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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놀던 시기에 썼던 습작소설입니다. 그 때는 생각이 좀 많았나 봐요.
#1
-입주자 신원을 확인합니다. 홍채 인식완료. 성문을 확인합니다.
“단마루.”
-성문 확인완료. 구천오백육호 입주자 <단마루> 확인되었습니다.
두껍고 단단한 유리문이 ‘지잉’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루는 털레털레 걸어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문이 열렸다. 마루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고 바로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구십오층까지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단일라인이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입구와 각 집의 현관문이 바로 연결돼 있었다. 복도나 계단은 없었다. 생유그룹은 피안타운이 화재사고나 천재지변 같은 것에서 완벽히 보호되는 최첨단 아파트라고 자랑했다. 피안타운은 아파트출입부터 재난 방지, 방범, 쓰레기처리까지 모두 자동화되어 있었다. 생유그룹은 독자적으로 축적한 고객데이터를 바탕으로 하여 입주 전부터 입주자의 취향과 건강상태까지 완벽하게 고려한 가구 및 실내인테리어도 더불어 자랑했다.
전국토의 유비쿼터스화가 정부시책으로 추진된 지 30년이 지났다. 안양시 극락구 피안타운은 그 정점에 달한 최첨단 주거시설이었다. 150층 높이와 40개 라인. 한 동에 6000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피안타운은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피안타운은 지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생유그룹의 간판과 같은 곳이었기에 수시로 개량을 거듭해, 항상 최첨단임을 자랑했다.
-입주자를 확인합니다.
“단마루.”
현관문이 열렸다. 전자레일 방식의 두꺼운 미닫이 문이었다. 마루가 집에 들어오기까지 손을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마루님의 총외출 시간은 여덟 시간 삼십구 분입니다. 단마루님의 출입과정에서 약 13만종의 세균 및 유해물질이 검출되었으므로 공기세척을 실시합니다.
현관이 격리되고 사방에서 소독약냄새로 가득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마루는 바람을 맞으면서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공기세척완료. 어서 오십시오. 단마루님.
현관에서 거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집으로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요란스러웠다. 마루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일상적인 일은 요란스러울 수 없다.
“엄마 어딨어?”
-단마루님의 어머니께서는 현재 피안타운 삼동 육호 라인 대표 자격으로 생유건설에서 주최한 월정기 입주민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회의는 현재 피안타운 주민회의소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진행과정은 입주민전용 폐쇄방송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시청하시겠습니까?
“됐어.”
-현재 단마루님께 빛남초등학교 사학년 삼반 담임선생님 발신으로 된 두 개의 숙제 메일이 수신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숙제해결에 약 두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되므로 단마루님의 취침예정시간인 오후 열 시의 세 시간 전인 오후 일곱 시 전에는 숙제를 시작하시길 권유합니다.
“좀 있다가 할게. 텔레비전.”
-현재 시각 모든 방송 검색결과 단마루님의 정서함양과 지적능력향상에 도움이 되는 적합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서 내지는 숙제해결을 권유합니다.
“어차피 학원수업 들어야 돼. 텔레비전 켜 줘.”
마루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거실은 휑했다. 나무형상이 군데군데 그려진 하얀 톤의 벽에 소파와 탁자가 전부였다. 마루가 텔레비전을 켜달라고 말하자 소파와 마주보는 벽이 화면으로 바뀌었다. 벽 자체가 텔레비전이었다..
“화면 좀 줄여줘. 너무 커.”
벽 전체를 덮던 화면이 반절 크기로 줄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한창 인기를 구가중인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만화영화가 방영 중이었다. 몬스터들끼리 전투를 시작하자 거실 여기 저기서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미없어. 딴 데 돌려봐.”
-현재 단마루님께는 이외의 적합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에이, 씨. 꼴통.”
-부적절한 언어사용입니다. 시정을 권유합니다.
“병신.”
-부적절한 언어사용이 삼회 이상 이어질 경우 단마루님의 부모님께 즉시 보고됩니다.
“됐어. 이제 안 해. 이 고자질쟁이야.”
-적절한 결정입니다.
“너 좀 조용할 수 없어?”
