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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존 쿳시(Coetzee)가 1999년에 발표한 소설.
추락으로 번역된 원제 Disgrace는 추락/전락/치욕/불명예/모멸의 뜻을 담고 있는데, 과연 무엇이 모멸 당하고, 추락했는지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공의 백인은 그 조상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네덜란드 이주인들이 대다수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본토에서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80년전쟁을 하며 국가 형태를 갖추어가고, 나라밖에서는 동인도회사라는 독점기업을 통해 해외시장을 개척하던 때였다. 당시에는 새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 시장 개척이요, 곧 전쟁이었는데, 17세기 중반에는 스페인에서 독립도 하고, 황금시대를 열어가던 네덜란드인들은 남아공 항로를 개척하고,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식민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때 네덜란드에서 온 정착자들을 보어인이라고 하는데, 쿳시(Coetzee)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보어인의 후손이다. (Coetzee는 ‘쿠트제이’라는 네덜란드 성)
※ Boer: ‘부어'는 네덜란드말로 ‘농부’라는 뜻.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도 함. 초기의 동인도회사의 식민주의자들과 이후 개신교도 이민자들. 원주민을 몰아내고 오렌지 자유국과 트랜스발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후 보어전쟁을 거쳐 영국의 식민지가 됨) 남아공 출생 백인을 일컫는 말로 많이 씀.
※ Apartheid: 아파르트헤이트도 '분리'라는 뜻의 아프리칸스.
apart + heid(명사형어미). 이 단어는 네덜란드말이기도 함. 케이프타운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까지 나섰고, 19세기 초에는 영국의 손에 넘어갔는데, 항로의 기지로나 쓸 줄 알았던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견되자 난리가 났다. 식민주의자들과 현지인의 대립, 식민주의자 안에서도 보어인과 영국인의 전쟁. 이후 기나긴 아파르트헤이트의 시기를 지나 90년대 들어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되었고, 1994년 남아공 최초로 흑백연합정부가 들어섰다. 남아공 정부는 투투 대주교를 중심으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고, 사면과 보상을 하며 과거사를 정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 그렇듯, 쿳시의 《추락》도 그 시대적 배경을 알고 보면 더 감칠 맛 나고, 모르고 봐도 그 자체로 근사한 작품이다.
1.
소설의 배경은 아파르트헤이트가 형식적으로 사라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과 화해 위원회 활동이 마무리 되던 즈음이다.
농지의 팔할 이상을 백인이 소유하고 있고, 사회질서나 윤리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사회. 원래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오랜 착취를 끝내고 정권을 세웠다고 해서 이 질곡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담담하게 골라내기만 하면 진실이 밝혀지고 화해가 되는가.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가.
케이프타운의 대학교수이자 백인인 데이비드 루리는 학생과의 스캔들로 추락 (disgrace)에 직면하게 된다. 학교당국은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면 구명해주려고 했으나 데이비드는 거부하고 ‘추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그 대가를 받겠으나, 당국이 내 개인의 고백이나 참회까지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늘 선량한가, 가해자는 악인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까지는 나는 데이비드에게 감정이입해서 봤다.
실직한 데이비드는, 농장을 꾸리며 살아가는 딸 루시에게로 자발적 망명을 하는데, 백인이자 미혼여성인 루시가 흑인 농촌 사회에서 겪게 되는 치욕(disgrace)을 목도한다. 그리고 데이비드와는 다른 태도로 그 치욕을 대하는 딸과
갈등한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루시는 왜 그 치욕을 역사를 통해 받아들이려 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왜 끝내 ‘단념’하고 마는가?
2.
그러나 이 소설이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뒤틀린 이야기, 백인 지식인의 자아비판쯤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오해. 그렇다면 문학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정치소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지우고 봐도 좋다. 한 중년남자의 삶이 어떻게 혼돈으로 치닫는지,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따라가는 맛이, 잘 짜여진 한편의 영화같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 도입부에서 데이비드 루리의 성생활로 시작할 필요는 없었겠지.
3.
그래서 섹스가 중요한 문제인데, 게다가 데이비드 루리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교수다. 딸 루시의 측면에서도, 섹스는 하나의 화두. 골치 아프지만, 섹스의 정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4.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지만 데이비드 루리는 사실 워즈워드와 바이런의 시를 품고사는 남자다.
바이런은 영국 사회의 검열을 피해 자발적 망명을 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억누르고 살 필요가 없는 곳으로. 1816년, 스물여덟살의 바이런은 영국을 떠나 돌아가지 않았다.
동물보호소에서 일하고 와서, 잠 못드는 데이비드는 바이런이 쓴 편지를 읽는다.
뚱뚱하고, 서른 둘 먹은 바이런은 늙다리 남편이 있는 여인,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젊은 테레사를 사랑하여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곁에 머문다.
서른 다섯이 되던 해, 바이런은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그리스로 가서 영웅이 된다. 오트만 제국에 맞선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는 '삶의 소중함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나이'라고 말하는데, 둘 다 제대로 낭만주의자들이다.
이탈리아 라벤나의 여름 열기, 늙은 남편의 질투어린 감시, 감옥에 갇힌 듯 느끼는 테레사. 바이런은 그녀를 다른 삶으로 데려갈 수 있을 지 회의한다. 내뱉기엔 너무 신중한 생각들. 둘이 처음 가졌던 그 환희가 되풀이 될 것인지 바이런은 자신이 없다. 열정적인 젊은 여인, 한때 열정적이었으나 지금은 다소 누그러진 나이든 남자.이것이 데이비드가 쓰고있는 오페라의 내용이다. 공권력이나 법이라는 문명이 아니라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농촌의 질서, 여성과 백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이라는 야만이 데이비드가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서 그 증오를 해결할 수 없다는 루시의 태도가 현실적인 것일까? 땅을 일구고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는 루시의 꿈이 낭만적인 것일까?
5.
쿳시의 소설은 처음인데, 아주 잘 읽힌다. 간결한 문체도 딱 맘에 들고, 빠른 전개도 좋다. 구성이 치밀하다는 것. 긴장감이 넘치고 이야기에 빨려들지만, 중간중간에 책장을 잠시 덮고 심호흡을 하게 된다.
끝내고 나서도 뭔가 소화되지 않은 이 느낌.
이게 현실이구나 하고, 체한 듯한 기분이지만,
다시 쿳시의 다른 작품을 찾아 클릭 클릭~
*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추천합니다.
* 출판사 리뷰 등 줄거리를 미리 읽지 않고 보길 권합니다.
* 영화로 만들면 딱이겠다 싶었는데, 벌써 나와있군~ ▽영화 포스터 
▽ 서평지원비 신청용 인증샷
10.95유로되겠습니다...만 동일기준을 적용해야하니깐,
한국 판매정가로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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