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20여년 쯤 후 우리 마을에 전쟁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초등학교 입학 후 6월 25일 아침 조례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시 속에 생전 듣도보도 못한 "빨갱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그날 저녁 식사후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빨갱이가 뭐냐는 질문을 던졌고 자상한 할아버지의 설명과 할머니의 추임새 속에 전쟁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얘기에 의하면 우리 마을은 인민군 점령지였다고 한다. 내가 할아버지께 확인했더니 인민군들이 마을에 내려오진 않고 산속에 주둔했다고 한다. 뒷동산 높이의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쌓인 그 산속 어디에 인민군이 주둔했는 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마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모양이다. 화장실갔다가 폭격맞아 죽은 사람, 마루에서 점심먹다 폭격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한 집안의 얘기를 들었다. 당시 사망한 사람들은 인민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군 쌕쌕이의 폭격에 의한 것이라고 들었다. 당시 어른들이 나눈 대화 내용으로 보아 인민군보다 미군전투기에 대한 공포감이 더 컷던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빨갱이의 만행에 대한 학교 교육은 강화되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를 보면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나의 질문은 인민군들의 잔혹 행위에 대한 질문이 많았지만 어른들의 대답에선 별다른 적의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만되면 많은 인민군들이 군가를 부르면서 전투를 하러 나갔다가 아침에 돌아 올때면 숫자가 많이 줄고 피투성이가 된 체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군내 씨름대회 1등 출신인 친구 아버지는 인민군들이 퇴각할 때 20리길 지서 건너까지 부상당한 인민군을 지게에 져다 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을 앞산 나즈막한 언덕위에 유달리 큰 봉분의 주인없는 무덤이 있었는 데, 할머니가 밭일 나가실 때 가끔 그 무덤의 풀을 뜯으면서 불경같은 걸 외우시는 걸 봤다. 무덤에 대하여 물어봤지만 할머니는 대답을 얼버무리셨다. 혹시 희생된 인민군의 무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당시 마을에선 꼴베러 나갔다 인민군이 사용하던 막대수류탄이나 실탄 뭉치를 주워 어른들에게 건내면 어른들이 땅 속 깊숙히 묻어주던 기억도 난다. 무엇보다 전쟁의 흔적을 가장 크게 느꼇던 것은 20년이 지나도록 마을 주변에서 발견되던 포탄의 파편이었다. 어른 손바닥 크기에서부터 손가락 굵기의 파편은 온 산에 박혀있었다. 비가와서 흙이 쓸려 내려가면 포탄 조각을 주우러 산으로 돌아 다녔다. 당시 낡은 고무신보다 훨씬 많은 엿으로 바꿔 먹을 수 있었던 게 포탄 파편 조각이었다. 스무가구도 안되는 조그만 시골마을에 20년이 지나도록 포탄 파편이 발견될 정도로 폭격을 가해졌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직한 생각이 든다.
우리 마을에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1998년 DJ정부로 바뀌면서 마을 순시차 경찰서장이 방문한 것이 큰 화제거리가 될 정도로 공권력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던 마을이라 그 주변 지역의 민간인 피해에 대하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우리 생활에 깊숙히 들어와있던 생활 용품은 모두 군용품을 개조한 것들이었다. 어린시절 기억나는 것이 있는 지 떠올려 보시라.

수류탄으로 만든 호롱불은 본적이 없지만 재미있어서 올렸다.

통신선으로 만든 장바구니. 예전엔 집집마다 저거 하나씩은 있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아낙들이 장날 나들이 할대 꼭 저걸 들고 다니셨다.

지프 유류통 잘라서 만든 것들인데 방앗간가면 많았다.


저 재털이는 곰방대 사용하던 할아버지들의 전용품이었다. 곰방대로 땅땅 때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도시나 시골에선 화이바로 만든 두레박이 많았다.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 푸세용 똥바가지는 100% 화이바를 사용했다. 가볍고 튼튼하여 농촌에서도 많이 이용하던 물건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2012-05-02 04:54:48 월간박봉팔닷컴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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