-적합한 인증코드를 입력하시면 지킴이의 동작에 관한 설정이 활성화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실랑이였다. 마루는 매번 저항하고 매번 체념했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지킴이의 손바닥 위 였다. 마루가 보기에 지킴이는 완전무결했다.
-오늘은 더클학원 재택영어수업이 예정돼 있습니다. 지금 수업을 들으시겠습니까?
“몰라. 너 마음대로 해.”
-단마루님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지킴이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에이 몰라. 그냥 틀어.”
마루는 자기 방으로 몸을 옮겨 책상 앞에 앉았다. 바로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이 꺼졌다. 마루가 앉자마자 책상 뒤쪽 벽이 화면으로 바뀌면서 익숙한 영어강사의 얼굴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단마루학생. 지난 번 우리가 친구와 싸우고 나서 화해할 때 대화를 어떻게 해야되는지 공부했죠. 오늘은 이어서…….
녹화된 영상이었다. 어차피 이름부분만 음성이 합성됐을 것이었다. 강사는 화면 안에서 신나게 혼자 떠들었다. 마루는 책상 위 터치스크린에 펼쳐진 교재에다 글자를 조금 끄적거리더니 이내 엎어져 잠들었다. 차가운 터치스크린 위로 침이 조금씩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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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에 여보, 오늘 입주민 회의에 갔는데 뭐라는 줄 알아요? 이번에 퇴거한 사람들이 많은데 입주신청이 예상보다 적어서 불가촉들 입주가 좀 늘어날 거래요. 아니, 작년에도 열 집 들어왔고 재작년에도 열 집 넘게 들어왔는데, 올해는 스무 집 가까이 불가촉이 들어올 거라잖아요. 아휴, 이제 우리 마루가 좀 클만하다 싶으니까 또 이렇게 여기저기서 훼방을 놓네 그래. 불가촉이 뭐래, 불가촉이. 아유, 말만 들어도 기분 나빠 죽겠어. 소름이 막 끼쳐.
웃기지 않아요? 아니, 무슨 얼어 죽을 저소득층배려래. 그냥 먹을 거나 좀 던져주고 그러면 되지 무슨 추첨으로 입주권을 주고 그런대요. 생유 입사는 또 뭐래. 집 줘, 일자리 줘. 정부가 뭐 그래요. 어차피 하는 것도 없으면서. 정부라면서 있으면 뭐해요. 죄다 생유쪽 사람들 아냐. 맨날 국회의원 후보라고 나오는 것들도 생유 무슨 이사니 전무니 그렇고. 투표는 왜 하는지 몰라. 거기서 지들끼리 총리 뽑아봐야 뭐 다를 게 있겠어요. 안 그래요?
어차피 우리나라 생유가 죄다 잡고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이미지를 신경 쓴대. 저소득층 배려니 이러면서 쇼하는 거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요. 자꾸 꾸역꾸역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것들하고 일반인들하고 섞으면 뭐할 거예요. 어차피 걔네들은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들인데. 그냥 저기 산 밑에서 지들끼리 밥 해먹고 넝마나 주우면서 살면 되잖아. 지들이 암만 날고 기어봤자 불가촉이지 뭐. 불.가.촉.천.민.
아니, 안 그래도 삼호 라인에 있잖아. 천오백삼호. 거기 하영이엄마가 그러는데 불가촉들이 요번 선거 때 투표한답시고 요 근방까지 올라왔다지 뭐예요. 지들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투표하러 오면 불가촉인 줄 모르나. 투표소 들어올 때 홍채인식에서부터 걸리는데. 가진 것도 없는 것들이 뭐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투표하려고 그런대. 거기다가 지들이 투표하면 뭐 뾰족한 수가 나오나. 들어와서 제대로 투표하지도 못하는데 걔네들 명단에는 왜 올려놓나 몰라요. 약올리는 거야 뭐야.
