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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인계 -
2개월 전,
주말이면 항상 그러하듯, 자정이 넘었는데도 자카르타 중심가 수디르만 로는 차들로 가득 차 있어서 그의 차는 거북이걸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귀가하는 자신이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차선을 바꾸어가면서 조금 빨리 가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수동적으로 앞차의 움직임을 따라 운전했다. 아내에게 핀잔을 들을 것이 싫어서 일찍 자리를 뜨긴 했지만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함께 어울리던, 저마다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자들에게서 풍기던 체취의 여운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군 장성으로 둔 친구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보통은 그런 자리에 아내와 함께 가는데 오늘은 혼자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아이를 가진 아내의 배가 상당히 불러진 때문이었다.
아내와 함께 다닐 때는 몰랐었는데, 혼자 와서 참석자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의외로 혼자서 참석한 여자들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온 여자들은 그 자신처럼 사정 때문에 짝을 두고 온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혼이나 다른 사유로 독신인 사람들이었고, 평균적으로 짝이 있는 여자들보다는 더 미모에 세련되어 보였다. 그 중에는 현역 가수나 영화배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모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바람기를 충족시키기에는 처의 가문이 너무 높은 벽이었다. 파티 중에 혼자 있는 그에게 유혹의 눈빛을 보내던 여자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고 나면 예외 없이 눈빛을 도로 거두어갔다.
그의 아내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처녀 때 성장을 한 그녀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던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때 그가 취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자로서의 행동은 연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순전히 연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의 결혼이 그의 가문, 가문이랄 것도 없는 그의 집안으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었고 그의 친구와 모든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결혼을 칭송했지만 막상 그 자신은 결혼이후 마음 한구석의 공허감을 애써 부인하면서 살아야만했다.
아내의 가문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가문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돈에 있어서도 먹고살기에는 풍족했지만 늘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려야 했다. 결혼하기 전 보다 훨씬 더 자신이 별 볼일 없는 놈으로 여겨졌다. 오늘 밤에 보았듯 세상에 무수히 널려있을 아름다운 여자들을 외면하고 한 평생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왔다.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 때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서 그는 약간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동시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약간 뒤로 젖혀질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가벼운 추돌이니 차의 범퍼가 찌그러진 정도는 아닐 것이었지만 그는 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그의 차 뒤에는 일제 렉서스 SUV가 서있었고 그 안에 탄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유난히 하얗고 단아한 얼굴의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차안에 겁먹은 표정으로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인도네시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 정도 고급차를 탄 저 정도 미모의 여자가 인도네시아인 이라면 저렇게 떨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영어로 말을 걸었다.
"Are you OK? Can you drive?"
여자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신호가 바뀌자 뒤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짧게
"Follow me!"
라고 말한 다음 그의 차를 다시 타고는 차량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길옆의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웠다. 그녀의 차도 따라와서는 그의 차 뒤에 정차했다.
그는 다시 차에서 내려 그녀의 차로 다가갔다. 그녀도 완연히 평정을 회복한 모양으로 차에서 내렸다. 바띡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피부가 유난히 희고 몸매가 가녀린 극동아시아 미인의 자태를 불빛 사이로 드러내자 그는 숨이 멎어버릴 뻔 했다.
그녀는 그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I am sorry."
당연한 말이지만 신선하게 느껴졌다. 인도네시아의 상류층 여자라면 분명히 오히려 화를 내거나 얼버무리려 할 상황이었다. 그는 괜찮으니 그냥 가라는 말이 입 밖까지 나오려했으나 그 대신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대로 헤어지기가 너무나 아쉬워서였다.
“저 앞 하이야트 호텔로 가시죠. 자동차는 호텔 정문에서 발레 파킹을 부탁하세요. 저는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해야 될 것 같군요.”
얼굴에 부당하다는 표정이 살짝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는 필경 그녀가 따라오지 않고 가버릴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기대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가 호텔 로비에 눈을 감고 서 있을 때 그녀가 와서 그의 팔을 툭 치면서 웃었다.
“졸리세요?”
커피숍에 앉아서 그들은 자동차에 관한 대화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 간의 대화는 페이스북 채팅을 통해 오래 알아왔던 사이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외국인이시죠?”
그가 영어로 물었는데 여자는 뜻밖에도 인도네시아 말로 대답했다.
