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경북 상주 에서 서울로 전학 왔다. 따돌림을 안 당하려고 말씨를 고치기 위해 이민자에 맞먹는 노력을 해야 했다. 이런 고충은 '서울에서 교양있게 산 사람'은 모른다."(소설가 성석제 )
"나는 총각 때 부산 아가씨한테 말씨가 간지럽다고 차인 적이 있다. 서울 사람도 피해 볼 때가 있다." (이지양 가톨릭대 교수)
"대학 시절엔 표준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는데 부산 아가씨가 서울 말씨 좋다고 따르더라. 더 세련돼 보인다고…."(성석제)
↑ [조선일보]충청도(왼쪽 사진)와 경상도(위)에서 쓰인 지역 홍보 문구들.
↑ [조선일보]표준어와 방언(사투리)을 둘러싼 개인적 에피소드가 소개되며 폭소가 터지기도 한 국어정책토론회 참석자들. 왼쪽부터 소설가 성석제, 강희숙 조선대 교수, 사회자 손범규 아나운서, 윤석민 전북대 교수.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열띤 토론 중간중간 폭소가 터졌다. 11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국어정책토론회. 네 번째 주제는 '표준어만 되고 방언은 안 되나'. 1933년 한글맞춤범통일안에서 "표준어는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고 규정한 이후 우리 언어생활의 중심 자리를 누려온 표준어에 대한 찬반 토론이었다. 토론자석에는 '바른말 지킴이' 아나운서와 중견 소설가가 포진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얽힌 웃지 못할 사건이 있다.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 에서는 이른 봄 노랗게 피는 생강나무를 '동백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출판업자들은 책에 (흔히 아는) 빨간 동백꽃을 그려넣었다."
첫 발표자로 나선 강희숙 조선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것이 표준어 위주 정책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표준어가 권력화한 나머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익혀온 방언까지 외면하게 한다. 요즘 노인들 사이에선 손자 양육을 떠맡지 않으려면 사투리를 쓰면 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라고 했다.
강 교수는 "쭈꾸미(주꾸미가 표준어), 뻘낙지, 아구찜 같은 숱한 음식명도 표준어에는 없는 것들"이라며 "앞으로 언어 정책은 표준어 중심의 획일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상성을 포기하지 않는 지역 문화 복원을 위한 일종의 다언어 정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석민 전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어릴 적 체험담으로 반론을 시작했다.
"한 어른이 '매급시 거시기항께 참말로 퍽퍽하더마이'라고 하시는데 못 알아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가 표준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최명희 '혼불'에 호남 방언이 등장하지만 타지 사람도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대화와 달리 지문은 대부분 표준어를 쓰기 때문"이라며 "표준어와 방언은 어느 게 우월하거나 상호 대립적인 게 아니라 각각 상황에 맞게 역할을 살려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토론자인 강성곤 KBS 아나운서는 "표준어론자를 방언 박해자로 보면 곤란하다. 덴마크 학자 오토 예스페르센은 '표준어란 그 발음을 듣고 어느 지방 사람인가 분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했는데 우리 경우 근접한 말이 서울말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성석제씨는 표준어의 '위압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 와서 갖은 노력 끝에 대학 때 거의 완벽한 표준어를 습득했다. 그 뒤 서른 넘어 작가가 된 후부터는 다시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표준어가 가진 권력화된 속성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부인할 수 없다."
질문 순서가 되자 원창묵 전 KBS 아나운서실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강 교수는 국민이 지역어를 모두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게 하자고 했는데 경북 북부만 해도 3가지 사투리가 있다. 없어진 서울 사투리, 노비 계급 말도 찾아서 다시 써야 하나"하고 반문했다.
가톨릭대 국문과 이지양 교수는 "각 지역 사람들이 다른 방언까지 배워야 한다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 것"이라며 "표준어는 일반적 소통수단으로 삼고 방언은 각 지역 소통수단이나 지방문화 보존 수단으로 활용하면 된다"고 했다. 방청석에 있던 소설가 정도상씨는 "이제는 표준어와 방언은 물론, 통일 이후 북한말까지 아우르는 '보통어' 개념을 연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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