얘기 들어보니까 생유타도연대인가 하는 뭐시깽이들이 불가촉들을 그렇게 선동한다네요. 불가촉들이 동네에 올라오는데 걔네들이 안에서 회로 끊고 그래서 문열어주고 그랬대. 그것들이 뱃대지가 불러서 그러는 거야. 먹고 살만하니까 남 일에 그렇게 목숨거는 거지. 걔네들 부모가 다들 빵빵하다면서요? 에휴, 미친 것들. 걔네들 부모는 자식새끼 공들여서 키워줬더니 그런 짓거리나 하는 거 보고 얼마나 속이 썩을까요. 행여 우리 마루도 그런데 물들지 모르니까 애초부터 단속 잘해야겠어요. 우리 마루 잘 키워서 떡하니 생유그룹 좋은 데 들어가면 평생 걱정없지 뭐. 당신이 생유에서 일해도 좀 그렇잖아. 마루는 열심히 다독여서 관리직으로 키워야지. 그러면 나도 바로 눈감고 죽어도 될 거 같아요.
그건 그렇고 말예요. 우리 마루 학원 말고 뭐 하나 더 해야 될 거 같은데. 요새 마루가 성적이 시원찮아요. 우리 마루가 머리는 좋은데, 다른 집에서 워낙에 극성스럽게 애들을 가르치니까. 그것 때문에 애가 기죽는 것 같기도 하고 말예요. 영어, 수학 학원 보내는 거야 남들도 다 하는 거, 우리 마루가 한다고 더 특별할 것도 없는 거고, 초등학교 좋은 데 들어가서 다니고야 있지만 다른 애들은 머리 털 날 때부터 외국에 몇 년씩 있다가 들어오는데 우리 마루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지금 하는 것보다 좀 더 열심히 시켜야 걔네들 따라잡지.
하영이가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잖아요. 햇살여중에 벌써 입학예정 다 돼 있대요. 거기가 좀 멀긴 해도 엄청 좋은 데 아니야. 생유전자 간부 딸내미들이 죄다 거기 다닌대요. 하영이도 외국에 한 번도 안 나갔는데, 애가 영어고 뭐고 다 그렇게 잘한대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학교장추천을 받아서는 햇살여중에 입학허가 받은 거 아냐. 우리 마루도 떡하니 힘찬중학교 이런 데 들어가면 얼마나 좋아. 하영이 걔가 머리가 특별히 좋아서 그렇게 간 게 아니라, 따로 과외를 받았는데 그 선생이 기가 막히게 잘 가르친대요. 하바드에서 유학을 했다나 어쨌다나. 하영이엄마가 소개해 줄 테니까 한 번 해보겠냐고 묻는데, 이 양반이 좀 세게 부른대. 자기가 실력이 있으니까. 하영이네도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안 먹고 하면서 과외비 줬다는데 우리라고 못할 거 없잖아요? 하영이네랑 우리랑 얼마나 차이난다고. 우리도 한 번 시켜보는 게 어때요. 딴 게 뭐 중요해. 애 교육이 제일 중요하지. 당신도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마루 좀 신경써요.
마루야, 너 이리 와 봐. 엄마랑 얘기 좀 하자. 방금 지킴이한테서 너 오늘 행동결산 받았는데, 완전히 엉망이더라? 어디 갔다가 집에 네 시 넘어서 들어왔어? 학교 두 시 되면 마치잖아. 너 또 저기 불가촉들 사는 데 갔지? 그 쪽으로 가지 말라고 엄마가 몇 번 말했어? 불가촉애들하고 어울리면 안돼요. 걔들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 아니야. 학교에 좋은 친구 많잖아. 왜 그런 애들 놔두고 나쁜 애들하고 어울리려고 그러니, 넌. 마루야, 엄마 속 좀 그만 썩이면 안되겠니? 너 다른 데 가봤자 위치탐색하면 다 나오잖니. 저번에 그렇게 혼나고. 오늘 학원수업도 제대로 안 들었지? 침까지 흘리면서 잤지? 너 나중에 커서 뭐하려고 그러니.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러니. 저기 불가촉들처럼 살고 싶어? 산 밑에서 넝마나 기우면서 그렇게 살거야? 정신차리고, 눈 부릅뜨고, 응? 제발, 마루야. 우리 잘하자. 엄마 너 믿는 거 알지. 잘할 수 있지? 내일부터 잘할 거야, 우리 마루.”
