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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주 확정 -
그로부터 며칠 후 김인철이 서석준에게 부탁한 자료가 일본에서 도착했다. 유리꼬의 신상에 관한 것으로 국정원 동경지부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두툼한 봉투 속에는 사진들과 12쪽짜리 보고서가 들어있었는데 그 보고서에는 그녀에 관한 모든 것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방년 33세인 그녀의 본명은 후미꼬 요시나라, 나고야현 출신으로 고교 재학 중 자위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94년 동경외대 인도네시아어 과를 졸업하고 자위대에 장교로 입대한다.
자위대에서 정보요원 양성 교육을 마치고 정보사령부에서 2년을 근무한 뒤 인도네시아 국립대에 스파이 임무를 띤 위탁 교육생으로 파견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국 CIA 요원에게 자위대 기밀을 판매한 혐의로 강제 귀국 후 불명예제대를 당한다.
현재는 도쿄 긴자의 한 요정에 적을 두고 프리랜서 산업스파이로 일하고 있는데 두뇌, 경험, 미모, 외국어실력 등 스파이 활동에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춘 데다가 목적을 위해서 섹스를 수단으로 사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특 A급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고용하려는 업체들이 줄을 서있다.
다이세이의 입찰서는 세 군데에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공법의 문제였다.
그들이 제시한 공법과 단가 계산 방법이 일치하지 않았다. 시간에 쫓긴 그들은 자신들의 공법에 태산건설의 단가 계산 방법을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었다. 언뜻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 발주처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황태산의 눈에는 금방 드러났다. 입찰서 제출 시 함께 왔었다는 한국 업체의 자료는 어떤 이유에선지 반영되지 않은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물가인상에 따라 단가를 변동시킬 수 있는 에스컬레이션 조항이었다.
에스컬레이션조항은 공기가 긴 건설공사에서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것이었지만 그 변동 폭에 제한을 두어야하는데 무제한의 변동 폭을 적용한다는 구절이 눈에 잘 띄지 않게 삽입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단가 미확정 자재와 용역의 수량이 터무니없이 많았다.
입찰 시에 가격을 알 수 없는 신소재나 신공법의 용역에 대해서 단가를 미확정으로 내버려 둔 채 추정단가로 일단 계약하고 추후에 확정하는 제도로서 보통 공사비의 5%이내에서 허용되는 것인데 다이세이의 입찰서에는 그 비율이 20%에 달했다.
그들은 ‘다이세이 입찰서의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위에 언급된 문제들 뿐 아니라 다이세이가 하루 늦게 입찰서를 제출하면서 태산건설의 입찰서 내용을 도용한 증거도 적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업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단가로 공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에르윈이 미인계에 빠져서 다이세이측과 밀착한 증거가 되는 사진들을 파일로 정리했다.
자료정리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밤방과 만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김인철에게 에르윈이 다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미스터 김!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비만또로 사무실로 좀 오시겠습니까?”
성 앞에 미스터를 붙여서 부르는 호칭은 한국 사람이 듣기에는 불손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인도네시아 사람이 외국인을 부를 때 쓰는 최고의 존칭이다.
김인철은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안되겠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 사무실로 오시오.”
에르윈은 전화를 끊은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달려왔다. 김인철은 황 태산과 함께 그를 자신의 집무실에서 맞았다.
에르윈은 정신이 나간 표정이었지만 아직 당당한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항의조로 말했다.
“내 뒷조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몰라서 묻습니까? 당신이 사귀는 여자의 정체가 뭔지나 알고 있습니까?”
김인철은 그의 앞에 유리꼬에 대한 보고서와 사진들을 내려놓았다. 그것들을 빠르게 읽어본 에르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음, 이럴 수가?”
“우리는 당신이 야마모토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소.”
“돈 받은 것도.........?”
에르윈은 아차 싶었다.
“얼마나 받았소?”
“..........어쩌실 생각입니까? 밤방 삼촌에게 다 말씀하실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사형수의 그것처럼 변해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니요. 우리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놀러온 줄 아시오?”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겠소? 그 뿐이 아니요. 나는 밤방과 나의 관계를 단순히 발주업체와 시공업체의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요. 그 분은 내 친구요. 나는 내 친구를 망치려했던 당신이 계속 그의 옆에 머물면서 그를 속이도록 모른 체 할 수는 없소.”
“제발 살려주십시오.”
“당신이 먼저 당신 삼촌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 기회를 주겠소. 오늘 당장 하시기 바라오.”
“내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삼촌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못 도와줄 것도 없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유리꼬에 관련된 일은 비밀로.......”
“당신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군그래. 이 일의 한 부분이라도 감추고는 용서를 구할 수도 해결을 할 수도 없는 거요. 당신이 하느냐 내가 하느냐만 결정하면 되는 거요.”
“저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삼촌 성격은 내가 잘 알아요. 차라리 이대로 도망가는 게 낫지.”
“그렇게 겁내면서 왜 그런 짓을 했어? 자네가 고백할 때 맞춰서 내가 삼촌의 집으로 가겠네. 자네 목숨은 내가 보장하지.”
