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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도랑 너머 동산꼭대기와 접붙으며 아슴푸레한 하늘을 우물쭈물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땅거미가 골목 곳곳을 누비면서 집집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를 피어 올렸다.
더위와 선선함이 어지럽게 교차하던 오후에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각자의 집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어지럽게 널린 돌조각들, 흙바닥위로 이리저리 그어진 엉성한 선들, 천방지축으로 찍힌 발자국들이 아이들이 방금 전까지 그 곳에서 정신없이 뛰어놀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둑어둑해지면 개들이 짖었다. 한 집에서 컹컹거리며 개짖는 소리가 들리면 다른 집 개들도 따라 짖었다. 동네 개들은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죄다 주둥이가 시커맸다. 흰둥이, 검둥이, 누렁이, 바둑이. 개들은 이름도 거기서 거기였다. 지금 짖는 녀석들은 올해 삼복을 넘긴 운 좋은 녀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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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이가 끼리릭 소리나는 쇠문을 힘겹게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이 볼썽 사나웠다. 질질 흘린 콧물자국가로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묘한 도형을 그렸다. 손에는 흙가루와 땀이 범벅되어 손금을 따라가는 새까만 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바지는 무릎이 다 헤졌다. 곧 헝겊을 덧대야 할 판이었다. 승민이의 폼새는 매일 저녁 같은 모양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승민이가 찾아들어간 곳은 부엌이었다. 할매가 부엌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석유곤로에 불을 키려하는 찰나였다.
“할매, 밥 도.”
“야야, 니 꼬라지 그기 뭐꼬. 걸배이가 내캉 같이 살자 카겠다. 밥 될라 카믄 하마 멀었으니까 퍼뜩 씻고 온나. 얼굴하고 손하고 뽀득뽀득 씻거라.”
할매가 승민이를 보며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할매, 고기 있나?”
“고기 없다. 없는 집 사는 아가 와 맨날 고기 찾고 캐쌌노. 오늘부터는 나물캉 밥 무라.”
“할매, 고기냄새 난다. 고등어 아이가?”
연탄 아궁이 옆 한 켠에 비닐봉지로 곱게 싸여진 생선덩어리에서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니 물 꺼 없다. 아지아 꺼다.”
“나도 물래.”
“씻고 오라카이. 밥 하마 멀었다 안 카나.”
승민이는 우물가로 가 고무대야에서 물 한바가지를 펐다. 작은 양철대야에 물을 담아 얼굴에 찍어 발랐다. 고양이세수였다. 해가 저물고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승민이의 얼굴과 손에 가벼운 한기가 들었다. 거창한 세수를 마친 승민이는 다시 부엌을 찾았다.
“할매 다 씻겄다.”
“뭐 이래 빨리 씻노. 니 또 얼굴에 물만 찍어 발랐재.”
“아이다. 똑바로 했다.”
“물 떨어진다. 방에 드가서 얼른 낯 닦아라.”
승민이는 댓돌 위에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마루로 올라갔다. 어설프게 놓인 신발 한 짝이 균형을 잃고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승민이가 지나간 작은 툇마루에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승민이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는 듯이 문을 밀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방 안은 단촐했다. 커다란 장롱과 낡은 흑백TV수상기가 하나씩 있었고 승민이 책장이 하나 있었다. 장롱 앞에는 담요와 이불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담요는 두터웠지만 이불은 실팍했다. 일교차가 커질 무렵이라 할매는 어떤 이불을 내야할 지 고민하다 며칠간 실팍한 이불을 덮어보고 날이 더 쌀쌀해지면 두터운 것을 내놓기로 했다. 책장에는 어디선가 주워온 듯해 보이는 낡은 백과사전 전집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책의 양장 껍데기 모서리가 낡아 보풀이 일었다. 승민이는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표제의 백과사전 한 권을 꺼냈다. 승민이는 틈만 나면 그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자기 전에도,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도. 온갖 기묘한 사건과 인물들이 가득한 신세계가 책 한 권에 들어 있었다. 그 책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어린 승민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UFO납치, 나스카평원의 거대한 그림, 버뮤다 삼각지대, 퉁구스 대폭발사건, 새스쿼치, 네스호의 괴물, 피라미드의 비밀, 폴터가이스트, 인체자연발화, 엑토플라즘, 마녀사냥……. 때로는 섬찟하기도 했지만 잠깐의 섬찟함 뒤에는 뜻 모를 희열이 따라오는 주제들이었다.