#3
삼주 전이었다. 마루는 학교를 마치고 아파트 단지 뒤로 펼쳐진 숲마을을 거닐었다. 학교를 다녀오던 길에 발걸음을 살짝 돌려 돌아 본 숲마을은 의외의 별천지였다. 항상 옆에 끼고 사는 곳이었는데 한 번도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피안타운 입주민을 위한 삼림욕 시설이었다. 마루는 나무 틈 사이를 거닐며 상쾌한 공기를 만끽했다. 햇살도 좋았다. 숲마을은 꽤 큰 규모였다. 마루가 잰걸음으로 삼십분을 걸어도 끝을 보기 힘들었다. 첫날 돌아다니다 지친 마루는 다음날에는 꼭 숲마을의 끝이 궁금해 시간이 얼마가 됐든 입구에서 끝까지 가로질러보리라 결심했다.
다음날 끝을 보는 건 생각보다 싱거웠다. 삼십분하고 오분을 더 가니 끝이 보였다.
숲마을의 끝은 커다란 유리벽이었다. 유리벽 밖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휑한 땅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앙상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보였다. 불가촉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마을을 보며 마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기 없어 보이는 마을 입구에 여자 아이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마루의 눈에 들어왔다. 마루는 불가촉들이 거지같은 모습이거나 초라한 노인일거라고 생각했다. 불가촉 중에도 마루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것도 여자아이가. 마루는 상상 밖의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날에도 마루는 숲마을을 찾았다. 숲마을 끝까지 가서 유리벽을 따라 조금 걸어보니 유리벽 군데군데에 출입문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출입구같이 홍채와 성문을 인식하는 시스템이었다.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에 달린 스위치만 누르면 끝이었다. 마루는 용기를 갖고 스위치를 눌러보았다. 간단하게 문이 열렸다. 문 밖으로 마루는 발을 내딛었다. 마른 흙바람이 마루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제의 그 여자아이가 똑같은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루는 발걸음에 속도를 붙여서 여자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바로 허름한 차림새의 여자가 마을입구에서 나와서는 여자아이를 일으킨 뒤 마을로 데려갔다. 여자아이가 붙들려가면서 마루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동그랗고 큰 눈에 뽀얀 피부를 가진 예쁜 아이였다. 짧은 시간 동안 여자 아이의 눈과 마루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마루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마루는 여자아이가 놀던 곳으로 가 보았다. 여자아이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커다란 아파트의 그림이었다. 마루는 숲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마을 너머로 높이 솟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아파트꼭대기는 구름의 엉덩이를 찌를 기세였다. 마루는 불가촉 마을의 입구쪽을 잠시 바라보다 바로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숲마을을 돌아보느라 마루의 귀가시간은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어지게 되었다. 엄마가 집에 있었다면 왜 이렇게 늦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는 집에 없었다. 엄마는 언제부터인지 입주민회의에 참석하더니 모든 궂은 일을 나서서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총무를 하더니 부대표가 되었다. 두 달 전에는 결국 라인의 대표가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마루에 관한 모든 일을 지킴이에게 맡겼다. 엄마는 지킴이를 엄마 대신이라 생각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마루에게 말했다. 마루의 관리를 지킴이에게 맡긴 뒤부터 엄마는 매일 느즈막한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마루는 일주일 정도 숲마을을 찾지 않았다. 엄마가 괜히 방과 후 행적에 대해 추궁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마루의 행적에 대해 엄마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루는 다시 숲마을을 찾았다.
사흘째 헛걸음이었다. 유리벽 너머에는 여자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돌아가려는 찰나에 불가촉마을 입구에서 여자아이가 슬며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루는 지켜보다 여자아이가 또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유리벽 밖으로 나갔다.
마루는 조급한 마음에 성큼성큼 크게 걸으며 여자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여자아이는 마루가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마루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루는 여자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어정쩡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넌 누구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마루에게 여자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반은 의심, 반은 호기심으로 찬 눈빛이었다.
“저기…….”
“저기 뭐? 저기 살아?”
여자아이가 턱 끝으로 마루가 사는 동네 쪽을 가리켰다.
“어…응.”