“예, 저는 일본사람입니다. 유리꼬라고 해요. 자카르타에 온 지는 일주일이 되었고 건너편에 있는 만다린 호텔에 투숙하고 있어요. 7살 때부터 19살이 될 때까지 12년을 여기서 살았어요. 아빠가 미쓰이 상사 주재원으로 이곳에서 12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이지요. 아빠와 제가 자카르타를 떠난 이유는 엄마가 이곳에서 뎅기열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탓으로 아빠는 인도네시아를 무척 싫어하셨지만 저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곳을 잊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시절을 여기서 보낸 탓인지 저는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살던 집, 집에서 일하던 현지인 언니며, 앞니가 빠진 운전기사아저씨........ 이곳의 모든 것이 그리웠어요. 그래서 다시 온 거예요.”
물어볼 사이도 없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가 좀 더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질문했다.
“혼자서 오셨나요? 아 참 제 이름은 에르윈입니다.”
“예, 혼자 왔어요. 제가 올 수 있었던 것은 몇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어요. 그 전에도 몇 번 오려고 했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셔서 ......... ”
“아버지와 같이 사셨던 모양이죠? 결혼은..........?”
“예, 오년 전엔가 결혼 했었어요. 일본 남자와, 그런데 2년을 못 채우고 이혼 했어요. 저는 일본 사람들의 관습이 맞지 않아요. 다행히 아이는 생기지 않았어요. 이혼한 다음엔 아빠와 살았지요.”
“이곳에 아는 사람은 있나요?”
“건설회사에 다니는 아버지 친구 한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찾아보면 여기 살 때 알았던 일본인들하고 연락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아직 일본사람들 하고 만나기는 싫어요.”
“언제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신가요?”
“아직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주 안 돌아갈지도 몰라요. 일본에 안돌아 갈 것에 대비해 가산을 모두 정리했어요. 안 돌아간다고 해서 나를 기다릴 사람도 없어요.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이 말에 그는 목구멍에서 손이 올라오듯 욕심이 일었다.
“당신처럼 영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에 능통한 미인이라면 어렵지 않을 거요. 제 회사에 와서 일해도 될 것이고..........”
“오,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는 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첫눈에 저는 선생님이 기업가인줄 짐작했지요.”
처음 만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점으로 미루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의 신상에 관한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묻지 않아서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직 대통령의 손녀를 아내로 두었으며 다섯 살 난 사내아이와 곧 태어날 딸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지금은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가 이젠 가야겠다고 생각하자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집의 광경이 떠올랐다. 세 명의 가정부와 두 명의 유모가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밤잠이 없는 아내에게 시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 가봐야 되겠습니다. 내일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참, 댁에 가셔야 되는군요. 저는 기다리는 가족이 없어서 생각을 못했네요."
첫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일주일 동안에 네 번을 만나고 나서 그들은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되었다. 네 번째 만난 날 헤어질 무렵 유리꼬가 말했다.
"저 발리에 며칠 동안 다녀올 생각인데 같이 가실 수 없겠어요? 발리는 저에게 있어서 어머니와의 추억이 많은 곳이어요. 이런 부탁 실례인줄 알지만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인도네시아 문화로는 여자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천해보이지 않았다.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튼 넝쿨째 굴러오는 호박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대답부터 지르고 나서 방법을 만들자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 발리요? 그거 잘 되었습니다. 마침 나도 그곳에 볼일이 좀 있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내일 당장은 안 되고 이삼일 정리가 필요합니다. 괜찮겠죠?”
“고마워요. 데려다주신다면 언제라도 좋아요.”
그는 준비 되는대로 연락하기로 하고 집으로 오면서 어떤 핑계를 만들어야 자신의 처삼촌으로부터 출장허락을 얻어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 밤방의 출장허락만 얻어낸다면 아내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는 요즘 들어 유난히 자신과 눈을 맞추려고 드는 다이세이 건설의 자카르타 지사장 야마모토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음 날 그의 호출을 받은 야마모토는 두 시간 만에 그의 사무실로 달려왔다. 서류 뭉치를 잔뜩 들은 두 명의 부하직원을 동반하고서였다. 그 많은 자료를 들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업무이야기는 십분도 안 되어서 끝났다. 서류를 덮으면서 에르윈이 말했다.
“야마모토상 단 둘이서 할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야마모토의 대답과 동시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둘만 남자 에르윈이 다시 말했다.
“내가 발리에 며칠 동안 출장 갈 핑계가 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겠소?”
눈치 빠른 야마모토는 즉시 말뜻을 알아차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지요.”