오늘 승민이의 눈길을 끄는 항목은 ‘사령술’이었다. 사람을 살려 부리는 부두교의 마술, 중세의 연금술과 관련한 악마소환과 같은 것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책을 읽는 승민이의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밥상 받아라.”
밥이 다 되었는지 할매가 방과 연결된 부엌사잇문을 열고 말했다. 부엌에서는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생선 구운 냄새가 풍겨 왔다.
승민이는 손을 뻗어 할매에게서 밥상을 받았다. 유기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작고 낡은 밥상이었다. 밥상에는 소복하게 담긴 쌀밥 한 그릇, 고등어 꼬리 쪽의 한 토막을 구운 것, 참기름을 섞은 간장 한 종지가 놓여있었다. 배가 많이 고픈 듯 밥상을 받는 승민이의 손놀림이 재빨랐다. 너무 힘을 주었는지 승민이는 문에서 밥상을 끌어당기며 끙하는 소리를 냈다. 종지에서 간장이 살짝 흘러넘쳤다.
“할매는 밥 안 묵나?”
승민이가 할매에게 물었다.
“할매는 여서 나물캉 밥 비비 물란다.”
“할매는 고기 안 묵나.”
“비리서 안 물란다.”
“나물만 무면 맛없는데.”
그러면서 승민이는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할매가 낮에 장에서 사온 고등어는 물이 참하게 올라 고소한 맛으로 꽉 차 있었다. 승민이는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맛있어서 아껴먹다보니 밥 한 그릇을 비울 때까지 고등어 한 토막은 반도 닳지 않았다. 승민이는 곧 부엌으로 밥그릇을 내밀며 소리쳤다.
“할매, 밥 더 도.”
할매는 부엌사잇문 앞에 앉아 플라스틱 양푼 한 가득에 푸성귀들과 찬 밥을 섞어 비벼먹고 있었다. 고등어 구운 냄새가 빠져나간 부엌에는 할매가 나물 비빈 밥과 먹으려 덥힌 된장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할매, 맛있나?”
승민이가 부엌사잇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할매에게 말했다.
“맛 좋다. 니도 한 숟갈 물래?”
할매가 양푼에서 밥을 한 숟갈 퍼서 승민이 쪽으로 내밀었다. 원래 형체를 짐작하기 힘들어 보이는 푸성귀들이 숟가락 위에서 밥알들과 뒤섞여 있었다.
“싫다. 할매나 무라.”
승민이는 코를 벌름거리다 싫다는 표정으로 할매가 내미는 숟가락을 뿌리쳤다.
“나물도 안 묵는 자슥이 어딨노. 조선놈이 나물을 무울 줄 알아야지.”
할매는 전기밥솥에서 밥 한 주걱을 퍼서 승민이의 그릇에 수북히 담아주었다. 밥주걱에 남은 밥풀을 그릇가로 당겨 긁어 밥그릇에는 밥알들이 덕지덕지 엉겨붙어 있었다. 뜸이 잘 든 찰진 밥이었다. 할매는 얼마 전부터 전기밥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기밥솥은 아지아가 대기업계열의 보험회사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받아온 격려품이었다. 할매는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 맛이 연탄아궁이나 석유곤로로 지은 것과는 천지차이라며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녔다.
“우리 강새이, 밥 맛있재? 밥 잘 묵네. 마이 묵고 쑥쑥 커라.”
“할매, 내 다 컸다.”
