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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연식이 좀 있는 사람이면 어릴 때부터 군가를 어디선가(전쟁 드라마, 영화는 왜이리 많았던지) 줏어 들어서 몇 곡쯤은 손쉽게 불러 제끼곤 했었다. 그것도 아니면 고등학교 때 교련시간에 군가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래서 군가는 그냥 일반 가요처럼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여자애들 고무줄을 하거나 남자애들 총싸움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되어 있었다.
군대를 가게 됐다. 나름 음악에 조예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군가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진지하게 임했다. 열심히 따라 부르고 음정, 박자 안 놓치려 애까지 썼다. 군가에도 나름 서정적인 곡도 많다. 거기다가 가사에 어머니 어쩌고 들어가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가고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눈알에도 힘을 꽉 줘야한다.
근데 실제 이동 또는 훈련 중에 군가를 부르게 되면 완전 엉망이 되는 거다. 이유는 다 알다시피 조교들이 훈련병들에게 원하는 건 높은 음악성이 아니라 원시적인 목소리 하나였다. 그 목소리가 크고 작음으로 훈병들의 군기를 가늠했고 그렇게 가늠된 군기는 때로는 지독한 얼차려로 또 아주 가끔은 달콤한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보상도 주어졌다. 실제가 이렇다 보니 음이고 박자고 간에 무조건 큰소리로 빽빽 군가를 불러 제껴야 살아 남기 때문에 곡의 서정성은 커녕 가사도 음미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상병이 되었고 군가는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한가하게 군가 따위로 고민할 멍청한 군바리들은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장이 정신교육 시간에 사단(2사단 노도부대) 차원에서 군가 바로 부르기 운동을 한다는 거다. 그 말을 들은 대다수의(나를 제외하고 ㅋ) 중대원들은 뭥미? 하는 표정으로 중대장을 바라봤다. 중대장 왈 '사단장님 특별 지시다. 군가를 음정과 박자에 맞춰서 부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 그래서 성악을 전공한 병사들이 일석점호(잠자기 전에 대가리 수 확인하는 절차 - 쫄다구들에겐 죽기 보다 싫은 공포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에 각 중대를 돌며 군가를 지속적으로 교육을 시킨단다. 그 후부터 일정 기간 동안 나보다 노래 못부르는 성악 전공했다는 병사가 우리 중대에도 와서 군가교육인가를 시켰다. 그래도 첨부터 군가를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터라 제대로 된 음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부르던 대로 곧 원위치됐다. 노래라는게 재능이 없으면 힘든 거다.
그 즈음이었다. 사단장이 갑자기 우리 연대를 방문하게 되었고(사단본부는 양구에 있었고 우리 17연대는 인제에 있었다) 각 병들과의 대화를 갖는다고 했다. 이등병부터 대위까지인가 아니면 중위까지 인가 계급별로 한 명씩 대표로 뽑혀서 헬기장 옆 벙커에서 실시한다고 했다. 우연찮게 내가 상병 대표로 뽑혀서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진행방식은 우리가 건의 또는 질문을 하면 사단장이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는 일종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치뤄졌다.
중대장까지 나서서 나의 군복 착용상태를 확인 해 줬고(덕분에 A급 군복과 군화 얻어 신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행사에 참석했다. 보통 사단장들의 비서실장은 사단 주임원사들이 하는데(계급은 상사다. 좀 특별한 상사라고나 할까? 하지만 영관급들도 함부로 못한다) 이 주임원사가 리허설을 한다고 했다. 사단장 도착 얼마 전이었을 거다. 그러면서 각자 건의사항이나 질문내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 나도 그 때 뭐라 대답은 했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시간 관계상 다섯 명의 질문만 추려 하라고 했고 난 거기에서 탈락됐다.
역시 별 두개인 사단장은 생김새와 목소리부터 장군감이었다.(병의 눈엔 사단장은 하느님과 동격인 거다 ㅋ) 미리 짠 시나리오대로 얘기가 다 오갔고 사단장이 다음 질문 없나 했을 때 난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크게 소리쳤다. '상병 카이사르!' 그 때 깜짝 놀라던 사람들의 눈, 그 중에서도 주임원사의 눈은 잊을 수 없다 ㅋ
사단장: 오, 그래 할 말이 뭔가? 나: 네. 1대대 2중대에 근무하는 카이사르라고 합니다. 사단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우리 사단에서는 대대적으로 군가 바로 부르기 운동이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단장:(약간의 호기심을 보이며) 그렇지 나: 잘 아시겠지만 노래란 특별한 재능이 없으면 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훈련소에선 한꺼번에 여러 곡을 배워야 합니다. 첨에 배울 때 올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계속 잘못부르게 됩니다. 사단장(고개 끄덕이며 계속 하라고 한다) 사실 이 때 내 심장은 얼마나 쿵쾅쿵쾅하는지 아마 옆에 앉았던 사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입술은 왜이리도 타는지 ㅋㅋ 나: 게다가 훈련소에서 조교들이 군가를 군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서 무조건 크게만 부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군가를 제대로 부를 수 없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는 겁니다. 사단장: 자네 몇 중대라고 했나? 나: 예, 2중대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단장은 전화를 돌려 우리 중대장을 찾았고 부하를 잘 훈련 시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실 중대장과는 악연이 많다. 이 놈이 일개 이등병인 나에게 '우리 삼촌이 별 세개야, 씨발 놈아' 했다면 여러분들은 믿어 지겠는가? 기회 있으면 함 써볼께) 당연히 주임원사의 표정도 안도의 빛이 돌아왔고..... 뭐, 난 원래 팔할 말대로 겸손과는 거리가 먼 자세로 봐라 요것들아 하는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뭐 ㅋㅋㅋㅋㅋ
나중에 신병들이 들어왔을 때 들은 얘기지만 정말 사단 훈련소(양구에 위치)에서 군가교육이 완전 바뀌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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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