잠시 동안 생각을 짜내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다시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저희가 이번 공사의 견적에 있어서 단가를 낮추기 위한 새로운 공법을 채택할 생각이다. 그 새로운 공법을 마침 발리의 센추리호텔 건축현장에서 시공하고 있으니 비만또로에서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목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내용의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기간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사박오일로 해주시오. 하지만 이걸로 나를 엮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많이 보살펴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만한 편의를 제공해 드린 것으로 무슨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고맙소.”
“발리에서 며칠 지내시자면 차가 필요할 텐데 저희 현장에 있는 걸 쓰시지요. 귀빈용 BMW 730이 한 대 있습니다.”
그 말에 에르윈은 참지 못하고 좋은 내색을 하고야 말았다.
“그거 참 좋은 제안이군요. 야마모토상은 사람 마음을 다 읽는다니까.”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옆에 없었다. 그녀는 햇빛이 가득 들어와 있는 발코니에 목욕가운 차림으로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꿈에서 있었던 일이고 방금 자신이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존재가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가루다항공 발리행 비행기를 타기가 무섭게 열애 끝에 신혼여행을 가는 사이와도 같이 친밀하게 굴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신혼여행을 온 커플들과 거의 비슷한 일정을 보냈다.
발리의 산 정상에 있는 한다라 호수와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낚아채서 달아나곤 하는 원숭이 공원을 구경했고, 드넓은 해변에서 맑은 햇볕에 일광욕을 즐겼으며, 서양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바에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다. 또한 끼니때마다 바닷가재요리등 발리에서만 맛볼수 있는 최고의 음식들을 만끽했다. 그리고 밤에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발리에 온 것은 열 번도 넘지만 이번의 발리여행은 처음 온 것처럼 특별했다. 짓궂은 친구들에게서 들은 것처럼 일본여자는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자가 어린 자식에게 하듯 발을 씻겨주기도 했고 그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종이 주인에게 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는 처음으로 남자가 여자로부터 얻는 쾌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는 살금살금 뒤로 걸어가서 어깨를 감싼 자세로 가운 속으로 두 손을 뻗어 봉긋한 그녀의 젖가슴을 감싸 쥐었다. 예상대로 가운 안의 육체는 알몸이었다. 그리고는 돌려세워 그의 입술과 혀로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혀가 능숙하게 호응해왔다. 익숙한 달콤함에 취하여 잠시 그대로 서서 즐기다가 침대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오지 않았다. 팔에 좀 더 힘을 주려는데 그녀가 그의 귀에 콧김을 불어넣으면서 속삭였다.
“낮에는 싫어요. 일본에서는 낮에 사랑을 나누고 나면 남자가 싫증을 낸다는 말이 있어요. 빨리 샤워나 하세요. 저 배고파요.”
그 말에 그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은 성욕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강함을 과시하고자하는 욕구임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니 더 힘을 빼지 않는 편이 낫다.
“알았소.”
그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호텔의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 야마모토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에르윈과 함께 걸어오는 유리꼬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너 유리꼬 아니냐?”
유리꼬도 깜짝 놀란다.
“아저씨!”
어리둥절해있는 에르윈에게 유리꼬가 말한다.
“에르윈! 우리 아빠 친구분이여요. 내가 얘기한 적 있잖아요.”
야마모토는 한참동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묘한 인연이군.”
순간 에르윈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유리꼬를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함정인가? 그럴지도 몰라. 너무 쉽게 모든 것이 진행되었어. 아니야. 어떻게 그녀의 모든 행동이 거짓일 수 있어? 사랑의 말과 행동, 그 열정, 연기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어. 모든 게 우연일 뿐이야. 계획된 것이라면 야마모토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필요가 없겠지. 계획된 것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는 분명해. 그녀는 나에게 빠졌어. 나를 사랑해. 그리고 어찌되었던 나는 그녀를 버리지 않을 거야.’
계산이 끝나자 그는 무신경한 태도를 가장했다.
“야마모토상이 유리꼬 부친의 친구라니 잘 되었군요. 유리꼬를 잘 부탁합니다. 세상에 참 우연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하하하”
“유리꼬를 부탁해야하는 쪽은 바로 제가 아니겠습니까? 에르윈상, 유리꼬를 잘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에르윈은 ‘연기라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연기로군, 조심해야겠어.’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에 끌려들어가는 것은 흡사 수렁에 발을 빠진 것과 같아서 조심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는 너무나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너무나 굴곡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자키르타에 돌아온 후 이틀 동안 에르윈은 유리꼬를 만날 수 없었다. 하루는 회사일로 밤방과 행동을 같이해야했고 다른 하루는 가족행사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삼일 째 되는 날 그들은 퇴근 후에 만나 일본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데판야끼로 배를 채운 후 디저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유리꼬가 가련한 여인의 표정으로 말했다.