승민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할매를 쳐다보며 말했다. 딴에는 진지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차례 멀었다. 콩알만한 기, 호랭이가 한 입에 꿀꺽해도 배도 안 차겠다.”
할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서 일어난 주름이 뺨으로 물결쳤다. 이마를 가로지르는 큰 주름 몇 가닥의 골도 따라 깊어졌다. 할매는 여덟 살 난 손자가 자신은 다 컸다고 당찬 주장을 펼치는 것이 우습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숙제는 다 했나.”
“오늘 숙제 없다. 선생님이 받아쓰기 백점은 숙제 안 내줬다.”
“받아쓰기 백점 맞았나. 카믄 할매한테 비줘야지.”
“선생님이 거다 가서 내일 준다 캤다. 내일 가오면 할매 비주께.”
“우리 강새이, 장하다. 얼른 밥 무라. 밥 마이 무라.”
“안 된다. 밥 마이 무면 할매긑이 배 나온다.”
“할매가 배가 어딨노.”
“할매 배 뽈록하다.”
“야야, 늙어서 이래 배 안 나온 사람이 어딨노. 밥이나 얼른 무라.”
할매가 말을 맺고 승민이는 두 번째 밥그릇을 파기 시작했다. 밥솥의 성능이 좋았던지 승민이와 할매가 아옹다옹하는 긴 시간 중에도 밥은 온기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한창 자라는 승민이의 식욕은 대단했다. 미처 다 씻기지 못한 콧물자국 위로 밥알이 들러붙었다. 밥그릇은 곧 바닥을 보였다. 승민이는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승민이가 밥숟갈을 처음 들 때부터 농부의 피와 땀에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며 밥그릇에 밥알을 남겨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수저질이 서툰 승민이는 밥그릇을 깨끗이 만들기 힘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안 보일 때면 밥상을 대충 물려버렸다.
할아버지는 작년, 해를 들어가던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몸을 가누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 이부자리에 비닐을 깔고 생활했다. 소변을 조절하지 못해 매일 이부자리를 적시자 할매가 내놓은 특단의 대책이었다. 눈을 감을 무렵, 거동을 제대로 못하던 할아버지의 등은 온통 욕창투성이였다. 승민이는 소변과 진물 냄새가 싫어 할아버지 근처에 가지 않았다. 승민이는 한 동안 아지아 방에서 생활했다. 엄마와 할매는 냄새에도 꿋꿋하게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썼다. 오랜만에 내린 눈을 맞으며 승민이가 동네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몇 시간 뒤에야 승민이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민이는 사람이 죽는다는 게 뭔지 잘 몰랐다. 다시 할아버지를 못 본다는 막연한 상실감을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은 승민이는 제대로 처리할 줄 몰랐다. 그냥 할매도 울고, 아지아도 울고, 엄마도 울길래 따라 울었다. 담 너머로 친구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면 울다가 뛰쳐나가 함께 놀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평소에 못 보던 친척들이 찾아와서 신났다. 친척들은 승민이를 볼 때마다 용돈을 주었다. 승민이는 사람들이 집에 많이 오는 게 좋았다. 동네사람들은 생전 할아버지의 인품을 회자하며 돌아가실 때도 시간 끌면서 사람 골탕 안 먹이고 순하게 잘 가셨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지아와 엄마는 끅끅거렸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냄새는 방에서 한 동안 빠지지 않았다. 승민이는 그 뒤로 밥그릇을 깨끗하게 훑었다.
할매가 부엌정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부엌사잇문을 오르며 할매는 영차하는 소리를 냈다. 버선바닥과 몸빼바지 아랫단이 젖어 있었다. 문지방으로 스친 물자국이 남았다. 승민이는 텔레비전 앞에 얼굴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은 아직 광고 중이었다. 화면이 시원찮게 나오자 승민이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텔레비전 왼쪽을 탕탕 소리나게 쳤다. 그러면 화면이 깨끗하게 바뀌었다.
