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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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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위장 절제 수술’ 라이브 상영이 있었다는 뉴스를 봤어. 과체중 환자의 위장을 절제하는 수술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생중계되고, 외과의사 한 명이 화면 아래 자리 잡고 앉아 관객에게 설명을 해주는 거야. 무성영화의 연사처럼.
관객이 질문하면 대답도 해주고,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 목소리가 나오기도 해. 거기 듣고 있지? 이거 보이지? 이게 지방인데 이제 지질 거야~, 찌지직...
위장 절제술이 의학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리려는 목적이라고 하더라. 관람석에는 의사나 간호사 같은 의료인도 있고, 비슷한 문제를 가진 환자들도 있어.
가끔 이런 이벤트를 하는 모양이야. 병원에서 주관하는데, 이식 수술이라든가 좀 사회적으로 관심 있는 큰 수술 있잖아, 보통사람들도 그 과정을 다 볼 수 있도록 공개수술을 하는데, 텔레비전으로 심장수술 생중계하는 것도 본 적 있거든. 스튜디오에 의사가 나와서 수술 실황을 설명해주고 그러더라. 텔레비전 방송보다는 주로 극장에서 상영하는데, 병원 강당 같은 데서 스크린 상영하는 게 아니라, 일반 영화관에서 하는 거야. 수술 극장 상영이라니, 참 진기한 풍물이로세...생각하다가...그림 하나가 떠올랐지.
▲ 니콜라스 튈러프의 해부학 강의(De anatomische les van dr. Nicolaes Tulp), 1632,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러프라는 외과의사가 시체 해부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스물여섯 살의 젊은 렘브란트가 처음으로 그린 단체초상화이기도 해.
때는 1632년 1월 16일, 의사 니콜라스 튈러프가 핀셋으로 힘줄 하나를 집어 올리고, 동료 외과의사들이 튈러프의 설명을 들으며 상기된 얼굴이지. 튈러프를 비롯한 이 외과의사들은 암스테르담의 외과의사 길드 조합원들인데, 이 길드에서는 한 해에 한 번, 공개 해부학 강의를 열었어. 이 장면을 렘브란트에게 의뢰해서 마치 기념사진처럼 그림으로 남겼고, 자기들 길드 사무실에 걸어놓은 거야.
그때 네덜란드에는 ‘단체 초상화’라는 장르가 생겨났거든. 스페인도 물리쳤고, 경제도 번창하고, 동인도에서 온갖 진귀한 물건들도 배에 가득 실려오고, 튤립에 투기도 하고 그럴 때야. 세계 역사에서 가장 오래간 호황기가 바로 네덜란드의 이 ‘황금시대’라고 하지? 졸부가 된 사람도 많아졌고, 귀족이나 봉건 토호가 아니라 무역이나 장사로 큰돈을 만진 사람들이 신흥귀족이 되던 때였어.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그림의 수요자도 늘어났고, 그러다 보니 이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큰 화가들이 많아.
당시 영국 외교관인가 하는 사람이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가서 쓴 기록에 보면, 그 나라에는 집집이 그림이 걸려 있고, 여염집 사람들이 시장에서 그림을 사가더라, 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거든.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 왕이나 귀족의 초상화가 아니라 보통사람들, 사회지도층이 된 시민계급, 돈을 좀 만지게 된 상공인들이 그림의 수요자가 된 거지. 그림 주제도 수요자의 입맛에 맞게 다양해지는, 그런 시장이 생겨난 거야. 주문제작이 아니라 그린 다음 시장에 내놓는 형태로 바뀌어가는 거지.
그래서 이때 그림의 ‘장르’라는 게 막 생겨나.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그림을 분류할 만큼 주제가 다양해진 거지.
단체초상화도 그 장르 가운데 하나였어. 암스테르담같이 잘 나가던 도시에는 외과의사나 직물 기술자 같은 ‘전문직’ 기술인들이 길드를 만들어 일했는데, 이들이 단체초상화의 고객들이었지.
렘브란트의 다른 그림 <야경>도 원래 이름이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과 빌럼 판 라위턴뷔르흐 조장의 경비대>인데, 이 이름도 어려운 남자들이 이끄는, 암스테르담 민병대원들의 단체 초상화야.
튤립 의사
그림의 주인공임을 알려주듯 혼자 모자를 쓰고 있는 니콜라스 튈러프(Nicolaes Tulp). 원래 이름은 클라스 피터르스존(Claes Pieterszoon)인데, ‘피터르의 아들인 클라스’라는 뜻이야. 짐작하다시피 이때 네덜란드에는 아직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고, 어디 출신이라거나 누구의 아들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를 때였어.