“에르윈 상, 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당신의 여자로 살고 싶어요. 숨어서 지내야한다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원치 않으신다면 일본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의 생각이 어떤지 말해주세요.”
에르윈은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리꼬. 나는 그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 때가 될 때까지 우리 사이를 세상에 알릴 수 없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래. 그 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 말에 유리꼬의 얼굴이 환해졌다.
“살 집을 구해야겠어요. 아파트가 좋겠지요? 에르윈이 알아봐 주실래요?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면 더 좋겠어요. 야마모토상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
“그렇게 좋아?”
이렇게 대답한 에르윈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과 차와 생활비를 제공해야한다. 그가 어울리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숨겨둔 애인에게 집과 외제차를 사주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실제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만일 그가 이 세상 최고의 여자를 얻었는데 집과 차를 사 줄 돈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대단한 회사의 이인자이긴 했지만 일개 월급쟁이일 뿐이었고 그의 수익은 너무도 투명하게 그의 부인에게 노출되어있는 형편이다.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잘빠진 여자들을 보고 껄떡거릴 때마다 막상 어떤 여자와 어페어가 생기면 이런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결국 ‘유리꼬는 일본사람이니 우리와는 사고방식이 다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가산을 정리했다니 돈도 좀 있을게고. 뭐 어떻게 되겠지, 일단 집이나 알아보자고.’ 하는 생각으로 정리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가 봐요.”
생각에 잠겨있는 그를 보고 유리꼬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자 그는 쾌활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내일 야마모토 상을 불러서 일본인 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물어볼 생각이요.”
그는 식당에 처음 들어설 때만해도 호텔로 따라가서 그녀의 몸을 탐할 생각으로 부풀어있었으나 그날은 그냥 호텔 정문에서 그녀와 작별했다. 성욕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린 때문이었다.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일본회사에서 최근에 지은 곳인데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보안도 완벽하고요. 크기는 100스퀘어미터 정도면 되겠지요?”
다음 날 그가 야마모토에게 말했을 때 그는 거기 말고 다른 곳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시세가 얼마정도 입니까?”
“입지도 그렇고 고급이어서 약간 비쌉니다. 미화로 삼십만 불 정도입니다.”
“삼십만! 비싸군. 깔세로는 얼마요?”
“1년에 2,3만 불정도 될 겁니다. 세를 얻으시게요?”
“돈이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의 말에 야마모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에르윈상 같은 분이 그만한 돈을 가지고........? 대 비만또로 그룹의 2인자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세를 얻는다면 유리꼬양이 무척 실망할 것입니다. 그녀는 에르윈상이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곤혹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제기랄, 저는 월급쟁이와 다를 바 없어요. 제 한달 월급이 얼만지 아세요?”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저는 에르윈상 같은 분은 돈에는 전혀 구애를 안 받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하시는 분으로서는 당연히 그래야하고요......... 그런데 세를 얻기에도 부담스럽다는 말씀이군요.”
“일본의 관습은 어떻습니까? 남자가 모든 것을 마련해줘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먹여 살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유리꼬에게는 그만한 돈이 있을 겁니다. 제가 에르윈씨의 사정을 한번 말해볼까요?”
이 말에 화색이 도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듯 야마모토는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여자의 신세를 지는 남자는 쓰레기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유리꼬는 에르윈씨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신다면 분명히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의 위력은 에르윈으로 하여금 한동안 말없이 허공만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때 야마모토가 가방을 열어 수표책을 꺼냈다. 표지에 'Bank Of Tokyo'라고 쓰여 있는 수표책을 펼쳐서 그 중 한 장을 뜯어냈다. 그리고 금액을 쓰지 않은 채 서명만 한 다음 그것을 에르윈에게 건넸다. 백지수표인 것이다. 에르윈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금액을.......써야.........될 텐데요.”
자신감 있는 야마모토의 손이 수표를 다시 받아서 액수를 적었다.
‘One Million Dollars Only (일백만 불)'
그리고나서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요? 이걸로 우선 쓰시고 나중에 더 필요하면 말씀만 하십시오.”
잠시 생각을 하는듯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에르윈이 말했다. 말투는 어느새 예의 건방기가 밴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고맙소. 빌린 걸로 합시다. 이걸 현금으로 바꾸어서 가져다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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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