지? 생김새나 차림새로 봐서는 이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 하면서 엄청 궁금해 했다네요. 지금은 짖궂은 농담도 주고받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지만, '혹시 내 마누라 꼬실려고 이러나?' 했답니다 글쎄 ....ㅋㅋㅋ 참내 ....
습관적으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역시 소주 한병을 들고 계산하러 갔더니, 카운터에 앉아서 혼자 홀짝홀짝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털보가 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한잔 할래요?" 딱 이 한마디. 소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뜸하고 서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차츰차츰 말을 이어갔습니다. 얘기하다보니, 나이도 같았고 다섯째 아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었고 등등 ....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짝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친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저를 챙겨주기 시작합니다. 소위 "짝패"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동네에서는 어느 누구도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동네 통장님에게/ 옆집 식당 아주머니에게/가게 사장님들에게/드고나는 젊은 분들에게/자기 형제들에게 등등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인냥 소개하고 챙겨줍니다.
한편, 옛날 동네다 보니 소위 술주정뱅이들도 꽤 많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없습니다. 이 사람들마저도 저에게는 아주 깍듯하게 인사를 합니다. 털보가 이렇게 만들어주고 만들어갔습니다. 오죽하면 재헌엄마가 결혼해서 처음으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친구는 처음봤다고 싱글벙글 혀를 내두를까요.
이렇게 서로가 감싸주는 친구가 된 다음부터 저는 동네를 들고날 때면 의례껏 참새 방앗간처럼/ 볼 일이 있거나 말거나/ 항상 출필고반필면을 했고, 나중에는 밤중이라도 아무 때나 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 정치/경제/문학/음악/미술(천재적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 세상사 오만 잡얘기들을 .... 막걸리를 안주삼아 밤새껏 나누다 보면 어느새 훤한 아침 .... 이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털보네 슈퍼는 너무나 작은 생계형 구멍가게라서 24시간 문을 엽니다. 밤에는 털보가 지키구요. 그렇게 안하면 가게고 집안살림이고 유지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털보는 10년간 바깥구경을 거의 못하고 삽니다. 두세달에 겨우 한두번 시간내는데 .... 그것마저 노모 손잡고 버스로/ 열차로 예전 살았던 민통선내 지금은 없어진 고향마을에 가서 .... 어머님 바람쏘여 드리고 같이 나물캐오고 .... (예전에 살았던 주민들은 출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 아니면 청계천에 가서 LP판과 오디오 중고품을 사들고 오는 것, 이것이 털보의 유일한 바깥출입입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그러던 여름 어느날. 늘상 그렇듯 퇴근 길에  털보네 슈퍼에 들리니, 밤이 깊어 손님이 뜸한 탓인지 이 친구 느긋하게 카운터에 앉아 책을 보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그리 흔치 않은 광경이라 약간은 쌩뚱맞다 싶어
"야, 슈퍼에서 어울리지 않게 무슨 넘의 책이냐?"
조금은 오바하면서 정색을 하고 다가가자 "어서 와. 이제 퇴근하는거니? 뭐, 별거 아냐 .... 무료하기도 하고 .... " 이러면서 슬며시 책을 덮네요.
그러고는 마치 기다리기나한듯 발 아래 감춰두고서 지 혼자 홀짝거리던 막걸리를 병째로 꺼내들고 불쑥 권해옵니다.
"야, 너도 한잔 해라"
한 여름이라 무덥고 컬컬하던 참에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캬, 좋지~~ 좋고 말고~~"
그런데, 술을 따라주면서 이 친구,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옵니다.
"야, 너는 문학하는 넘이니 백석 시인 잘 알지?"
(속으로) 허걱, 깜놀했습니다. 아니, 이 친구가 백석을 다 알다니 ....
소위 북방계열 문학가인 백석/임화 등에 대해서는 체제교육상 정규대학 과정을 마치고도 작품은 커녕 이름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 실정이고 보면, 학력이래야 고작 초등학교 5학년 중퇴에다가 나이 또한 50을 넘겼으니 이거 당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지금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도 출제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문학을 한다지만 손 놓은지 꽤 오래라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몬 말을 주고 받을지 몰라 잠시나마 멍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어색하고 어정쩡해지더라구요.