“너 이쪽으로 와도 돼?”
“…아니.”
“그런데 왜 온 거야?”
여자아이의 말끝에서 옅은 위화감이 맴돌았다.
“저, 그게, 그냥, 아니야.”
마루의 입안에서 혀가 꼬였다. 말이 꼬여 달아오른 마루의 얼굴을 보며 여자아이가 피식하면서 웃었다.
“너 저번에 나 본 적 있지?”
“어…아니…응.”
“너 몇 살이야?”
“열한 살….”
“나랑 같네. 그럼 사학년?”
“응, 사학년.”
“난 주여울이야. 여울이라고 부르면 돼. 니 이름은 뭐니?”
쪼그리고 앉아 있던 여울이가 이름을 말하며 일어섰다. 일어서니 마루보다 약간 큰 키였다.
“다, 단마루.”
멀리서 볼 때 마루는 여울이가 작은 덩치일 것이라 생각했다. 여울이의 자그맣고 뽀얀 얼굴 때문에 그런 예상은 신빙성이 커졌다. 그러나 예상은 지금 마루 눈앞에서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짧은 대화동안 마루는 여울이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마루는 여울이에게 한 번도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루의 머릿속은 텅빈 것도, 어지러운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였다.
“너 저기 피안타운 살지? 좋겠다.”
“…응.”
“우리 집은 되게 꼬졌는데. 너네 집 부자구나?”
“우리 집 부자 아냐.”
“바보야, 피안타운은 부자만 사는 거야. 부자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높은 데서 살아. 너네집은 저기 몇 층이야?”
“구십오 층.”
“우와, 너 완전 꼭대기에 사는구나.”
“우리집은 꼭대기 아니야. 백오십 층이 꼭대기야.”
“좋겠다.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 저기 꼭대기에 살면 구름도 만질 수 있겠네.”
“별로 안 좋아. 집 안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귀찮고 복잡한데. 백오십층에 살아도 구름은 못 만질 거야. 구름은 저기 우리 아파트보다 더 높은 데 있잖아.”
여울이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마루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자 바짝 오그라들었던 마루의 마음이 슬슬 누그러졌다. 마루의 입도 따라 슬슬 열리기 시작했다.
“여…울아.”
“왜?”
“너 여기 매일 나와?”
“아니, 엄마가 동네 밖으로 못 나오게 해. 엄마가 공공근로 나가면 그 사이에 잠깐 나와.”
“엄마가 왜 못 나오게 해?”
“피안타운 쪽으로 가면 안된대. 저기는 요망한 데라서 쳐다보기만 해도 귀신에 홀린대. 우리 엄마는 완전 거짓말쟁이야. 자기는 가난뱅이라 그런데서 못사니까 샘나서 그러는 거야. 난 나중에 꼭 저런 데서 살 거야.”
“어떻게?”
“기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신대. 그래서 난 매일 자기 전에 기도해. 그런데, 되게 신기하다. 어제는 매일 기도해도 하느님이 내 소원 안 들어주시니까 그냥 피안타운에 사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주세요하고 빌었는데, 오늘 너랑 만났어.”
마루는 졸지에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어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쪼그리고 앉았다.
“여울이 넌 왜 피안타운 같은 데서 살고 싶어?”
마루는 여울이에게 따져 묻듯 말했다. 여울이는 마루가 묻는 말에 괜히 신나서 연거푸 말을 쏟아냈다.
“우리동네 싫어. 다들 더럽고 가난뱅이야. 우리집도 싫어. 아빠는 냄새나고 엄마는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전부 못생기고, 욕심쟁이, 거지들이야.”
여울이는 말하다 제 악에 받쳐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난 피안타운 싫은데. 저기 완전 바보들만 살아. 지킴이라고 무슨 이상한 목소리같은 게 나와서 맨날 막 뭐 시켜.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못보게 해. 내가 봐야 되는 거 지가 막 골라준다. 우리 엄마는 그 말 잘 들어야 된대.”
이번에는 마루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킴이의 잔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괜스레 마루의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솟아올랐다.
“지킴이가 뭐야? 로봇이야?”
“그냥 고자질쟁이야. 고자질쟁이. 완전 꼴통.”