이 ‘피터르의 아들인 클라스’는 레이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꽤 잘나가는 의사가 되었지. 곧, 시 행정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그때 자기 성을 튈러프(Tulp)로 정하고 이름도 ‘클라스’에서 ‘니콜라스’로 바꾼 거야. 튈러프(Tulp)는 ‘튤립’의 네덜란드 말이거든. 이 꽃봉오리를 자기 가문의 문장으로 쓰기 시작했고.
튤립 가격이 ‘전고점’을 찍었던 1637년에 알뿌리 하나가 장인 한 명의 연 수입의 열 배가 넘었다고 하거든. 묻지마 투자와 거품질의 원조라고 해도 될만한 이 ‘튤립 광기’가 난리도 아니던 그때 암스테르담에서 ‘튤립’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였을지 한 번 상상해봐.
그래도 성을 ‘튤립’으로 한다니 좀 이상하게 들리지? 뭐 따지고 보면 이 정도면 아주 고상한 거고, 정말 요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성들 많거든. 튤립은 꽤 신경 써서 지은 이름이지. 지향점도 분명하고.
자신을 스스로 튤립이라 부른 이 사내는 임상기록을 정리한 의학책을 쓴 의사로도 유명해. ‘플라시보 효과’가 아직 알려지기 전인데 이 내용도 담겨 있다고 하네. 사회적으로도 성공가도를 걸어서 나중에 암스테르담 시장을 오래 지낸 사람이야.
튤립 의사뿐만 아니라 그림 속의 다른 의사들도 그 이름이 다 나와 있는데, 옛 그림 속 인물들이 누구였는지 이름이 남아 있으니까, 상상하게 되잖아. 그들도 나름대로 한 시절을 풍미했을 텐데, 그림 제목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냥 배경이 되어버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 아리스 킨트
그런데 그림 속 또 하나의 인물, 그러니까 해부용으로 쓰인 저 시신의 신원도 남아 있더라. 아리스 킨트(Aris Kindt). 1600년대의 이 인물을 구글링하면 신원이 쭉 나와. 본명은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존(Adriaan Adriaanszoon), 41세. 레이던 출신. 연쇄 노상강도죄로 사형선고 받음. 교수형에 처한 다음 날, 렘브란트에 의해 그림으로 남겨짐.
해부학 공개 강연
튈러프는 1628년에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길드의 ‘해부 강연자’로 지명되었어.
‘시 공식 지정’ 직책인데 의사를 포함한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니 교수라고 해도 되겠지. 암스테르담의 겨울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부를 해 보이는 이벤트가 있었어. 더운 여름에 해부하기는 좀 그렇지.
외과의사 일을 예전에는 이발사가 했었거든. 그러다가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의학도 체계화 되어가고, 이발사가 칼 들고 사람 아픈 데를 도려내는 게 아니라 사람 몸이 어떻게 생겼나 알아갈 때잖아. 르네상스를 거치며 신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지로 이제는 인체 해부까지 하게 되었으니, 아주 진귀한 구경거리였던 거지.
그런데 이런 공개 해부 강좌에 실습용 시신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당시에 의학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하는 문화도 없었을 테고. 해서, 교수형을 당한 시체를 썼는데, 반드시 남성 범죄자의 시신이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대. 해부는 시 지정 ‘해부 강연자’만 할 수 있었고. 굉장한 명예였던 거지. 한 해에 한 번 열리는 이 해부 라이브 쇼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옷도 잘 차려입고, 입장료도 냈대.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사람 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식인뿐만 아니라 중산층 사람들도 교양인이 되고자 이 해부학 공개 강의장을 찾곤 했던 거지.
▲ 17세기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의 해부 강의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의사 길드 사무실은 나중에 계량소(Waag)가 된 건물에 있었는데, 거기에 극장식으로 된 해부실도 있었대. 암스테르담에서 홍등가를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니우 마르크트(Nieuwmarkt)에 이 계량소 건물이 지금도 있어. 지금은 카페야. 렘브란트의 이 그림도 이 건물 어딘가에 걸려 있었겠지. (지금은 헤이그 마우리츠 미술관에 있음)
▲ 카페 ‘계량소에서(In de Waag)’
렘브란트
이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어.
렘브란트의 본명은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풀어 쓰면, ‘라인 강의 하르먼의 아들인 렘브란트’라는 뜻인데, 렘브란트 가족이 레이던에 있는 라인 강가에서 살았거든.
