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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테드 휴즈는 1998년, 아내 실비아 플라스와의 추억을 담은
시 88편, 『생일편지』를 펴냈다. 플라스가 죽은 지 35년이 지났고, 휴즈가 암으로
죽은 해였다. 휴즈는 자신의 병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문학을 공부한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1955년 스미스 대학을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생이 되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공부하러 갔다.
스물셋 즈음이었다. 그녀가 영국에 도착한 지 3개월쯤 지난 이듬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문학잡지 출판 기념식장에서 두 시인은 만났고,
4개월째에 결혼했다.
시집『생일편지』는, 휴즈가 플라스를 직접 만나기 전, 사진에서 그녀를 봤던 기억을 담은 시로 시작된다. 어디 예쁜 여자 있나,
나하고 어떻게 될 수도 있을까, 이런 막연한 호기심으로 무심히 사진을 봤을 거다.
운명처럼 그대가 거기서 나를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풀브라이트 장학생
스트랜드 가(街) 어디였던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진들을 펼쳐놓았더군.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여겨보았지.
그해에 선발된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을 찍은 사진 한 장.
런던에 막 도착했거나,
이미 와 있는 장학생들의 사진.
아마 모두를 찍은 건 아닌지 몰라.
그대도 있었던가? 사진을 보기는 했지만,
아주 꼼꼼하게 본 것은 아니야. 그저 내가
그 가운데 어느 여자와 만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지금도 기억나.
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대의 얼굴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야.
물론 난 특히 여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어.
그대 얼굴을 보고 '이 여자는 어떨까' 하고
저울질해 보았을지도 몰라.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느꼈겠지.
그대의 긴 머리칼과 느슨한 웨이브,
영화배우 베로니카 레이크 식의 짧은 앞머리를 보았을 거야
(머리칼이 감추고 있는 건 보지 못했겠지만.)
머리칼은 금발처럼 보였던 것 같아. 씽긋 웃는 모습.
카메라나 판사, 이방인이나 자기를 놀래키는 사람들 앞에서
과장되게 짓는 그 미국식 웃음.
그 후 난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어.
하지만 사진은 기억이 나, 그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의 사진.
사진에 여행 가방들도 있었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당신네는 한꺼번에 무리지어 런던에 왔었나? 난 그때
뜨거운 태양 아래 달구어진 보도 위를 까진 발로 걷고 있던 참이었지.
내가 복숭아를 사먹은 건 그때 일이었지 아마.
체어링 크로스 역 근처 노점에서 말이야.
난 그때까지 그렇게 신선한 햇복숭아는 먹어본 적이 없었어.
얼마나 맛있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구.
새삼 기가 막혔지,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도록.
세상에서 제일 단순한 것 하나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It was the first peach
I ever tasted
I could hardly believe
how delicious
At twenty-five I was dumbfounded
By my ignorance of the
Simplest things
휴즈는 케임브리지 대학 동창생들과 함께 문학잡지를 만들었는데, 잡지 창간기념식장에서 플라스를 처음 만났다. 둘 다 사귀던 사람이
있을 때였는데...휴즈는 플라스에게 반해서 거친 키스를 퍼부었고, 플라스는
휴즈의 뺨을 물어뜯었다.
문학잡지 창간기념식장에서
(...)
그대는 대차게
나를 때려눕히려 했지. 나는 그날 저녁 그후의 일은
기억에 없어.
내 여자친구와 먼저 몰래 빠져나왔으니까. 기억나는 것은 단지
문간에서 여자친구가 분개해서 씩씩거리고
나는 호주머니에서 그대의 푸른 스카프를 꺼내
멍하니 바라보았던 일,
그리고 몇 달 동안 내 얼굴에 찍혀 있던,
둥글게 부풀어오른, 깊이 파인 그대의 이빨 자국.
그리고 그 밑에 영원히 박힌 나.
플라스는 휴즈가 살고 있던 집, 럭비 스트리트 18번지를 찾아갔다.
첫 섹스를 나눈 곳.
럭비 스트리트 18번지
(...)
루카스가 그대를 데려왔었지. 그대는 파리로 달아나기 전
런던에서 하룻밤을 묵었어.
4월 13일, 그대 아버지의 생신날.
금요일이었지.
나는 그대가 도취된 기분으로
유럽을 떠돌기 위해 떠나려 한다고 생각했지.
그대가 죽은 지 몇 년 후에야
나는 그 떠돎의 절망을 알게 되었어.
그날 밤 이후 여러 날 동안 파리의 자갈길에서
그대는 눈물을 뿌리며
떠돌았다고 했지. 나는 하룻밤 동안만
그대의 공포와 그대의 열병과 그대의 지독한 두려움-
그대의 황량한 머릿속에 든 그 돌 같은 병을 연기시켰을 뿐이야.
그대가 추구한 꿈, 그대에게 다시 주어지기를 바랐던
삶을 그대는 결코, 영원히 찾을 수 없으리.
그대의 일기는 고통의 삶을 얘기해 주고 있구려.
나는 그대가 천리안으로 알거나 혹은 우연히,
어떻게든 당신이 사랑하던 남자를 만나리라는 광적인 믿음을 갖고
그대에게 성스런 신전과 같은 곳들을 어떻게 찾아다녔는지 상상해보고 있어.
진지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애들의 장난.
그대가 사랑에 좌절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지.
그런데, 거기에 내가 있었지. 몇 시간 동안,
차비 몇 푼처럼, 보험 증서처럼 말이야.
내가 운명의 여신을 매수하여
어리석음의 희생자가 되는 일은 행복했었지.
(...)
우리가 자리에 앉기라도 했던가? 그대는 커다란 새처럼
흥분해서 깃털을 털며
들뜬 기분으로 소리를 질러댔지. 푸른 빛의 전기,
형광성 코발트 빛, 타오르는 신령한 기운을 그대는 발산했지.
그런 것들이 그대만의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어.
그리고 그대 눈의 특이한 반짝임, 그 이상야릇함.
(...)
우리는 현기증 날 정도로 마음껏
껴안고 있었지. 그리고는 포도주를 마시러
함께 통술집에 갔지. 그대는 쓰러져가며 영혼의 외침처럼
비밀 이름이나 비밀 번호를 알려주듯
상처받은 마음을 내게 털어놓았지.
어떻게 그대가 전에 자살을 시도했던가를 고백했지.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쉴 새 없이 키스를 해댔지.
그 소리는 마치 덜거덕거리며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도시 위에
깨어 있는 별 하나 속상이는 모양이었지.
“제발 좀 떨어져 있어요”하는 소리.
겁먹은 별 같던 그대. 나는 그대 품에 감싸여
은밀히 호텔로 들어갔지. 어떻게 갔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나. 그곳에는 그대와 나 두 사람만 있었지.
그대의 몸매는 물고기처럼 날씬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지.
그대는 나의 신세계. 나의 신세계.
그래 이것이 미국이다, 하고 나는 경탄해 마지 않았어.
아름답고, 아름다운 미국이여!
이 시집에서 <수선화>라는 시를 가장 좋아했거든.
플라스의 시 <툴립>과 같이 놓고 보게 되기도 하고.
요즘은 다시 뒤적여보니까 두 사람이 만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순간들이
눈부시다.
'풀브라이트'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둘은 만나지 않았겠구나!
그리고 우린, 무심코 먹던 복숭아 맛을 기억하게 된다!
▼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 A Tribute to the the Poet Ted Hughes
(테드 휴즈의 시 낭송 부분, 함 들어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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