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지를 얻다 -
가구 배치가 끝난 사무실을 둘러보는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직공원 건너편에 재개발로 깨끗하게 새로 지어진 주거 겸용 사무실을 월세로 임대했다. 침실이 딸려 있고 사무공간이 여유 있는 70평형이었다. 책상과 테이블 등이 제자리를 잡자 썰렁하던 실내는 단정하고 일하기 손색없는 공간으로 변했다. 소품이나 꽃으로 분위기를 내는 것은 가까운 시일 안에 근무하게 될 직원 중의 누군가가 할 일이었다.
그가 막 나가려고 할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항상 그를 안심시켜주는 경쾌한 목소리, 인도네시아 회사의 비서 헨니다. 32세 노처녀로 말이 비서지 거의 모든 일을 총괄한다. 가장 중요한 그녀의 일이 자금업무인데 그는 그녀를 돈에 관한한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도 없이 가셔서는 연락도 없으시네요?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죠?”
“한 달 후 쯤? 그렇지만 돌아간다 해도 며칠 동안만 있을 예정이야.”
“예에 ?????, 회사는 어쩌고요?”
“회사를 언제는 내가 경영했나? 자네들이 다 해왔지. 나는 예전부터 회사에서 쓸모없는 존재였지 않아? 한 달 후 쯤 가서 내가 하던 일 분장해서 인수인계 해 줄 테니 그때까지는 그대가 모두 알아서 하게. 별일은 없지?”
“전 못해요. 일주일 내로 안 오시면 저도 시집이나 갈래요. 하여튼 잠수 타는 데는 선수시라니까.”
투정조로 이렇게 말하지만 그는 이 아가씨가 모든 일을 완벽히 처리해나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골프채만 하나 달랑 들고 떠나서 3개월 동안 인도네시아의 모든 골프장을 섭렵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회사는 그 동안도 더 할 나위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 퍼시픽팀버 사에는 그 쪽에서 재촉이 심하고 루틴한 일이라 제가 그냥 그전 가격에 P/O 넣었습니다. 그리고 금주 내에 사하밧스자띠 사에 미화 사십만 불 결재할 예정입니다. 그 외에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고마워”
“몸조심 하십시오 , 사장님 잘못되면 우리 모두 고아 됩니다.”
그의 회사 직원들은 실업자가 된다는 표현 대신에 꼭 고아가 된다는 표현을 쓴다. 직원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사무실을 나선 그가 십 분 쯤 걸어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다다르자 눈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의 촛불들이 인도와 차도를 가득 메워 바다를 이루었다. 그가 사진이나 실물로 본 어떤 것보다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촛불의 바다는 광화문과 시청 앞 주변의 건물들을 삼켜버릴 듯 넘실거렸지만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질서정연했다. 구호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두 번씩 연호되었다.
“탄핵 무효!, 탄핵 무효!”
그것은 어수선하게 분산되지 않고 훈련받은 단체가 하는 것처럼 통일되고 또렷했다.
그는 누군가 준비해주는 촛불을 받아들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구호를 따라 외치며 그는 부지런히 군중 속을 헤집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렵지 않게 노란 깃발들에 둘러싸인 무리들 사이에서 김정수를 발견했다.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알게 된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진실 된 사람으로 평가하는 젊은이다. 젊은이가 재벌기업 계열사인 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의 현지법인 파견 직원으로 자카르타에 근무한 인연으로 두 사람간의 친분이 맺어졌다. 그는 그의 회사에서 의뢰한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했던 이 젊은이의 재능에 탄복했었다. 그가 개발한 프로그램은 전 세계의 벌목용 산림 소유회사의 미 벌채 원목 잔여재고와 월별 출하 예정량, 각국의 신규 건축 주택지표와 가구 생산지수, 그리고 기후 등의 수많은 변수를 입력하여 전 세계 합판과 원목의 수요 공급의 변화와 가격의 변동까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특출한 점은 입력되고 업데이트되어야 할 수천가지 통계자료를 그것을 내놓는 국가나 단체의 사이트를 스스로 접속하여 찾아올 수 있다는데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의 사업에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러한 컴퓨터 관련 재능이 그를 매료시켰다고는 해도, 그것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각별한 친분으로 맺어줄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정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인철과 같은 사람을 매료시킬만한 조건들을 갖춘 사람이었다. 평소의 행동에서 절절히 묻어나는 애국심,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 현지인들을 대할 때 드러나는 인간애와 측은지심 그리고 종이신문에 세뇌되지 않는 수준의 지적능력이 그것들이었다.