“꼴통이래.”
마루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여울이가 까르르하고 웃었다. 여울이의 눈이 굽은 반달모양으로 변했다. 아래위로 오므라들어도 큰 눈이었다. 입가로 번지는 미소는 괜히 눈부셨다. 마루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도 여울이만큼 예쁜 아이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샐쭉하던 마루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는 학교 어디 다녀?”
“올챙이학교.”
“거긴 어디야?”
“우리동네 안에 있어. 우리 선생님 되게 좋다. 선생님이 목사님도 하는데,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되게 멋있다. 우리 동네는 다른 건 다 꼬진데, 선생님은 좋아. 그래서 저녁에 엄마가 귀찮게 하면 학교 가서 놀아. 학교가면 선생님이 과자도 주고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줘. 선생님이 기도 열심히 하라고 그랬어. 그러면 사람들 몰래 돌아다니는 천사가 기도를 듣고 하느님한테 전해준대.”
여울이는 들뜬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학교에 놀러가다니. 마루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마루가 다니는 학교는 놀러갈만한 곳이 아니었다. 생유그룹에 다니는 부모님의 직위에 따라 아이들의 계급이 정해졌다. 아이들끼리 쟤네 아버지는 이사래, 쟤네 아버지는 생유그룹에서 청소한대라고 쑥덕거리며 패거리를 만들었다. 마루의 아버지는 생유전력회사에서 배선을 담당하는 기술자였다. 일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의 대우는 생유본사 신입사원 수준 이상이 되지 못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마루의 계급은 아래쪽이었다. 아이들의 계급에 따라 선생님의 대우도 차이가 있었다. 마루에게는 이상하게 당번이 자주 돌아왔다. 마루의 청소담당구역은 항상 화장실이었다.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피안타운은 무지 높으니까 하느님하고 가까워서 기도가 더 빨리 전해질거야.”
여울이의 말은 믿음으로 꽉 차 있었다. 마루는 천사 따위를 본 적은 없었다. 하느님에게 기도해 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 된다고 그랬다. 지금은 지킴이가 엄마 대신이었다. 지킴이는 마루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봄이 어중간한 철이라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쪼그리고 앉은 둘에게 마른 모래들이 날아들었다. 콘크리트를 벗어날 일이 거의 없는 마루에게 마른 모래바람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옷깃을 여며 올리며 마루는 오만상을 다 지었다.
“너 표정 되게 재밌다.”
바람이 사그라들자 여울이가 마루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호기심에 꽉 찬 표정이었다. 신기한 것을 보는 듯 했다. 그건 피차 매일반이었다. 마루는 여울이가 신기했고, 여울이는 마루가 신기했다.
여울이가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팔목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낡은 전자손목시계였다. 마루는 손목시계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마루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알림통이라는 물건은 화상전화, 텔레비전, 공책, 시계, 리모콘 등 모든 게 다 되는 기계였다. 마루가 사는 동네에서는 누구든지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마루는 알림통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지금은 엄마가 바빠져서 망정이지 그 전만 하더라도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알림통으로 마루를 찾았다.
“조금 있으면 엄마, 집에 들어와. 나 집에 없으면 엄마가 찾으러 나오니까 나 이제 집에 들어가볼래.”
“응…너…여기 언제 또 올 거야?”
“엄마 없으면 매일 나올 거야. 난 우리 동네가 싫거든. 마루야. 나 너네 동네에 놀러가보면 안될까?”
“응. 다음에는 우리 동네에 놀러가자.”
마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여울이도 따라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그럼 나 너네 집에도 가볼래.”
“알았어. 우리 엄마 요새 집에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나 갈게. 안녕.”
“안녕.”
여울이는 신나하며 총총히 마을로 돌아갔다. 마루는 자신의 약속이 들어줄 수 없는 것이란 걸 잊고 있었다.
