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입자의 정체-
종로 경찰서 강력계 수사반장 천도수가 지문감식 전문가인 김형사를 데리고 가서 윤미숙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침입자들이 금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고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도 없었으므로 그는 현장을 대충 훑어만 보고도 도청기술자들이 다녀간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는 단추 크기의 도청장치를 붙일만한 곳을 세밀히 살폈다. 40분 정도 이곳저곳을 살펴본 후에 테이블 밑과 침대머리 뒤쪽의 일부 부위에 먼지를 닦아낸 흔적을 발견했다. 그곳에 접착제를 사용하는 도청장치를 붙였다가 제거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김형사에겐 지문채취는 할 필요가 없으니 관리실에 가서 엘리베이터와 현관 그리고 그 동으로 통하는 길목의 CCTV 기록영상 3일치를 복사해 오라고 시켰다. 그의 추리에 의하면 침입자들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송현주를 만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철수한 것이었다. 송현주로 부터 전해들은 정황을 종합하면 그들은 깔끔하게 일하는 프로였다. 전과자 나부랭이는 절대로 아닐 것이었고 지문 같은 것도 남겼을 리가 없었다. CCTV로 아무 단서도 알아내지 못할 확률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지 않을 확률보다 높았다.
일을 끝내고 물러나오려 하는 그를 극구 붙들어 앉힌 윤미숙이 차를 내왔다. 그녀는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 자신도 소파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뭐 좀 알아내셨나요? 근데 누가 우리 집을 염탐했을까요?”
오십 줄에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잔영이 어려 있었지만 고운 자태는 여전했다. 천도수가 송강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 년 전 혈기왕성한 강력계 형사로서 당시 대통령이 천명한 조폭과의 전쟁에 참여하면서였다. 그때 그가 참여한 검경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된 검사 중 하나가 송강식이었다. 거기서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그들의 관계는 아주 돈독한 사이로 발전하였다. 동년배인 송강식은 검사와 형사라는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간미 있게 대해주었고 누구보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었다. 합수부 해체 이후로도 송강식은 그가 맡은 크고 작은 사건들에 천도수를 끌어들였고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가 송강식의 손발처럼 행동하기에 이른 것은 둘 사이가 절친한 검사와 형사 사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총장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일곱 살 때 길을 잃어 이틀 동안 행방불명된 적이 있는 현주를 찾아준 일로 해서 윤미숙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도 몇 가지 사소한 도움을 주느라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처지가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언제나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은 가련한 여인이었다.
“아직 알아낸 건 별로 없습니다만 제가 꼭 잡겠습니다. 따님에게 해코지를 안 한 것으로 보아 거친 놈들은 아니고........ 절대로 다시 올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모든 일이 걱정거리인 이 여인이 한 가지 걱정을 더 가지고 살게 될 것이 우려되어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엿보는 게 목적이라면 혹시 총장님을 시기하는.........? 내가 진즉 죽었어야 해. 그렇게 조심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최근에 총장님께서 다녀가신 적이 있나요?”
“예, 한 2주 전에.”
“그렇군요. 미행을 당하신 듯합니다.”
“세상에, 그 밤중에?”
“그게 누가되었건 다행히 우리가 알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은 얼씬도 못할 것이니 따님만 잘 단속하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현주 단속이라니요?”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 총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따님과의 관계라면........”
“아! 딸아이가 어디 가서 총장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말이죠?”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폐가 많군요.”
그만한 미모에 조신한 행동거지, 검찰총장의 아내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무엇이 부족해서 저런 여인을 버린 것인지 그는 송강식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여인을 버리지 않았다면 검찰총장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검찰총장이 안 되면 어떤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평생 가슴앓이를 시키면서까지 얻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병원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나자 그는 윤미숙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여겨졌다.
‘자신의 아내를 훨씬 불쌍한 여자로 만들어놓은 장본인이 딴 여자 걱정이라니.........’