“만화도 끝났는데 니 머 보노. 내일 학교 갈 준비물은 다 챙깄나?”
“내일 체육복 입고 가야 된다.”
“체육복 오늘 낮에 빨아서 덜 말랐다. 지금 가서 억이 꺼 빌리 온나.”
“할매, 억이 아직 학교 안 댕긴다.”
“카믄 옆에 가서 선해 누나 꺼 빌리 온나.”
“선해 누나 꺼? 여자 꺼 입기 싫다. 아들이 놀린다. 그냥 젖은 거 입고 갈란다.”
“여자낀지 아인지 아들이 우예 아노.”
“이름 써 있잖아.”
“야야, 덜 마른 거 입으면 안 된다. 감기 걸린다. 여름 다 지나서 이제 아침저녁으로 춥다.”
“괘안타. 내 튼튼하다.”
“카믄 내일 아침에 보고 다 말랐으면 입고 가라. 요새 밤중에 바람이 차바 가꼬 빨래가 잘 안 마를낀데. 고마 체육복만 방 안에 너 놔야겠네.”
저녁 바람이 들어 문짝이 조금씩 덜컹거렸다. 확실히 해가 지고 난 뒤의 기온은 낮보다 한참 차가웠다. 문풍지에 숭숭 난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희미한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할매 문에서 이상한 소리난다. 무섭다.”
“니 또 문짝에 빵꾸 냈재.”
“아이다. 저거 지가 맘대로 빵꾸 난기다.”
“지 맘대로 빵꾸나는 기 조선 천지에 어딨노. 니가 자꾸 문짝 손가락으로 쑤시니까 그런 거 아이가. 내일 문종이 짤라서 빵꾸난 데 풀로 붙이라.”
“아지아가 문종이 새로 바르면 되잖아.”
“아지아 바쁘다. 저거 할 시간이 어딨노.”
승민이가 유치원을 다닐 적때 까지만 해도 대학생이던 아지아는 승민이랑 곧잘 놀아주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아지아는 그 뒤로 승민이와 마주하기 힘들었다. 아지아는 매일 밤 늦게 들어왔다. 아지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할매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아지아를 반갑게 맞았다. 늦은 밤에도 마다 않고 언제나 할매는 아지아에게 밥상을 차려다 주었다.
“아지아는 언제 오노?”
“니 자면 온다.”
“아지아인데 전화 해서 맛있는 거 사오라 캐라.”
“밤 중에 어데서 맛있는 거 사오노.”
“엄마는 먹고 싶다 카면 사다 줬다.”
“엄마 없다.”
할매가 짧게 말을 끊었다.
“…….”
할매는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폈다. 승민이가 새초롬하게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일찍 자라.”
“수사반장 보고 잘끼다.”
“그거 아들 보는 거 아이다.”
“우리 반 아들 다 본다. 억이도 그거 본다. 안 보면 빙시다.”
“일찍 자라. 뉴스에서도 아들보고 일찍 자라 안 카나.”
“뉴스 아홉시에 한다. 아홉시에 잘란다.”
“카믄 아홉시 땡치면 자그라. 뉴스에서 자라카는 소리나오면 눈 딱 붙이고 자라. 아침일찍 벌떡 일나서 국민체조 함 하고.”
“국민체조 내일 체육할 때 한다.”
“맞다. 니 체육복 방 안에 너 놔야재.”
이부자리를 곱게 펴던 할매는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처마 밑에서 아직 축축한 체육복을 걷어 와 이부자리 옆에 깔았다. 젖은 빨래비누 냄새가 살짝 퍼지다 멎었다. 할매가 방귀를 꼈다.
“아, 할매애, 방구 싫다.”
“맛 좋재? 할매 방구는 꿀밤 맛 난데이.”
“냄새 싫다. 할매 싫다. 방구 싫다.”
“할매 싫나, 그라면 니 놔두고 할매 어디 도망가뿌까? 그래가꼬 니 집에 혼자 있으면 꼼지보고 잡아가라 캐야지.”
