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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감 -
하얀 얼굴색과 야자수 그림이 있는 셔츠 때문에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황태산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교도소 정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거나 서두르지 않고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교도소 앞 대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김정수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한지숙이 그를 막아서자 그제야 그녀를 처음 발견한 듯 아는 체를 했다.
그녀는 준비해온 두부를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이것 좀 드세요.”
“고맙소.”
그는 두부를 받아서 두 모금을 먹은 다음 나머지는 길가의 풀숲으로 던졌다. 그때를 기다려 김정수도 인사를 했다.
“김정수라고합니다.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아, 반갑소. 황태산이라 하오.”
한지숙이 황태산에게 두부를 건넬 때, 김정수와 인사를 나눌 때 그리고 셋이서 차를 타는 순간의 모습이 문성국의 카메라에 담겼지만 셋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황태산은 납치되어가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시작한 사람은 한지숙이었다.
“회장님께서는 국민의 정부 때 구속되셨으니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으시겠군요?”
“내가 어린애요? 개인적인 일로 대통령을 미워하게? 내가 구속된 것은 정치적인 일이 아니요. 남 탓을 하자면 미국 대통령 부시는 내가 탓할 수 있겠지. 쓸데없이 전쟁을 벌려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검찰아이들은 이번에 내가 아주 학을 떼었지. 무도한 놈들이요.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물론 과오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시군요. 그러면 이 정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아하니 당신들은 국정원 요원들이거나 이정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 사상은 무조건 합격이요. 내가 한국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지금의 대통령이오. 진정한 사내이면서 국부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측은지심을 가지신 분이요. 그러나 나를 이라크에 스파이로 파견할 생각이라면 거절이요.”
이 말에 두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호, 어째서 60넘으신 노인네를 스파이로 발탁할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이라크에 대해서라면 나만큼 현지인처럼 지내면서 스파이 짓을 잘 해낼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요? 내가 그곳에 머무른 시간만 합해도 3년이 넘어요. 술도 여자도 없는 그곳에서 시간도 죽이고 사업상 필요하기도 해서 회교사원에 다니며 아랍어와 이슬람 공부를 좀 했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공부해보면 참 재미있기도 해요. 내가 코란을 앞에 놓고 기도 주문을 외면 이슬람신자도 나를 ‘이맘’-회교 성직자-인줄 알정도요.”
이 말에 한지숙의 귀가 번쩍 띄었다.
“아! 굉장하네요. 그렇다면 회장님의 이슬람 재주가 회교국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쓸데가 많겠군요.”
“인도네시아? 거기도 몇 번 가봤지. 그 사람들 내가 아랍말로 기도한번 했더니 껌벅 죽더만. 내가 학교(감옥)만 안 갔으면 지금 쯤 인도네시아에서 공사를 하고 있을 거요. 거의 수주성사단계에서 이라크가 터졌으니까.”
한지숙은 기뻐할 보스의 얼굴이 떠올라 흥분되었다.
“저희들은 현 정부가 잘되도록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국정원 요원은 아닙니다. 우리 대장은 청와대 특보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감투에 연연해서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회장님을 모신 이유는...............”
한지숙은 가는 도중에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일을 황태산에게 설명했다. 내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들도 그렇지만 당신들 대장은 참 훌륭한 분이시오. 나를 끼워줘서 정말 고맙소.”
그가 안내된 곳은 고구려 호텔의 한 객실이었다. 전망이 좋은 침실과 별도의 접객실이 있는 주니어 스위트룸이었다.
황태산의 외동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부산에 살고 있는 사정을 아는 김인철이 며칠 동안 호텔에서 편히 쉬다가 거처를 결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김인철은 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았다.
인사를 나누는 것을 기다려서 한지숙이 김인철에게 말했다.
“제가 차안에서 대강의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김인철이 ‘한지숙의 지식으로 어디까지나 설명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하고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을 읽은 듯 황태산이 말했다.
