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으나 사실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심증은
99.9%로 거의 확실하다. 그럼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
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 |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
(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
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
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
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
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에 의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 |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산서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
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
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
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
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
의 한족(명나라)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주역사신보에서 http://cafe420.daum.net/_c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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