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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하퍼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이슬람 축제 때 쓰려고 키우던 염소 중 열두 마리를 잡아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뜻밖의 횡재를 만나 즉흥적으로 흥겨운 당둣 (인도네시아 특유의 춤과 노래 양식) 축제를 벌였다. 하퍼는 그들이 격의 없이 노는 자리에 끼어서 자카르타에서는 접하기 힘든 춤과 노래를 경험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김인철과 하퍼는 사떼 ( 염소고기 꼬치구이 요리)를 안주로 하여 자카르타에서 가져온 21년산 글렌피딕 한 병을 둘이서 비우고 부족해서 맥주 20여캔을 추가로 해치웠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강 쪽을 향해 창이 난 단층짜리 본부 건물 내 자신의 방으로 하퍼를 안내하여 잠자리를 돌봐준 다음 다시 나와서는 강가에 있는 한국식 평상에 올라가서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낮에는 그래도 사람의 움직임이 분주하고 더러는 문명의 이기가 눈에 띄는 이곳에 밤이 찾아오면 기원 20,000년 전이라 해도 그랬을법한 태고의 원시상태로 돌아간다. 단지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어두운 명암의 차이가 하늘과 땅과 숲과 강의 경계를 나눈다. 그중에서 가장 밝은 색은 이곳의 교통수단인 스피드보트가 수없이 지나다니며 일으킨 물보라의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소리도 없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강이고, 그중에서 가장 어두운 색은 달이 있건 없건 단연 하늘이다. 맑은 날 밤하늘의 어두운 색이 다른 무엇에 비유할 수 없도록 아름다운 검은색인 줄을 그는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하늘에 그렇게 많은 별이 있는 줄도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누운 채로 온갖 욕심과 잡념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청정한 밤의 우주에 푹 담가서 씻어내는 시간은 이곳에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하산의 아들인 구나완과 부모가 없는 늙은 주방식모 술리스의 손녀 와띠가 나와서 그와의 사이에 간격을 두고 누웠다. 그가 모른 체하자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며 자기들 끼리 이야기를 한다.
“저기 내 손을 따라 똑바로 가면 밝은 별 다섯 개가 보이지, 구나완? 그 중 두 개는 딱 붙어있고, 그게 바로 ‘뿌뜨리껌바르’ 별자리다. 아저씨는 저 별들이 전갈자리의 전갈 머리 부분이라고 하셨는데 술리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래. 저 아름다운 별을 보고 어떻게 전갈 대가리라고 할 수가 있냐고........, 할머니 말이 맞는 거 같아. 왜냐하면 할머니는 별에 얽힌 전설도 말해주셨거든. 나는 그중에 가장 작고 아래쪽에 있는 별을 내 별로 정했어. 구나완 너도 별 하나를 가지려거든 그건 내거니까 빼놓고 딴 걸로 가져야한다.”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소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가 끼어들었다.
“그래? 와띠야, 네 별로 정한 건 전갈의 눈인데?”
그가 기대한대로 와띠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아니어요. 그건 쌍둥이 공주중에서 동생이어요. 나는 그 이야기도 다 알아요. 아주 불쌍한 별이어요.”
“와띠 누나, 그이야기 지금 해주라.”
“그럴까? 저 별은 옛날 스리위자야 왕국의 쌍둥이공주였어........”
와띠는 동생뻘인 주인집아들 구나완이 재미있어하자 신이 나서는 별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기 사람들은 어른이고 아이이고 간에 무척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이야기를 잘한다.
시원한 강바람이 모깃불의 연기를 딱 구수하게 느껴질 정도만 실어왔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 일게다. 그가 와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핏 잠이 들었는데 하산이 와서 깨웠다. 자카르타 본사의 당직인 수기얀또가 SSB(무전기)에서 그를 찾는데 매우 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전실로 가서 수기얀또와 통화한 결과 한국의 문정인이 그를 급하게 찾고 있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산을 불러서 사놓고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위성 전화기를 조작하도록 시켰다. 미덥지 않은 전화기와 40여분 동안이나 씨름한 끝에 겨우 문정인과의 짧은 통화에 성공했는데 감이 좋지 않아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빨리 한국으로 와달라는 내용임을 알 수는 있었고 탄핵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귀에 들어왔다. 그의 말은 애원조였다.
그는 거실로 와서 본부 건물의 뒤에 서있던 나무의 절반을 잘라내고 설치한 직경 3m 크기의 위성 수신 안테나에 연결된 TV를 켰다. 거기서 잡히는 유일한 한국채널인 아리랑티브이에서는 퀴즈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CNN으로 채널을 돌렸다. 때마침 TV 화면에 나타난 영상은 그의 동공을 확대시키기에 충분했다.
화면에는 흥분한 어조의 앵커 목소리 뒤로 아수라장이 된 한국의 국회 본회의장에서 유국민 의원이 울부짖으며 뒹구는 장면이 반복해서 보이더니 곧이어 어깨가 축 늘어진 한국의 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청와대 뜰을 거니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CNN방송은 200X년 3월 12일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 농성 중이던 참민당 의원들을 밀어내고 강행시킨 국회표결에서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고 전해주고 있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표결로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고 이제 대통령은 권한정지 상태에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재판관 9명중 6명이 찬성하면 완전히 해임되는 것이다.