김인철의 말투는 아랫사람에게 하는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다이세이는 어쩌고요?”
“삼촌에게 다 털어놓는 마당에 다이세이가 무슨 걱정이야. 자네는 그들에게 속은 거야. 유리꼬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가격에 공사를 할 수가 없어. 입찰서에 많은 속임수가 있어. 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추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제가 받은 돈은요?”
“걱정 말아. 내가 줄 수도 있지만 삼촌이 갚아주실 거야.”
“오늘 몇 시에 오실 겁니까?”
“준비되면 전화하게.”
그날 밤에 김인철은 황태산과 김정수를 동반하고 밤방의 저택으로 갔다.
“어서 오시오. 미스터 김, 당신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소. 그럴 리는 전혀 없지만 내가 다이세이에 입찰서를 하루 늦게 제출하도록 용인해 준 것이 태산건설이 입찰에서 밀린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불편해서 전화도 못했는데 잘 왔소.”
“바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밤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인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윈이 밤방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삼촌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냐?”
에르윈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유리꼬를 만난 일부터 야마모토에게 돈을 받은 일, 그리고 태산건설의 입찰서 내용 중 일부를 밤에 다이세이에 전달한 사실을 실토했다. 그러나 태산건설 직원들을 습격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아연실색한 밤방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Kurang Ajar! (못된 놈!)”
밤방은 일어나서 장식대에 올려져있는 끄리스(Kris)-인도네시아 고대 무기로서 날이 꼬불꼬불한 칼이다. 전통 있는 가문에서는 보통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한두 개씩의 끄리스를 가지고 있다.-를 집었다. 그리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서 에르윈에게 내밀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이것으로 당장 네 자신의 악을 죽여라.”
'자신의 악을 죽이다 (membunuh kejahatan sendiri)'라는 표현은 물론 옛날에는 전통 있는 가문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것을 의미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가문의 파문을 당하는 의식을 뜻하는데 그 사람과 그의 죄를 함께 죽인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끄리스로 죄를 지은 사람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무섭기가 죽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가문에서 죽은 자로 취급되어 추방되고 친척들을 만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사색이 되어서 김인철 쪽을 바라보았다.
“진정하십시오. 에르윈이 뉘우치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김인철이 밤방에게 말했다.
“안되오. 이놈을 용서할 수 없소.”
밤방은 아직도 끄리스를 손에 든 채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바로 그때 기도소리가 실내에 메아리쳤다. 어느 틈엔지 하얀 도포로 갈아입고 머리에 이슬람 성직자용 두건을 두른 황태산이 거실의 한 귀퉁이에서 메카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이슬람 의식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알라는 위대하도다.’로 시작된 멋들어진 목소리의 기도는 한참 동안이나 집안에 메아리쳤다. 코란 구절 중 모하메드가 죽기 전에 행한 마지막 연설의 일부 중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모두에게 한 형제이므로 형제애로써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읊어졌으나 기도의 내용을 알아듣는 사람은 황태산과 밤방 두 사람뿐이었다.
밤방은 끄리스를 놓고 경건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려서는 황태산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그는 선지자 모하메드가 헤지라의 대업을 이룬 메디나에서 죽기 전 대중에게 행한 마지막 연설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 속 분노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자비의 감정이 들어찼다.
황태산은 기도를 끝내고도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밤방은 황태산을 그대로 둔 채 에르윈을 불러서 앉혔다.
“내가 저 훌륭한 분의 가르침으로 새삼 깨달은 바가 있으니 네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나중에 찾아보도록 하자. 지금은 우선 미스터 김에게 함께 용서를 빌자. 미스터 김 우리를 용서해주기 바라오.”
밤방은 이 말과 함께 김인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르윈은 무릎을 꿇은 채로 방향을 김인철 쪽으로 돌렸다. 김인철은 얼른 밤방을 일으켜서 의자에 앉게 하고 말했다.
“한번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습니다. 에르윈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으니 저로서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하시고 대책을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놈은 제가 알아서하겠습니다만 다이세이 건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이세이의 입찰서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속임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입찰서를 사전에 빼내어 가격을 우리와 비슷하게 적어내긴 했지만 그들은 그 가격에 절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속임수를 입찰서에 담아놓은 것입니다. 가격이란 바로 한 나라와 회사의 경쟁력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은 하라고 해도 안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회사와의 지금까지 인연을 생각하여 스스로 물러갈 기회를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들이 저지른 짓으로는 감옥에 보낼 수도 있지만 내 조카 놈도 잘못이 있으니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좋겠군요.”
이 말을 마친 다음 그는 황태산에게로 가서 그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일을 책임지게 되다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소. 알라가 우리를 돌봐주실 거요.”
존경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그들이 거의 날마다의 양자 간 미팅을 통해서 계약조건을 확정하고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하기 까지는 꼬박 42일이 더 걸렸다. 김인철은 태산건설의 인도네시아 현지법인과, 자카르타 지사를 설립한 후 황태산과 다른 직원들을 그곳에 남기고 김 정수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귀국하기 전날 리비를 통해서 한 가지 비보가 전해졌다. 야마모토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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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