“괘안타. 아지아 있다.”
“아지아는 할매 아들인데 같이 도망가자 카면 되지.”
“안해. 꼼지 싫다. 가지마라 할매.”
“내일 니 학교가면 할매 짐싸가꼬 도망가고 없을 끼다. 할매 찾지 마래이.”
승민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거운 것이 가슴을 타고 눈까지 치밀어 올랐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새 나왔다. 승민이는 입술을 앙 다물고 눈물을 참으려 용썼다.
“니 우나?”
“안 운다.”
승민이가 울먹이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조금씩 얼굴을 덮으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서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와? 할매가 진짜 니 내삐리뿌고 도망갈까봐?”
“할매 어데 가면 안 된다.”
승민이가 할매 가슴팍에 폭하고 안겼다. 할매가 위에 입은 쥐색 스웨터 때문에 까실까실한 게 얼굴에 느껴졌다. 하지만 따뜻했다.
“할매가 가긴 어데 가노. 우리 강새이 여 두고 어데 가노.”
텔레비전에서 익숙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흑백화면에 수사반장이라는 하얀색 제목이 떴다. 수사반장이 시작하면 동네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이 조용해졌다. 종종 눈치 없이 짖다가 방 안에서 주인아저씨가 집어던진 냄비뚜껑에 맞은 개들도 있었다.
“할매 수사반장 한다.”
할매 품에서 칭얼대던 승민이가 낯익은 음악을 듣자마자 고개를 텔레비전쪽으로 돌렸다. 할매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쾌한 노래가 흐르는 광고가 몇 지나가고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밤중 외진 길에서 자동차가 누군가를 치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쓰러진 피해자는 달아나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맥없이 바라보다 숨을 거두었다. 오늘의 내용은 뺑소니운전자를 추적해서 잡는 것이었다.
“하이고, 저런 천하의 나쁜 자슥이 어딨겠노.”
할매는 첫장면을 보면서 혀를 끌끌거렸다.
“할매, 교통사고가 뺑소니가?”
“뺑소니는 저래 사람 찧가놓고 도망가는 기다. 바라. 못 배우면 저래 사람 직이고 도망댕긴다카이. 승민이 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 되지 말그라.”
“알았다. 공부 열심히 하께.”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누다 곧 텔레비전에 빠져들었다. 뺑소니 사고의 범인은 잘나가는 부잣집의 철없는 아들이었다.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덜덜 떨다 사고낸 차량의 재도색을 의뢰한 카센터 주인의 신고로 덜미가 잡혀 수사반에 검거되었다. 범인은 자신이 친 피해자가 공장에서 어렵게 돈을 모아 동생 학비를 대던 여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깊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이튼 있는 집 아들이 문제라카이. 돈 있다고 버릇없이 오야오야 길러싸이…….”
오늘이 수사반장이 할매에게 던져 준 교훈은 그런 것이었다. 할매는 혼자 중얼거리다 승민이를 쳐다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강새이는 우째 이래 이쁘겠노. 할매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할매, 내 이쁘나?”
“하모, 우리 강새이가 세상에서 젤로 이쁘재.”
“그런데 할매 와 내보고 자꾸 강새이라 카노. 내가 개가.”
“이쁘니까 강새이라 카지. 못난 거 보고 어데 강새이라 카겠노.”
막 9시 뉴스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9시 뉴스가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한다는 나레이션이 흘러 나왔다. 나레이션 뒤 나온 시계 화면에서 초침이 정확하게 9시를 가리키자마자 앵커가 등장해 대통령의 금일 동정에 관한 소식을 말했다.
“뉴스 재미없다. 딴 데 보자.”
“딴 데 뭐 할라꼬. 볼 꺼 없다. 자자.”
“카면 할매, 불 꺼도.”