2년여 전 이 젊은이가 귀국하기 위해 사직을 결심하기 직전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었다. 직장생활을 그만하고 자유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탕에 있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자원했던 해외근무 연한 3년을 채워 본사근무를 원하는데 회사에서는 3년을 더 연장하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젊은 날에 겪었던 갈등을 떠올리며 자기와 부분적으로 다른 결정을 내리고자하는 젊은이의 생각을 지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더 오래 해외에 머물면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둘째, 평생 직장생활을 할 요량이 아니라면 젊었을 때 그만두는 게 낫다.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는 데는 직장생활이 더 확률이 높겠지만 아무리 고생이 심해도 한번 뿐인 인생을 틀에 넣어서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
셋째, 그는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 먹고사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그에게 간간이 소식을 전하다가 재작년에 결혼한다고 연락을 했었다. 그는 그때의 곤혹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김정수의 결혼식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인도네시아에 있었으므로 결혼식에 참석은 못하고 결혼축의금으로 소형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보냈었다. 시골에 있는 연로한 부모님을 부양하느라 저축한 돈이 별로 없는 김정수가 2-3년 후에나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있다가 신부 쪽의 사정 때문에 갑작스럽게 무리하여 결혼식을 하게 된 정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액수가 너무 커서 받을 수 없으므로 돌려주겠다는 이 젊은이와 옥신각신 하다가 짐짓 화를 내고서야 사태를 수습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김정수가 귀국한 그해 치러진 한국의 대선에서 이름 없는 네티즌들의 활약상을 듣고 그는 이 젊은이가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젊은이를 노란색을 상징 색으로 사용하는 단체의 본거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을 것으로 그가 확신하는 이 젊은이의 의식 성향은 해커 수준의 컴퓨터 지식과 함께 그가 하려는 일에 그를 참여 시키고자 하는 이유이며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젊은이는 간간이 구호를 따라 외치며, 옆에서 수첩에 쉴 새 없이 메모를 하고 있는 여자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아서 옆에 서서 한동안 그들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약간 마르고 검게 그을어 강인하면서 거칠어 보이던 김 정수의 모습은 2년 만에 살과 관록이 붙어서 침착하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옆의 여자는 일렁거리는 촛불들 사이로도 빼어난 이목구비가 금방 눈에 띨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이 오늘 김정수를 만난 다음 그를 통해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당사자임을 곧 알아보았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만난 것은 일이 잘 풀리는 징조일 것이었다.
김정수가 그를 먼저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큰 소리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 선배님 ”
그리고 잠시 자신을 수습한 뒤에 평정한 목소리를 되찾았다.
“ 어찌 이곳에?”
그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하듯 젊은이의 눈을 힘 있게 응시하며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자네와 뭐가 다르겠는가?”
김 정수는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를 잊은 듯 그에게만 집중했다.
“그래도 바쁘신 분이........ 한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그는 눈이 마주친 여자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갑자기 왔네. 하는 일은 어떤가? 훨씬 좋아 보이는군.”
“예, 프로그램 개발하는 일을 여기저기서 받아서 해요. 조금 큰 프로젝트는 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하고요. 자영업자겸 프리랜서죠. 일이 부정기적이니 수입도 들쑥날쑥하지만 아직은 식구가 적어서 충분해요. 아직 애가 없는데다 아내도 일을 하거든요. 혼자서 일을 하니 불안하기도 하지만 직장생활 할 때 보다 좋은 점도 많아요. 자유롭고 일하는 보람도 더 커요. 출근할 걱정 없이 밤새도록 시위도 할 수 있고요.”
들뜬 목소리는 넘치는 자신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기들 힘으로 무명의 정치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그들에겐 대통령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인식될 이번 탄핵의 소용돌이도 한바탕의 축제일 뿐 이었다.
곧이어 머쓱하게 서있는 그녀를 발견한 김정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소개하려고 하였으나 그녀가 기다려주지 않고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좀 비켜줄래? 김 선생님은 나도 잘 아는 분이야."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한 지숙 입니다. 한국방송에 있을 때 인도네시아 취재 갔다가 뵌 적이 있는데. 저 기억 하시죠?”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기를 기억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표정, 도전적이다.
“그럼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김인철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손바닥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서 이기용의 뺨에 ‘철썩’소리를 내며 내려않던 장면은 통쾌한 경우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지금껏 그의 뇌리에 남아있다. 바로 그 손의 주인인 그녀를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3년 전 쯤 될 것이었다. 그보다 좀 더 전이거나.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가 다된 무역진흥공사 지사장 공영호가 송별인사조로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그와 각별히 친하게 지내던 10여명의 인사들이 주간 골프와 뒤풀이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는데 서울에서 취재출장차 자카르타에 온 공영호의 고교 친구인 한국방송 보도국장 이기용을 제외하고는 무수한 횟수의 실력겨루기로 맺어진 내기의 원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멤버들이었다.