학교를 마친 후 그는 평생을 형사로 살아왔다. 월급은 적었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했고 보람을 느꼈다. 알뜰한 그의 아내는 그가 가져다주는 적은 봉급으로 가정을 잘 꾸려나갔으므로 그는 한 번도 부정한 돈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축을 할 여유는 없었다. 막내딸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부터는 두 딸의 사교육비로 그의 월급의 절반이 나가야했지만 그래도 그는 돈 걱정을 해보지는 않았다. 돈의 의미 자체를 몰랐었다. 보증을 섰던 동생의 사업이 망해서 분양 받은 부천의 작은 아파트를 날리고 2억 가까이 되는 빚까지 떠안는 처지가 되기 전 까지는. 아니 빚에 짓눌려 지내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 정년까지 아이들이 제 밥벌이 할 수 있도록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정년 후에도 연금이 있으니 구멍가게라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비록 그때부터 종종 송강식으로 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마음의 거리낌을 느낄 만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아내가 자궁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게 되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집안을 꾸려가던 든든한 아내였다. 그는 공황 상태에 빠졌는데 그 원인은 아내가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불행을 당했을 때 수중에 돈이 없어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고 병에 걸리면 병 자체가 불행한 것이지 돈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보험에 들어있어서 당장 치료를 할 비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가 장기화 될 수도 있고 돈 때문에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람은 불행을 당하더라도 돈이 있으면 그 불행을 우아하게 감당해 낼 수 있으나 돈이 없으면 몇 곱으로 비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병을 얻은 후로는 결혼을 전제로 남자와 사귀고 있는 큰딸을 대하기가 두렵다. 그 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여간 조마조마하지가 않다.
그가 김형사가 수거해온 CCTV영상자료를 비공식으로 비디오분석실에 의뢰한 다음 사무실로 돌아와서 조금 앉아 있을 때 송강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찌 되었소?”
“예상대로 도청장치를 설치하려고 했던가봅니다. 우리가 수색할 줄 알고 포기한 것이지요. CCTV등의 자료를 더 분석해 보겠지만 그놈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 기관일까?”
“그렇더라도 침입자들은 용역회사 일겁니다.”
“용역회사?”
“A급 심부름센터 말입니다. 요즘은 똑똑한 애들이 하기 때문에 장비도 좋고 일도 아주 깔끔하게 합니다. 저희도 그런 일은 외주를 줍니다. 그들이 남긴 흔적을 가지고는 불가능 할 것이고 저희가 가지고 있는 A급 업체 리스트를 가지고 거꾸로 탐문해 보겠습니다. 크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수고 좀 해 주시오.”
총장의 말은 부하직원에 대한 업무적인 명령처럼 들렸다.
천도수는 탁자위에 놓여있던 미국산 빨간색 담배 갑을 왼손으로 집어서 뒤집은 다음 검지로 갑의 바닥을 톡톡 쳤다. 담배 한가치의 똥색 필터가 입구 쪽으로 약간 비어져 나오자 그는 담배 갑을 김억수에게 내밀었다.
“끊었어요.”
김억수는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송구스럽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었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후줄근한 잠바차림, 그리고 눈가의 잔주름에 복잡한 표정을 담은 채 서성이는 천도수와 말쑥한 차림새에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앉아있는 김억수의 모습으로는 어느 쪽이 형사이고 어느 쪽이 용의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천도수는 김억수에게 건네고자 했던 담배를 꺼내어 자신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상대를 앞에 두고 생각할 여유를 확보하는 데는 담배가 꽤나 유용하다.
그는 서울 최고의 용역업체 18곳의 책임자를 하나씩 불러들여 면담한 결과 윤미숙의 아파트에 침입한 자들이 김억수네 팀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천도수가 예상한대로 김억수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으며 대비를 철저히 한 듯 그의 유도심문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는 취조실 의자가 자기 집 거실의 소파라도 되는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김억수 앞을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태울 동안 왔다 갔다 하다가 멈추어서며 말했다.
“너도 이런 일 하고 있으니 법에 대해선 알만큼 알 테고 너희들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야. 그냥 일 시킨 사람들이 누군지만 말해봐.”
김억수는 준비된 문답 중의 하나라는 듯 쉽게 대답했다.
“증거가 없잖아요? 제 지문이라도 나왔나요? 만일 우리가 했다하더라도 감옥을 갈지언정 고객의 정보를 드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우리 밥줄이 끊어지는데.........., 그런데 문제는 알려드리고 싶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고객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절대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아요. 경찰보다 높은 레벨의 국가기관인 경우도 많지요. 잘 아실 텐데.”