“제가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을 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눈앞에 둔 인도네시아 공사의 사업 규모가 50억불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인도네시아에 탄탄한 기업을 소유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 공사를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건설공사에 경험도 없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것을 그 정도 시공능력을 가진 회사에 넘겨주고 리베이트나 필요한 조건을 취하는 대신 직접 시공하려고 하시는 것 같군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거나 건설업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있겠지요. 그래서 저를 필요로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수한 기업가적 야심으로 추진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특별히 자금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인철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정도의 통찰력이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회장님 말씀대로 입니다. 공사는 첫 번째 발주 액이 50억불이고 계속해서 발주될 공사는 300억불 규모입니다. 첫 번째 것만 잘하면 우리가 거의 다 따낼 수 있습니다. 당장 첫 번째 공사에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할 필요가 있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감은 얼마든지 확보가 가능합니다. 회장님의 경영능력이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계획의 최종적인 목적은 한국의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의 개혁적인 정치가를 키우고 지원하기 위한 재단법인 형태의 기금을 만드는 것입니다. 돈이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좋은 이상을 가진 유능한 정치재목이 부정한 돈에 오염되지 않도록 돕겠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정치 장학금 재단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언론사를 하나 육성하기 위한 자금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훌륭한 뜻이로군요. 그러면 실무적으로 우선 50억불 공사를 계약하고 시공할 수 있는 자본 규모의 회사를 만들어야 하고 해외건설업 면허를 가져야하는데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 생각이 맞는지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인수하거나 설립할 회사의 시공능력에 대해서는 저는 모릅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자금에 문제가 없는 한 회장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금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50억불 규모의 첫 번째 공사를 5단계로 나누어 계약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자금은 10억불 공사를 감당할 수 있는 규모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의 건설공사가 그러하듯 이 공사도 계약과 동시에 20%의 선수금을 받을 수 있고 대금도 공정에 따라 기성으로 지급됩니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에서 순수하게 필요한 자금은 입찰보증본드, 공사이행보증본드, 선수금환급보증본드를 은행으로부터 발급받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화 이천만 불 즉 한국 돈 이백사십억 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지만 저는 회사 초기 납입자본금으로 천억 원을 확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소유의 인도네시아 원목회사 지분의 절반을 독일 회사에게 판매하여 오백 억을 마련하고 나머지 오백 억은 유럽 투자자들을 상대로 공개 프레젠테이션에서 자본유치를 할 생각입니다. 그 준비는 상당히 진행된 상태로 낙관적입니다. 그리고 해외건설업 면허 문제는 백억 정도의 예산으로 해외 건설업 면허가 있고 파산상태인 회사를 찾아서 인수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만일 마땅한 회사를 찾을 수 없다면 면허가 필요 없는 현지회사를 설립할 생각입니다.”
“건설 회사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일의 요체를 꿰뚫고 계시는군요. 건설업계는 계열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서 대형 공사의 시공능력이라는 것은 하청관리 능력과 자금력이 전부입니다. 급조된 회사라도 팀을 잘 짜면 충분히 시공능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게 되면 옛 사람들을 모아야지요. 좋은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아, 좋군요. 저는 은행에 근무할 때 프로젝트 파이낸싱 업무를 좀 해봤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판은 조금 압니다.”
“공사 발주처의 오너와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그 공사를 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계약에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준비했다가 그렇게 되었을 경우의 데미지는 계산해 보셨나요? 실패하는 경우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회장님을 만나서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된 마당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니 공사를 못 따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는 투자된 자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므로 금전적인 손해는 미미합니다. 그 프로젝트를 위하여 마련한 자금과 설립한 회사로 사업을 새로 시작해도 되겠지요. 좀 더디겠지만 길게 보고 해야지요.”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럼 일의 추진 단계를 대충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첫 번째 단계가 제 회사의 지분판매입니다. 판매금액은 미화 오천만 불이고 원매자와는 합의가 된 상태입니다. 그 회사의 인수팀은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실사 중입니다. 이달 말 쯤 매매가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
김인철은 모든 계획을 숨김없이 설명했고 황태산은 메모를 해 가면서 열심히 들었다. 옆에서 듣던 한지숙과 김정수로서도 머리가 훤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들로서도 이렇게 전체적인 윤곽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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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