렘브란트의 성은 판 레인(van Rijn)인데 그림에는 저 긴 이름의 첫 자에다 고향 레이던(Leiden)을 붙여 RHL로 서명을 하곤 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RHL이 아니라 그냥 ‘렘브란트’라고 적기 시작했는데, 어떤 단단한 마음이 그리 만들었겠지?
이 그림이 바로 렘브란트가 자신을 ‘렘브란트’라고 선언한 첫 그림이야. 그림 뒤 약간 왼쪽 배경을 보면Rembrandt f[ecit] 1632라는 서명이 보일 거야.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를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측도 하는데, ‘판 레인’ 이라는 성보다 이름만 쓰는 게 훨씬 임팩트가 있지. 빈센트 반 고흐도 그냥 ‘빈센트’라고 썼듯.)
▲ 렘브란트 서명
의사들의 단체초상화이지만, 아리스 킨트의 저 팔 있잖아, 해부학적으로도 꽤 정확하다고 해. 렘브란트가 레이던 대학 물도 조금 먹었고, 라틴어도 배운, 그러니까 좀 배운 사람이었거든. 해부학 책을 보고 고증을 철저히 했을 거로 추측하는 모양이야. 아리스 킨트의 발밑에 있는 베살리우스의 <인체 구조론> 말이지. 당시 필수 교양 도서였다는.
튈러프가 아리스 킨트의 팔 하나를 들고 있잖아? 보통 해부할 때, 몸통에서부터 시작한다는데,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말이 많대. 튈러프가 베살리우스를 참조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어. 베살리우스(1514-1564)는 해부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브뤼셀 사람인데 튈러프도 베살리우스의 해부 방법을 추종했다고 하지.
▲ 해부학의 창시자, 베살리우스
렘브란트 이전에도 물론 단체 초상화가 있었어. 그런데 다들 인물들을 한 줄로 쭉 세워놓거나, 근엄한 표정과 뻣뻣한 목을 치켜세운 모습을 담았지. 예를 들면 이런 식.do
or
▲ 열두 명의 할렘 성지순례 형제회원들, ca. 1582, 얀 판 스코럴(Jan van Scorel)spotlicht d geheel in een dramatisch licht zet. Zo bracht hij actie en in decompositie.
우리도 옛날엔 단체사진 찍을 때 저랬었잖아. 그런데 렘브란트는 사람들을 흐트러뜨리고 움직이게 해서 그의 인물들은 모두 다른 동작과 표정을 짓고 있지. 초상화도 점점 자연스러워져 가는데, 프란스 할스에 이르면 너나 할 것 없이 씩 웃거나 심지어는 술 한 잔 걸친 발그레한 얼굴이 돼.
그리고...
해부학 강의 라이브 관람, 자연과학에 대한 사회의 관심,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 제 이름을 선언하는 개인, 이런 점이 난 흥미로웠거든.
그런데 뭔가 마음 저 깊이 흔들리는 게 있지. 아리스 킨트라는 저 인물 때문인 것 같아. 렘브란트의 힘이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뭐라고 꼭 꼬집어 말을 못하겠는데, 당시 사람들을 움직이던 것들, 의사·중산층·사형수라는 계층, 경제적 풍요, 과학, 지적 호기심, 그 모든 것이 고요하고 은근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느낌. 튈러프 의사의 자신만만한 태도, 동료 의사들의 표정, 아리스 킨트의 팔과 해부학 책을 날카롭게 들여다봤을, 젊은 시절의 렘브란트.
빛 때문일까?
아리스 킨트는 저기서 주인공일까, 배경일까?
튈러프 의사는 그림의 주인공이면서 배경으로도 보여.
보여주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그 모두를 그려낸 사람. 담백하고 건조함. 과잉 없는 어떤 휴머니즘, 이런 생각이 스친다.
거의 사반세기 뒤에 렘브란트는 의사 길드 주문으로 그림 하나를 더 그리거든. 튈러프가 암스테르담 시장이 되고 나서 그 자리를 물려받은 데이만 의사의 해부학 강의 장면인데, <데이만 의사의 해부학 강의(De anatomische les van Dr Joan Deyman)> 라는 이 그림은 ‘의학 제단화’라고 불릴 정도로, 시신을 마치 예수처럼 그렸어. 이 그림도 얘깃거리가 많은데...한번 비교해서 봐봐.
▲ 데이만 의사의 해부학 강의(De anatomische les van Dr Joan Deyman), 1656,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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