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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중편소설 <달) - 유시민
글쓴이 : 인삼의향기는담장을넘…                   날짜 : 2011-04-11 (월) 17:00 조회 : 5135 추천 : 27 비추천 : 0
인삼의향기는담장을넘어가고 기자 (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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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달>

- 유시민 -


1

<○○사단 김영민 일병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 보고>

1. 개요
198x년 12월 24일 23시 25분경, 육군 제○○사단 ○○연대 12중대 소속 병장 이충효가 철책선 경계근무 도중 함게 근무하던 일병 김영민을 소총으로 사살한 사건임.

2. 수사 결론
양인이 경계근무를 수행하던 중 병장 이충효가 조는 틈을 이용하여 일병 김영민이 월북을 기도한바, 뒤늦게 이를 발견한 이충효가 사살한 사건으로 결론지음. 병장 이충효는 근무중 취침한 사실이 인정되나 그 이외의 과실은 없으며 사살하기 전의 예비조치도 정상적으로 취한 것으로 판단됨.

3. 요지
(1) 사살된 시점에 김영민은 43번 초소 좌전방의 52번 투광등을 이용하여 철책을 넘으려 한바, 이는 52번 투광등 바로 아래의 1726번의 지주 상단 원형 철조망에서 동인의 혈흔과 찢어진 옷자락이 발견된 것으로 입증된다.
(2) 평소 김영민은 병영생활에 순탄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소위 고문관으로서 군복무 자체를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바, 이는 소대장 소위 박성호와 중대장 대위 최경식의 사병 면담기록 및 같은 소대 소속 사병들의 참고인 진술에서 일관되게 지적되어 왔다.
(3) 김영민은 부 김현호(51세, 무직)와 모 강옥분(49세, 생선행상)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서 사건 당시 가정문제로 몹시 번민하고 이었던바, 이는 누이동생 김영희(20세, 여공)가 보내온 편지에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4) 더욱이 김영민은 부모의 무능력으로 인한 가난과 불행을 사회의 책임인 양 오인하고 있던 중 최근 김영희가 과격 노사분규의 주동자로 구속되어 4개월을 복역한 일로 인해 자유민주사회의 기본질서와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이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포지하게 된바 이는 사건 당시 김영민이 소지하고 있던 메모에서 잘 드러나 있다.
(5) 또한 사건 당시 김영민은 식량대용 전투식량 2봉을 소지하고 있었던 바, 이는 월북 도중 필요시 비상식량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 특히 사건 당일 오전에 보안부대에 연행된 후 친북괴 용공조직인 "민족해방혁명당"의 병사소조 조직책으로 판명되어 금년 1월 11일,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된 같은 소대 소속 상병 한만수와 평소 가깝게 지내면서 상당 수준의 좌경의식화 교양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김영민의 월북 동기를 헤아리게 하는 중요한 단서인바, 이는 한만수의 수첩 기타 소지품을 김영민이 몰래 보관하고 있었던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7) 이충효의 진술에 의하면, 김영민은 두 차례에 걸친 이충효의 제지와 경고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이충효가 김영민의 월북기도를 인지하고 사살했다면 왜 크레모아를 발사했느냐는 의문점에 대하여 볼 때, 당시 김영민이 52번 투광등을 고의적으로 깨뜨려 주변이 매우 어두웠다는 점과, 따라서 만의 하나 김영민이 철책을 넘어 도주할 경우 확인사살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점, 아울러 이충효가 병장이므로 오랫동안 숙달된 반사적 행동일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넉넉히 이해할 수 있는 일로 사료된다.

4. 이상과 같은 일병 김영민 월북미수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의 발생동기를 가장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물적 증거인 김영희의 편지와 김영민이 소지하고 있던 메모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의 사본을 별첨함.

198x 년 1월 15일
육군 제○○군단 범죄수사대
검찰관 중위 이정필



<별첨1: 김영희가 김영민에게 보낸 편지>

보고픈 오빠에게.
Merry X-mas.
오빠.
올 겨울은 별나게도 춥고 눈이 많이 와요. 여기 눈은 지저분하지만 오빠 있는 곳에는 눈이 많이 와도 참 아름다울 거에요. 군인 아저씨들은 감기에 안 걸린다는데…… 여기 TV에서 보니까 웃통 벗고 달리기도 하던데, 오빠도 그래요?