자카르타 한국음식점의 식상한 메뉴가 그러하듯 한인들 사이의 모임은 자리의 분위기나 오가는 대화 내용, 그리고 그 전개방식 마저도 언제나 비슷하다.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아래서 흘린 땀만큼의 수분을 보충하겠다는 듯 잘 냉장된 맥주를 부딪치기 바쁘게 들이켜 대면서 오늘의 플레이에 대한 저마다의 무용담을 쏟아낸다. 마치 방금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귀대한 병사들 같다. 상대자의 실력이 엄청 늘어서 상대하기 벅차다는 얘기 -H상사 박 부장의 맞수이자 업무로도 라이벌인 삼송물산의 최 이사 - , 티샷 거리가 300야드 넘게 나갔다는 얘기 -오로지 힘 하나는 알아주는 대사관의 서 참사관 - , 공한 개 거리 차이로 홀인원을 놓쳤다는 얘기 -통산 12개의 홀인원을 할 뻔 했으나 막상 해본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는 K 건설 오 상무 - , 오늘의 치욕은 오로지 그놈의 벙커 때문이라는 얘기 - 언제나 마치고나면 그놈의 무엇이 나오는 환갑을 넘긴 자영업자 추 사장 -, 들이었다. 불가사의 한 것은 사람들이 바뀌어도 내용은 언제나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골프이야기가 시들해지면 다음 화제는 자카르타 한인 사회의 소문과 가십들이다. 미모의 부인을 두어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A씨의 부인이 골프 코치와 바람이 나서 함께 어디론가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 봉제공장을 하던 B씨는 부도가 나서 야반도주 했다는 이야기, 건설업을 하는 C씨는 고생 끝에 정부 발주의 대형공사를 수주하여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 P제철이 인도네시아 진출을 결정했다는 이야기........, 자극적인 화제로 시작하여 갈수로 김이 빠진 이야기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 테이블에 빈소주병이 사람 숫자만큼 진열되면 화제는 어김없이 한국정치로 넘어간다.
이기용과 함께 출장 온 그녀가 대학 선후배의 연으로 연결되어 안내를 맡은 김정수와 함께 하루 종일 걸려서 취재활동을 마치고 그곳에 합류한 시점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좌중을 향해 가벼운 목례와 함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김정수와 함께 이미 마련된 테이블 끝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는 배가 고픈 듯 곧 식사에 열중했다.
그녀가 들어섰을 때 참석자들은 주위를 환하게 만드는 그녀의 미모에 자기도 모르게 각자 몸가짐을 고쳤지만 금방 불이 지펴진 대화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주로 현 정부를 성토하는 이야기들이 조심스럽게 오가다가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지적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한국정치를 논하는 수준은 보통 저마다 읽은 3대 일간지의 주장을 과장해서 설파하는 정도를 넘지 못했다.
권유갑이 김홍길과 증시에 개입하여 IT버블을 만들어 수백억을 챙겼다는 이야기, 박주원이 실질적인 대통령이라는 이야기, 햇볕정책은 김정일 살리기 정책이라는 이야기에서 대통령은 금융위기를 극복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사람이 아니라 한국의 알짜기업들을 외국회사에 헐값으로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이야기까지........, 대통령을 존경하는 특정지역 출신의 인사라면 대단히 듣기 거북한 수위의 도를 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좌중의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기용이었다. 오가는 말들을 듣고만 있던 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스웨덴의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바쳐서 노벨상을 받았다는 추사장의 말끝에 참지 못하고 나섰다.
“여기계신 여러분들은 주로 현 정권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군요. 그런데 그렇게 균형감을 잃은 비판들은 다음선거에서 보수 세력들이 좌파에 넘어간 정권을 되찾아오는데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그 말에 추사장이 발끈해서 반박했다.
“이국장님은 내가 사실이 아닌 말을 했다는 말이요? 그건 분명히 신문에 난 사실입니다. 국장님의 소속 방송사에서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하긴 국영방송이 정보를 입수했다한들 보도할 수나 있을까? 정부 눈치나 보는 방송보다는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할 말 제대로 하는 신문이야 말로 진정한 언론이라 할 수 있지.”
이기용은 얼굴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신문에 난 것은 한 야당의원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근거로 로비설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는 내용이고 저희 방송사도 뉴스시간에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는 그야말로 뉴스 가치가 없는 한 야당의원의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였으므로 우리는 그 가치에 맞는 만큼만 다루었는데 반해 사장님께서 읽으신 그 신문에서는 자세히 읽어보면 같은 내용이지만 독자가 그것이 확인된 사실처럼 느끼도록 문장을 작성하고 뉴스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편집자의 목적에 의해 기사 크기와 지면배치를 기획했다는 것이 차이점이지요. 요는 그런 방법이 보수 지지층인 독자들을 우민화시킴으로서 장기적으로는 보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로 듣기만 할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경우가 좀체 없는 호남 출신 M산업의 현지법인장 이한수가 모처럼 힘을 얻어 속내를 내비쳤다.