처음 여울이를 만나고 들어온 날, 집 현관에서 지킴이는 난리부산을 떨었다. 더러운 모래바람을 맞았다면서 온갖 경고메시지에, 온갖 약품을 마루의 몸에 뿌려댔다. 마침 엄마도 집에 일찍 들어온 상태였다. 엄마는 마루의 행적에 대해 추궁했다. 사실 추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알림통과 연결된 지킴이가 엄마에게 모든 것을 실토한 뒤였다. 엄마는 마루를 두고 절대 숲마을 쪽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마루는 꿋꿋하게 한 번씩 숲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여울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루는 여울이 엄마도 어지간하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잠자리에 든 마루의 눈앞에 여울이의 예쁜 얼굴이 아른거렸다.
#4
“당신 미쳤지? 당신 미쳤지? 나가 죽어. 그냥 죽어.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엄한 니 마누라, 니 자식새끼를 끌어들이니? 응?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는데, 이 망할 인간아. 노조? 그게 뭔데? 그딴 게 뭔데 당신이 설쳐? 내가 엉뚱한 데 휩쓸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런 거 생기면 뭐 달라져? 그냥 없으면 없는 데로 참고 살면 되는 거야. 원래부터 없이 태어난 걸 그냥 우리 마루나 잘 키우면 되지. 당신이 뭘 안다고 그딴 걸 하니. 이 얼빠진 인간아.
생유타도연대? 그런 거 호강에 겨운 애들이 할 일 없어서 하는 거 아냐. 당신하고 종자가 다른 애들이라고. 어린 것들이 시간남고 할 일 없어서 설치는데 거기에 당신이 왜 휘둘려. 어쩔거야? 본사에서 당신 노조결성 참여한 거 알았다는데, 당신 어쩔거야? 미친 인간아, 생유에서 노조 만들면 당신한테 쌀이 떨어져 돈이 떨어져? 피안타운에서 살고 당신 생유에서 일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줄 알아야지. 당신하는 일도 못해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데 당신이. 그만큼 살았으면서 세상물정도 모르니. 인간아? 어쩔 거야. 당장 내일 퇴거명령 들어오고 당신 회사에서 쫓겨날텐데. 예전에 생유에서 노조한다고 설치던 사람들 어떻게 됐는지 얘기 못 들었어? 퇴직금도 못 받고 다 쫓겨났잖아. 그 사람들 죄다 불가촉마을로 쫓겨 가서 거기서도 손가락질 받고 살고 있대. 난 안 돼. 난 그렇게 못살아. 당신은 몰라도 나랑 마루는 그렇게 못살아. 내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는데. 당신 그냥 잘못했다고 가서 빌어. 응?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안 될까? 그래도 거기도 한 번은 봐주겠지? 당신 거기 가서 그냥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당신 우리 여기 들어오기 전에 기억 안나? 저기 불가촉마을에서 우리 어떻게 살았어? 돈 없어서 동네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공공근로라고 나가면 풀 뽑고 넝마 줍고, 구청사람들이 온갖 멸시란 멸시는 다 하고, 거기가 사람 사는 데야? 우리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데, 거기서 계속 살았으면 우리 마루가 할아버지가 돼도 계속 그 짝이었어. 내가 마루 낳고 아랫도리 아물지도 않았는데, 핏덩이 마루업고 넝마 주우러 나갔어. 당신 기억 안나? 우리 거기서 그렇게 살았어. 나 다시는 그렇게 못 살아. 나 마루 끌어안고 그냥 죽을 거야. 피안타운 입주 당첨돼서 당신 생유에 일자리도 생기고 마루 좋은 학교도 보내고, 겨우 이렇게 사람행세하면서 살게 됐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처음에 내가 온갖 괄시 다 받으면서 여기 사람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여기 살면서 하루에 내가 몇 번씩 혀 깨물고 죽고 싶었는지 알아? 그래도 우리 마루 기 안 죽이고 키우려고, 우리 식구 다시는 괄시 안 받으려고 주민회의 나가고, 아파트 여편네들 졸졸 따라다니면서 내가 오만가지 일을 다 했어. 그 역겨운 여편네들 거드름피우는 거, 꼴같잖게 무시하는 거 다 들어주면서 내가 그렇게 살았어. 그렇게 10년을 살았어, 내가. 여기서. 그래서 이제 라인대표도 맡고 해서 겨우 사람대접 좀 받나 싶었는데, 내가 그렇게 죽어라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여기 사람들 좀 따라잡나 싶었는데. 응? 내가 그렇게 살았다구. 당신이 그걸 알아? 아냐구? 내가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지 당신이 알아? 그거 알면 당신 그렇게 못해. 진짜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신 우리 그냥 죽자. 진짜 나 거기서는 못 살아. 안 돼, 절대 안 돼. 아니 그냥, 당신 가서 빌어. 제발. 없던 일로 하겠다고 그러면서 빌어. 제발…….”