김인철은 이곳에 며칠 머물 예정이었던 애초의 계획을 취소하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 하퍼와 함께 길을 나섰다. 하루걸러 센 바람을 또 맞는 것이 여정중인 하퍼에게 무리가 갈까 염려되기도 했고 그의 기분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여서 그들은 육로를 선택했다. 그는 차창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들판에 공허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은근히 연락을 기다렸다. 회사일도 조금씩 자신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체제로 만들면서 나름 준비를 하였다. 그 이후로도 한국의 정치상황은 점점 더 대통령을 어려운 처지로 내몰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는 대통령이 그가 피력한 의견이 당신의 철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를 불안정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 과격한 이야기들을 뱉어 놓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후회는 아니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일을 제대로 하자면 대통령 앞에서도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신임은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나자 그는 그쪽 일을 다 잊고 다시 자신의 일에 빠져들었는데 어젯밤 뜻하지 않은 부름을 받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미스터 김?”
침묵을 깨고 하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의 현재 대통령을 아십니까?”
“알고말고! 잘 알지. 웬만한 유럽의 지식인들도 전임 대통령은 잘 알지만 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분에 대해서 잘 알아요. 삼촌이 정치인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사업을 하는 나는 아시아 정치에 관심이 많지요. 참 내 삼촌은 독일 사회당 의원이며 미켈 내각의 외상인 슈나이더란 사람이요.”
“아 그렇습니까?”
그가 맞장구를 치자 그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말 끊지 마시오. 전임대통령도 그렇지만 그 사람 참 훌륭한 분입니다. 게다가 젊기까지 하고......., 아시아에서 이런 경력의 소유자가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다는 사실은 참 경이로운 일이지요. 이 사람을 계기로 한국은 차원이 다른 나라로 변할 것으로 나는 봅니다. 한국은 장차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거요. 거기다가 독일처럼 통일까지 된다면..........? 일본 같은 나라는 한국의 경쟁 상대도 못 될 거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당신 삼촌이요? 허허허”
“그 대통령이 어제 국회에서 탄핵을 당해 현재 직무정지 중입니다.”
“탄핵?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닉슨처럼 도청이라도 하였소? 아니 참 한국 같은 나라에서 도청 같은 것이 무슨 잘못 축에 들기나 하겠어? 북한 김정일에게 국가기밀이라도 넘겼나? 아니 그만한 사유라도 부족하지, 거 군 출신 전모라고 있지요 전임 중에서, 그자는 국민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정권이 바뀌어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지요? 그런 나라가 한국인데 절대 권력을 가진 현역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다니 그 사유가 뭔지 참말로 궁금하군.”
“복잡한 사정을 다 말씀드리기 곤란하고 제가 최선을 다해 말씀드려도 기이한 한국의 정치구조를 이해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탄핵의 사유로 적시된 잘못은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만한 정치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국민들에게 집권당 후보들을 많이 당선시켜줘야 대통령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금하도록 되어있는 법을 어겼다는 것이지요.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당 의원 수가 전체 250명 중에서 30명도 안 되는 사정을 이해할 수도 없겠지요.”
“당신 나라 사정을 잘 모를 테니 대화상대가 안 된다 그 말이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집권당이 쪼개져서 대통령이 속한 당의 의석수가 제 3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그 당이 쪼개진 이유까지도 압니다. 내가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마 당신 나라의 왜곡된 언론을 통해서 보고 듣는 당신네 나라 보통국민들 보다는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소? 그런데 구미에서 산업자본의 대변지로 평가되는 한국의 메이저 언론들은 왜 그렇게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거요? 거기에 비해 진보적인 언론들은 너무나 점유율이 미미하고......”
“그런 상황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의 불운한 역사에서 잉태되어 독립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독재정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내가 아는 바로는 오랫동안 독재자의 통치를 받다가 민주화가 급격히 이루어진 나라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독재자에 의해서 독과점상태로 관리되던 언론이 그대로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미스터 김이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서 가는 것이 어제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요?”
“예, 제가 가서 대통령을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오, 그래요? 알고 보니 당신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군. 하던 사업을 팽개치고 조국의 대통령을 도우러 간다? 최소한 장관급이군. 그런 사람과 이렇게 같이 있다니 영광인걸. 그렇지만 당신 개인적으론 이렇게 멋진 생활을 포기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어느 나라나 다 그렇겠지 뭐- 정치판으로 간다니 축하할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소.”
“지금 대통령은 업무정지 상태라 인사권도 없어요. 있어도 그렇고......, 저는 그저 음지에서 어드바이스나 할 것입니다.”
“당신은 훌륭하게 해낼 거요. 혹시 독일 쪽에 정치적인 일이 있다면 슈나이더 외상은 당신의 사람으로 생각하시오. 이말 내가 책임지겠소.”
“고맙습니다. 허나 그보다 제가 없더라도 저희회사 제품을 변함없이 구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야 가격과 품질만 맞는다면야 여부가 있겠소? 반대로 둘 중에 하나라도 빗나가면 방법이 없는 거 아니겠소?”
“제가 있으나 없으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그것도 경영능력인데 나는 당신이 그럴만한 능력이 된다고 믿어요.”
두 사람은 이야기에 빠져서 자동차가 포장길이 끊어져서 노면이 고르지 않은 길을 덜컹거리며 힘겹게 달려 지나온 줄도,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진 갈대숲을 지나온 줄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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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