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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1979년 5월 어느 날,
지루한 연속 두 시간짜리 경제학 원론 강의가 끝나자 그는 교재를 챙기는 늙은 교수보다 먼저 강의실을 나왔다. 문을 열자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활짝 웃으며 반긴다. 그가 그녀의 팔을 낚아채듯 붙들고 이끌어서 두 사람은 뛰다시피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물거리다가 친구들에게 붙잡히면 떼어놓기가 힘들어진다.
그들은 문리대와 상대건물 사이에 있는 아프로디테동산이라 이름 지어진 숲을 관통하는 통로 겸 산책로로 들어섰다. 학교 정문으로 가자면 큰길보다 약간 돌아가는 셈이지만 그들은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이 길을 이용했다. 그것은 그곳이 계절에 따라 꽃향기와 신록과 낙엽과 눈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이유에서 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곳이 그들에게는 특별한 장소였던 때문이었다.
숲으로 들어서서 길을 따라 10분 쯤 걸어가자 익숙한 꽃향기가 숲속으로부터 마중을 나왔다. 향기가 사람을 환각에 빠트릴 만큼 강렬해졌을 때 그 향기의 주인인 라일락 나무가 나타났다. 나무는 흐드러지게 핀 많은 꽃을 달고 길가에 비켜 서있었다.
그녀는 그 나무 가까이로 다가가서 흡사 마약 중독자가 하듯 눈을 감고 꽃들 사이로 코를 들이밀었다. 일 년 전 그날과 똑같은 모습이다. 주위풍경과 분위기, 화창한 날씨도 그때와 꼭 같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그녀를 처음 만나던 그날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곳을 지나다가 꽃향기에 넋을 잃고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는 어떤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마비시킨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동산에 내려온 아프로디테여신이었다.
꽃향기에 취해 한참을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하얗게 된 그의 뇌 속에 며칠 전에 본 고전연극의 대사 하나가 불쑥 떠올랐고 그것이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대가 마음을 빼앗긴 꽃보다 그대 자신이 훨씬 아름답소.”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뜻밖에도 미소를 지었고 그것이 기분 좋은 시작의 첫 신호였다.
그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딱 한마디 대사로 대학 최고의 퀸카로 알려진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는 일화는 캠퍼스의 전설이 되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어딜 가나 붙어 다녔다. 그들은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학교 앞 카페에서 음악도 듣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취하도록 술도 마시고, 학교 축제에서는 남들 앞에 나와서 춤도 추었다. 인적이 뜸한 도서관 뒷산의 산책길에서는 다분히 학문적이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가자미눈이 되어 서로의 입술을 찾기도 했고, 그러다가 서로의 몸을 더듬기도 하였다.
그렇게 달콤하기만 했던 그들의 학교생활은 문정인을 알게 되면서 질적으로 진화 했다. 학생부에서 주최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학생운동을 주제로 한 문정인의 열정적인 연설에 매료되어서 그가 주관하는 야학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야학활동은 치열한 입시를 치르고 얻어낸 대학생활의 귀중한 시간을 연애로 탕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그들 마음속의 불안과 가책을 잠재워 주었고 지적인 허영심도 채워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덤으로 무엇이든 함께하는 그들에게 새로운 놀이공간과 놀이방식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학 활동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들은 곧 문정인을 도와서 야학을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었다.
라일락꽃이 만개한 오늘 같은 날은 서둘러 지나치기 싫었지만 갈 데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정동에 위치한 젠센 기념관에서 있을 대학생 시문학 모임의 창작시 발표회에 참가했다가 근사한 장소로 옮겨서 연애1주년을 기념할 예정이었다. 김인철은 근처를 오가면서 봐둔 이태리 식당 ‘이딸리아노’의 창가자리를 그녀 모르게 예약해두었다.
아프로디테 동산을 벗어난 그들은 상경대 건물 모서리를 돌아 정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문 쪽으로 난 큰 길의 왼쪽으로 있는 공대건물 앞에 어림잡아 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고 역시 그 정도 숫자는 됨직한 한 무리의 전경들이 정문을 봉쇄한 채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학생이 공대 건물 옥상에서 위태로운 모습으로 “유신독재 물러가라”하는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 아래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은 건물 옥상위에 있는 학생에 호응하여 규칙적인 박수와 함께 구호를 따라 외쳤다.
그때 갑자기 대여섯 명의 사복조가 옥상에 나타나서 유인물을 뿌리고 있는 학생을 잡으려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우”하는 야유 소리와 함께 손에 땀을 쥐고 일촉즉발의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올라가서 도와주자” 하고 소리치자 수십 명이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쪽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그들이 채 계단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학생은 갑자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는 땅으로 뛰어내렸다. 5층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닿자 불꽃 대신 피를 사방으로 뿌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타오르지도 않았다.
흥분한 학생들은 “죽여라.” “살인정권 몰아내자”하고 외치면서 정문 쪽으로 몰려갔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돌이 날았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학생들도 달려오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까지 몰려나와서 학생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났다.
김인철과 희선도 시위 학생들 속에 섞여 들어가서 힘을 보태었다.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기위해서 스크럼을 짜고 정문 쪽으로 거세게 밀어 붙였다.
공방 끝에 드디어 숫자에서 우세한 학생들은 정문에서 전경들을 밀어내고 도로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도로를 점거한 학생들의 기세가 대단해 보인 것은 잠깐 동안 뿐이었다. 그들은 도심 쪽으로의 행진을 시도하였으나 단 몇 발자국 나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최루가스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로 방어에 목숨을 건 전경들과 밀고 밀리기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차츰 장비를 갖춘 전경들의 힘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전경들이 시위의 대열을 여러 갈래로 쪼개나가자 학생들의 대오는 급속히 허물어졌다.
대오가 허물어지자 학생들은 경찰들이 내두르는 곤봉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찰들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포획된 학생들은 닭장차라 불리는 경찰차에 마구잡이로 실렸다. 도로 주변의 시민들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광경을 보고도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두 사람은 잡힐 뻔한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경찰들의 손길을 피해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로 다시 돌아온 동료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소주를 안주 없이 깡으로 나누어 마시는 친구들도 있었다.
김인철은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자신의 몸을 던진 그 친구는 누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그렇게 계란 같은 몸을 정권의 바위에 내던진 것인가? 그런 방법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과 무력감을 함께 안겨준 그 친구에 대한 분노마저 일었다. 죽음의 현장에, 그 흔하던 기자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기자가 있다한들 통제 당해 사망한 언론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었다. 국민은 오늘 독재정부에 항거하는 학생 한명이 죽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지나갈 것이었다.
희선이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학생을 치료하느라 분주하고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때 문정인의 친구인 박종국이 그를 찾아냈다. 오늘 야학 중등부 수업이 있는 황인성이 사망한 학생 집에 가야하므로 수업을 대신 맡아달라는 문정인의 전갈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할 일이 생겨서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어차피 창작시 발표회도 틀린 일이었고 근사한 저녁도 내키지 않던 차였다. 그들은 터덜터덜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봉천동행 버스를 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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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