김억수는 총장과 윤미숙의 관계도 알고 있고 약점이 있는 이쪽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마음속에 준비한 최대치만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살인사건 수사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동료에게 하듯 목소리에 힘을 빼고 물었다.
“연락하는 방법은?”
김억수는 뻔한 질문을 듣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고객들은 저쪽에서만 연락해오죠. 그런데 통화가 필요하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연락이 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아주 달달 볶아서 못 견디게 할 수도 있다는 거 알지? 그러니 쉽게 끝내자고. 네 생각에 더러 일거리를 주는 데가 어딘 거 같아?”
“글쎄요. 그런 A급 고객은 국가기관인 경우가 종종 있지요...........”
천도수는 더 이상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억수가 국가기관 중의 하나라는 언질을 주는 것이었고, 그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한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자. 영장 신청하기 귀찮아서 그러니 네 전화 통화내역 좀 조회하자.”
김억수는 순순히 동의했다.
"네, 그러죠."
검찰 총장과 연결된 종로 경찰서의 형사반장이라면 시간상의 문제일 뿐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통신사에 전화를 한 다음 경찰서내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본인의 통화내역을 뽑아서 천도수에게 넘겨주었다.
천도수는 그가 뽑아준 통화내역서를 훑어본 다음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 쓰여 있는 곳에 형광펜으로 표시한 다음 김억수를 향해 물었다.
"발신번호가 표시되지 않는 통화들이 그쪽에서 걸려온 것들인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통화 시간대를 보니 그러네요."
김억수는 천도수를 마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도수의 표정 없는 눈과 마주치자 속으로 움찔했다. 그의 눈은 상대방을 사로잡는 힘을 가진듯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고맙네. 이만 가보게. 이 건으로 자네를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걸세."
천도수는 김억수의 남자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은 나머지 형사반장의 신분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자상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소문대로 쿨 하시네요."
김억수는 일찍이 경찰에게 해본 적이 없는 진심을 담은 찬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김억수를 보내고 나서 통신사로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던 천도수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전화로는 통신사직원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리 없었다. 시계를 보니 네 시 이십분, 서둘러 가면 직원들 퇴근 시간 전에 통신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직원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그가 원하는 유의 정보를 얻기에는 퇴근시간 직전만큼 좋은 시간대는 없다. 그가 걸어서 광화문에 있는 통신사 본사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하게 10분전 다섯 시였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에게 신분을 밝힌 후에 용건을 말하자 그녀는 재빨리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가 응접실의 의자에 앉고 나서 채 오 분도 안 되어 안경을 낀, 조금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담당직원이 나타났다.
그가 김억수의 통화내역서를 보여주며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표기된 발신처의 신원을 알려달라고 하자 그 직원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영장을 가져오셨나요?”
그는 직원이 빨리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거친 말투로 말했다.
“그랬으면 이렇게 얌전하게 부탁하겠소? 헤집어 놓지. 시간이 없어서요.”
직원은 너무 쉽게 내주지는 말아야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만들었지만 이미 어느 선까지 말해줘야 하는지를 마음속으로 가늠하고 있음을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영장도 안가지고 오셨는데 제가 발신처를 알려드리면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되는 거 아시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만 질문을 하겠소. 이곳의 발신지가 국정원인가?”
그는 직원의 불안감이 사라지도록 단정적으로 말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직원은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 분 정도 걸려서 자기 자리에 다녀온 다음 대답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고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번호는 실명으로 개설된 휴대전화인데 수취인 불명으로 우편물이 반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금은 정확히 입금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몇 년에 한번 씩 이런 번호를 정리하는데 알고 보면 개설 당시 이미 사망했거나 실종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소유주를 추정할 수 있소? 범죄단체나 뭐 그런데 일 수도 있지 않소.”
그는 결론에 앞서 마지막 확인사살을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했고 직원은 그에 부응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단지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충분한 근거 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의 단정적인 말은 천도수가 이 사건의 주인공이 국정원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일말의 주저를 없애 주었다.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