“한국 신문들 진짜로 문제가 많아요. 국민이 선택한 정분데 어느 정도는 협조를 해 줘야지 무조건 대통령만 씹어 돌리니........, 5공 시절 생각을 해야지."
이 말은 즉각적인 K건설 오상무의 반격을 불러왔다.
“그래도 신문이 있어서 비판이라도 하니 이정도 개판치고 마는 것 아니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데모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정권을 맡겼으니 쯧쯧, 앞으로 국가를 얼마나 더 거덜 낼지?........ 빨리 남은 임기가 지나가야 할 텐데.”
오상무의 말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이한수가 이기용을 바라보았으나 다음 말을 이은 사람은 삼송물산의 최 이사였다. 그는 최고 수준의 보수와 대우를 제공하는 한국 최대 그룹사의 상사 지사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수시로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앞의 두 사람 말을 무시하고 이기용을 향해 말했다.
“참 헷갈리는 군요. 저는 이국장님의 정치적 성향이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본인의 소속사에서의 위치로 미루어 현 정부의 주도세력들과 같은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진보 또는 좌파라고 불리는 - 자신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던 우리 경제계에선 그렇게 부르죠. -........ 그런데 마치 한국의 보수 세력에 대하여 같은 편을 걱정하시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이국장님은 도대체 어느 쪽 입니까?”
이기용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 분명히 밝히지만 저는 보수주의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주의라는 것을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우리나라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시장경제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북한을 한국의 커다란 변수가 되지 않도록 그냥 내버려두자는 것 정도입니다. 저는 특정정치세력의 과거문제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정치세력이 어떤 우선순위 하에 어떤 정책을 도입할 것인가 하는 점이 제가 그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기준이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이념과 정책은 제가 지향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내 권한에 대한 외부의 통제나 압력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국영방송국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현 정부 인사들과 이념이 같거나 같은 척해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것이 이 정권의 훌륭한 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저는 이미 이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쫓겨나는 것은 아니고 경영진이나 정권과의 불화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이 말에 항공사 지사장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끗발 좋은 자리를 스스로 그만두신다구요? 왜 그러셔요?”
스스로 그만두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마친 후 그는 동의를 구하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당사자의 고교동창으로서 절친한 친구인 공영호가 가소롭다는 어투로 나섰다.
“그보다 훨씬 끗발이 좋은 자리이니 가는 것이지. 어딘지나 아시오? 연봉이 얼만지나 알아? 바로 삼송그룹 비서실 상무야.”
거의 반말로 말했지만 그것을 거슬리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좌중은 잠시 술렁거리다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삼송물산의 최이사가 빠른 동작으로 술병을 가지고 이기용에게 달려왔다. 그는 무릎을 꿇듯이 하여 그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몸가짐과 태도는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김인철은 배알이 틀려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최 이사님 말대로 현 정권이 한국방송을 장악하여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 구성원들 중 5공 시절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아 주요 보직까지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연배의 사람들은 과거 정권과 정치적 성향을 같이하는 사고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지요. 이국장님도 그중의 한 사람인 모양이군요. 저는 그 사람들 중 대다수가 처음 언론사에 입사하던 젊은 시절에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가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보수적 성향으로 바뀐 것에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 작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페스팅거라는 심리학자가 말한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정부가 인사권을 가진 방송사 구성원의 성향이 그러할 진데 보다 독립적이고 이해관계가 현 정권의 정책방향에 대립하고 있으며 국민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인 종이매체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현 정부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에도 그들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어쨌든 이국장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실질적인 민주화가 진전되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현상이 우리 국민 입장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김인철은 이기용의 첫 직장이 삼송전자이고 중심일보에 3년이나 근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의 성씨가 이(李)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말하는 동안 표정이 점점 굳어지던 이기용이 그녀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인지부조화 이론’이라?......., 호오! 두 가지 다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이로군요. 저쪽에 앉아있는 우리 한 기자가 특허 내놓고 시시 때때로 써먹는 용어들인데........ 두 사람이 혹시 아는 사이? 그럴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한 기자가 또 동지를 만난 것으로군요. 그런데 한 기자는 한솥밥을 먹는 사이이니 그렇다 치고 초면인 김 사장이 나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는 이 말에 깜짝 놀라서 그녀 쪽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향해 짧게 웃어주었고 그녀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계속-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