승민이가 텔레비전으로 다가가 전원스위치를 돌렸다. 검은 고깔모양의 스위치를 왼쪽으로 돌리니 화면이 팍하는 소리와 함께 빛을 감추었다. 할매는 벌떡 일어서서 방한가운데 달랑달랑 매달린 전등을 잡았다. 백열전구의 뜨거운 온기가 할매의 손목에 전해졌다. 전등에는 전구가 두 개 달려 있었다. 빨갛고 작은 딸기모양의 전구와 백열전구. 할매는 작은 전구를 켜고 백열전구를 껐다. 환하던 방안이 붉게 어두워졌다.
승민이는 먼저 이불 속에 쏙 들어가 있었다. 할매도 승민이를 따라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바람에 문이 또 덜컹댔다. 밤이 점점 짙어지자 바람도 거세졌다.
“할매, 바람 씨다. 무섭다.”
“사내 자슥이 불알달고 무섭다 카믄 되나. 한 개도 안 무섭다.”
“무섭다. 할매가 문 쪽 보고 자라.”
그러면서 승민이가 몸을 들어 할매를 타고 넘어갔다. 할매는 승민이가 베던 베개로 머리를 옮겼다. 승민이가 잠자리를 바꾸자 덜컹대던 문이 조용해졌다. 승민이는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 돌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매 자나?”
“아직 안 잔다. 니는 퍼뜩 안 자고 뭐 하노.”
“잠 안 온다.”
“일찍 자고 일찍 일나야지.”
“할매, 할매 찌찌 만지고 자면 안 되나.”
“다 큰 기 할매 젖은 와 만지노.”
“할매 찌찌 좋다.”
“다 늙은 할매 젖이 머가 좋노.”
승민이는 할매의 옷섬으로 한 손을 집어 넣고 젖을 찾았다. 위치를 대충 잡은 승민이의 손이 할매의 젖을 살짝 거머쥐었다. 할매의 젖은 탄력 없이 물컹물컹했다.
“야야, 아프다. 살살 만지그라.”
승민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할매의 젖을 계속 주물거렸다. 승민이의 눈빛이 조금씩 깊어졌다.
“할매, 사람 죽으면 못 살리나?”
“사람이 함 죽으면 끝이재. 우예 살리노.”
“아까 책에 보이까 죽은 사람 살리는 거 나오던데.”
“그런 기 어딨노. 저승사자가 델꼬 가면 다시 못 온다.”
“외국에는 살릴 수 있다 카든데…….”
“여가 외국이가.”
“아이다.”
“…와 니 엄마 보고잡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반년 정도가 지난 때 였다. 꽃집에서 일하던 엄마는 근처 상가에 꽃바구니를 배달하고 오던 길에 차 사고를 당했다. 사람과 차가 함께 다니는 도로를 무심결에 질러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 그는 애인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설 참이었다. 그가 애인을 옆에 태우고 들떠서 전방주의를 소홀히 했던 틈에 엄마와 차가 부딪쳤다.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차가 바로 멈췄더라면 엄마는 경미한 찰과상 정도로 끝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엑셀 페달을 밟는 바람에 엄마는 차 앞 범퍼와 도로 사이에 끼인 채 수십 미터를 끌려갔다.
엄마의 몰골은 참혹했다.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한참 더워지는 시기라 여기저기 벗겨진 피부가 쉽사리 낫지 않았다. 몸 안의 뼈는 으스러져서 조각들이 장기를 훑고 다녔다. 엄마는 누워서 눈도 제대로 꿈뻑이지 못하고 사고난 지 한 달이 채 못 돼 숨을 거두었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어린 승민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어른들은 승민이와 엄마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승민이는 엄마가 곧 나아서 돌아올 거란 할매의 말을 믿고 있다가 한밤중에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승민이는 저번과 다르게 누가 운다고 해서 따라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 때는 막연했던 상실감이 이번에는 가슴속에서부터 확실하게 끓어올랐다.