"그럼, 너 지금 .... 백석의 시를 읽고 있었어?" 하고 어눌하게 묻자
이 친구, 저의 이런 표정과 마음을 놓칠 리 없습니다.
".... 됐고, 됐어. 근데 말야 .... 이 시 좀 봐보자"
털보가 주섬주섬 아까 읽었던 면을 다시 펼쳐보입니다.
여승 (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 이하 중략 -
이 친구, 아직 감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를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혼잣말을 이어갑니다.
"이런 시인이 있었다니 말야. 나 이거야 도대체 ....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하냐 이거야 ...,"
순간 저는, 거의 반사적으로 책의 겉면을 확인했습니다. <해방문학선집>인가 뭔가 그랬습니다. 이 친구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어요.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놀랬냐구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 친구가 살아온 과정을 간략하게 말씀드려 볼게요. 이리 하는 것이 웹문서의 특성상 앞으로 펼쳐갈 이야기의 얼개를 잡는데 도움이 될거란 생각이 듭니다.
의정부시 호원동 외미마을 <종이와 슈퍼> 주인장 털보
1957년 동두천 출생(6형제중 다섯째로 태어남)/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하고 바로 공장생활 전전/
청년기에 도미하여 10년 정도 체류하다 귀국/
결혼 후 의정부 외미마을에 문구점<종이나라>를 임차개점했으나
대홍수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음/
다시 옆자리에 실내면적 3평 남짓한 <종이와 슈퍼>를 임차개점하여
반은 문구점, 반은 슈퍼로 운영 중임/
가게 앞 모퉁이에 2평 남짓 허름한 휴게실을 마련하여
동네사람들을 상대로 막걸리와 음악을 제공/
6형제 모두 천부적으로 음악을 좋아하여 지금도 서로
음악정보를 주고 받고 있음(털보 혼자만 LP판 1만여장 정도 소장)/
(지금도 가끔 청계천에 나가 LP판을 수집함)/
형제들의 여건상 털보가 팔순노모 봉양(약간의 치매를 앓고 있음)/
아내는 심장병으로 고생 중이고 자녀는 외동아들 재헌이를 두었으나
발달장애 상태임(뇌종양이 발견되었지만 위험해서 수술을 못하고 있음)/
(물리학자까지 동원해야 한다고 함.)/
정치적 성향은 강한 진보적 색채를 띄고 있으나 주변이 온통 극렬보수 텃밭이라
장사하는 입장상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함.
 이상이 이 친구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입니다. 외미마을 중에서도 털보네 가게가 있는 곳은 아직까지 개발이 안되고 있는 도시 속의 외딴 섬입니다. 60~70년대 건물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아파트촌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있습니다.(최근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예전부터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계시고 정치적 성향은 대부분이 극렬 보수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30~40대 젊은 층들도 대부분이 보수마인드입니다. 이 친구는 이런 환경 속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팔순노모와 심장병을 지니고 있는 아내, 그리고 지적장애를 가지고 또한 뇌종양으로 인해 언제 어찌될지 모르는 외동아들 재헌이를 먹여 살리려, 24시간 (부부교대로) 가게를 지키면서 주고객인 이곳 주민들과 함께, 몸으로 마음으로 부대끼고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살아온 환경을 보면 진보적 의식이라는게 도무지 자리할 틈이 없어보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나 여러 측면에서 감히 제가 생각치도 못하는 얘기들을 하고 틈나는대로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 친구를 보면서 저는 항상 전태일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내 옆에 대학다니는 친구 한명만 있다면 .... 늘 한탄하던 전태일열사 말입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이렇게 백석으로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임화/김소월 등 북방출신 문인 전반에 걸쳐 얘기를 나누다가, 급기야는 친일문인에 대한 작품과 입장으로까지 얘기가 확대되어 갔습니다.
이 친구, 또 다시 물어옵니다.
"친구야, 너는 미당 서정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
선듯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이 친구의 말을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이 친구가 말을 이어갑니다.
"너, 서정주의 자화상이라고 알잖아. 비록 그 분이 친일을 했다지만 ....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몰라 .... 난 문학은 문학으로서만 간직하고 싶어. 이게 내 욕심일까?"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친구가 살아온 과정과 미당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동시에 오버랩됩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여,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나는 미당의 자화상. 그래서 그랬을까요. 이 친구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합니다.
(털보네 주변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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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기분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