#5
-피안타운 입주민자격조항 오조 삼항에 근거, 단갈훈씨 외 두 명의 가족은 퇴거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입주가능시간은 현재 칠일 이십이시간이 남았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신속한 퇴거를 요청 드립니다.
불벼락같은 일이 마루네 집에 닥쳤다. 마루의 아빠가 지하노조를 결성을 기도하다 생유그룹 본사에 발각되었다고 했다. 이번 일은 꽤 큰 규모로 벌어진 일이었다. 노조결성에 관여한 수백 명의 인물이 퇴사조치 당했다. 생유그룹 사원자격으로 부여된 피안타운 입주권도 덩달아 박탈당했다. 생유 본사의 퇴사조치와 피안타운의 퇴거결정은 굉장히 재빨랐다. 발각에서 조치까지 걸린 시간은 이틀이 채 못 되었다. 퇴거 결정이 내려지고부터 두 시간 간격으로 지킴이는 퇴거 요청 메시지를 반복했다. 마루의 엄마는 거의 반 실성상태였다. 아빠는 며칠간 소식이 없다 술에 잔뜩 쩐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마루는 한참 엄마를 따라 울다가 엄마를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루는 엄마를 돌보느라 며칠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간간히 여울이 생각이 났다. 그래도 피안타운을 나가면 여울이는 자유롭게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마루에게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다 퇴교조치가 이루어졌으며 개인사물을 챙겨가라는 건조한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마루는 메시지를 받고 한참을 쭈뼛거리다 다음날 학교에 찾아갔다. 딴에는 정상적인 등교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루가 학교에 들어설 때 느낀 아이들의 시선은 예전과는 딴판이었다. 경멸하는 듯 한 싸늘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모르고 지내지는 않았는데 마루를 아는 척 하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교실에서 마루가 앉았던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마루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다들 그리도 냉정할 줄이야. 마루는 조금씩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사물함을 비워내는 마루의 손이 떨렸다.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마루…맞지?”
사물함정리가 마무리되려는 찰나에 마루의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마루를 불렀다. 마루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여울이가 마루의 뒤에 서 있었다. 전에 봤던 모습과는 다른 말끔한 모습이었다. 뭘 입어도 예쁠 거라 생각했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여울이의 모습은 정말 빛이 났다.
“여울이야? 어떻게…….”
“나 어제부터 이 학교에 다니게 됐어. 지나가다 혹시 해서 봤는데 마루 맞구나. 나 니네 옆반이야. 잘됐다.”
“응, 그렇구나…….”
여울이가 마루 옆으로 다가와 바짝 붙었다. 여울이는 마루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우리집 피안타운 입주 당첨됐어. 입주허가는 났는데, 먼저 살던 사람이 아직 안나가서 못 들어가고 있거든. 그래도 학교는 바로 다닐 수 있어서 어제부터 나왔어. 너네집 구십오층이랬지? 우리집도 구십오층이야. 삼동 구천오백육호래. 이제 우리아빠 생유에서 일한대. 우리엄마 귀신들리니 어쩌니 그러더니 요새 좋아 죽으려고 그래. 기도 열심히 하니까 하느님이 진짜 들어주신 거야. 참, 이거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
“…거기가 우리 집이야.”
“응?”
“삼동 구천오백육호가 우리집이야.”
마루가 말끝을 흐렸다.
“너네 집 이사가?”
“응.”
“어디로?”
여울이가 놀란 표정으로 연거푸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우리엄마가 너네 동네로 갈 것 같대.”
마루의 대답을 듣자, 여울이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럼, 이제 너 불가촉천민이구나?”
여울이는 차갑게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 교실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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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