승민이는 사흘 밤낮을 울었다. 울다 자고 자다 울었다. 친구들이 노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건을 쓰고 엄마의 상여를 따라가며 울고, 엄마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갈 때 또 울었다. 웃으며 문상객들을 받던 할매는 관 위로 첫 삽을 던질 때 결국 실신해버렸다. 그 후 몇 달간 할매는 종종 자다 일어나서 울었다. 울 때 마다 할매는 내가 죄 많은 년이라며 가슴을 때렸다. 그러면 승민이도 자다 일어나서 따라 울었다.
엄마가 죽고 승민이는 처음으로 아빠 얼굴을 보았다. 사망보험금 문제였다. 아빠는 승민이를 바로 데려가겠다 했지만 승민이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할매와 같이 살 거라며 방 안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어쩔 수 없이 아빠는 승민이가 철이 들 때까지 돌봐달라고 할매에게 부탁했다.
“외손자는 우야든 넘 집 자슥인데…….”
매번 그렇게 말하면서도 할매는 승민이에게 끔찍했다.
눈빛이 깊어지다 승민이는 활짝 힘찬 표정을 지었다.
“괘안타. 이제 엄마 별로 안 보고 싶다. 할매캉 있으면 된다.”
“…….”
“할매 어데 안 가는 거 맞재?”
“할매 늙어서 갈 데 없다. 승민이 니캉 주욱 살아야재.”
“진짜재? 그라모 할매 내 장가갈 때 까지 딴 데 가지 말그래이.”
“니 장가가면 할매 죽고 없다.”
“안 된다. 할매는 죽으면 안 된다. 오래 살아야 된다.”
“알았다. 할매 안 죽고 승민이 니 장가가는 거 꼭 보꾸마.”
승민이가 할매의 젖을 힘주어 쥐면서 몸을 할매 쪽으로 바짝 붙였다. 승민이 머리카락이 할매의 주름진 볼을 긁었다.
“할매 내 꿀밤묵 해도.”
“꿀밤묵?”
“내가 꿀밤 주우 오께. 묵 해도.”
“니가 우예 꿀밤 주 올래. 꿀밤 우예 생긴 지는 아나.”
“안다. 쪼매난 거 그거 안다.”
“치아라. 니 암만 주우도 묵 몬한다. 어느 천년에 니 줍는 거 바랍고 앉았겠노.”
“내 마이 주우 올 수 있다.”
“니 꿀밤묵 맛은 아나?”
“안다. 가을에 할매가 만든 꿀밤묵, 엄마가 맛있다 캤다.”
“엄마가 언제 캤노?”
“내 어릴 때 캤다.”
할매는 매년 꿀밤묵을 만들었지만 작년에는 만들지 못했다. 승민이 엄마가 세상을 떠난 터라 경황이 없었다. 경황이 없다보니 만들 철을 놓쳤다. 할매가 경황을 찾은 때는 한겨울이었다.
“니 알라 때 엄마가 칸 거 기억나나?”
“엄마가 할매 꿀밤묵 맛있다고 맨날 캤다. 할아버지도 맛있다 캤다.”
“할매 늙어가꼬 꿀밤묵 몬 한다. 디다.”
“내 도와주께.”
“니캉 내캉 아지아 이래 셋 뿐이 없는데 만들면 누가 묵노.”
“내 다 물 수 있다. 남으면 선해누나야집에 주면 된다.”
“니 진짜 먹고 싶나?”
“응. 해도.”
“카믄 니 내일 할매캉 산에 꿀밤 주우러 가자.”
“알았다. 내 내일 학교 끝나면 바로 뛰 오께.”
“오야, 이제 고마 자자.”
방문 너머 멀지 않은 곳에서 개구리가 울었다. 먼 곳에서는 개 몇 마리가 돌아가며 컹컹거렸다. 뒷산 위로 달이 걸려 있었다. 차진 않았지만 밝은 달이었다. 가끔 조각구름 몇이 달 앞을 가리며 지나갔다. 구름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높고 깨끗한 밤하늘이었다. 내일은 꿀밤 줍기 좋은 날일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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