미안해요 오빠.
몇 달 만에 편지 쓰는 건지 기억도 잘 안 나요. 궁금하고 답답하고 그랬을 거에요. 영철이보고도 내가 편지하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미안해요. 미안해…….
여긴 다들 잘 지내요. 그 사이에 엄마가 쪼금 편찮으시긴 했지만 이젠 다 나으셨답니다. 나 때문에 그랬죠. 장사도 못 나가시고…… 이젠 다시 나가세요. 걱정 마세요.
있잖아요. 내가 감옥엘 갔다왔거든요. 별일은 아니에요.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보통 때는 그렇게 점잖고 하던 공장장이란 관리자들이 그렇게 무섭고 난폭한 줄은 정말 몰랐어요. 조합장 언니랑 사무장 언니랑, 막 때리고 담뱃불로, 아휴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언니는 다리까지 부러졌어요.


오빠도 아시죠? 내가 열일곱 살 때부터 그 회사에서 미싱을 탔잖아요? 근데도 언제 봤냐는 식이에요. 다섯 사람이나 해고를 시키고 조합 탈퇴하라고 협박하고 해서 우리 또순이들도 못 참아서 한바탕 했을 뿐이에요. 근데 남자들이 웃통을 훌렁 벗고 쳐들어오는데, 미싱 다 부서졌을 거예요. 우리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으니까.
근데 우리가 농성할 때 회사에서 엄말 불러다가 내가 빨갱이 꾐에 빠져서 신세망칠 거라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엄마가 날 찾다가, 나도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엄만 앓아누우셨답니다.


오빠.
괜한 얘길 했나봐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엄마도 장사 나가시고 아버지도 여전하셔요. 난 그 회사에선 해고당했어요. 석방 된 지 3주쯤 됐나봐요, 이제.
취직할려고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큰데서는 자꾸 주민등록증 보자고 해요. 지난번 일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안 뽑는대요. 그치만 쪼그만 데 취직했어요. 월급은 좀 적어도 난 기술이 좋으니까 금방 좋은 데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영철이도 철이 났는지 이젠 말썽 안 부리고 착실해요. 쪼그만 게 벌써 어른 흉내 내려고 한대요.


오빠.
봄에 휴가 나온다죠? 벌써 기다려져요. 만나면 할말이 많을 거예요. 감옥에서도 얼마나 재밌는 일이 많았다구요? 그리고 이건 비밀. 나 남자친구도 생겼어요. 전기 기술잔데 고등학교도 나오고 키도 크고 잘생겼어요. 첫눈에 반했다나요?
오빠도 제대하고 나면 뭐든 기술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애요. 기술만 좋으면 돈도 훨씬 많이 받는대요. 그리고 놀랄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그 사이에 내가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는지 몰라요. 세상도 이젠 좀 알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별도 잘해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신문도 읽어볼려고 애를 쓰고 틈틈이 책도 읽어요. 영철이가 집안일을 거들어주어서 내가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오빠.
좋은 소식 못 전해서 미안해요.
엄마가 동상 조심하라고 쓰라고 신신당부예요. 군복 입은 오빠 모습 얼른 보고 싶어요.
이만 줄일게요. 안녕 ㅡ

Happy New Year
198x년 12월 18일
영희가


<별첨2: 김영민이 소지한 메모(사본)>

나는 얼마만큼 이루었는가? 얼마만큼 더 이룰 수 있을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검바우산, 이 낯선 산비탈 눈구덩이에서 얼어 구부러진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지키면서 이루어냈고 또 이루려는 것! 그것이 끝내 오고야 말 그날을 몇 발짝이나 앞당긴 것일까.

자유는 가진 자의 금고 속에 갇히고 진리는 비열한 자들의 혀끝에서 이리저리 비틀려, 민주주의는 날선 대검 끝에 찢기어 흔들리고 정의는 근엄한 법정의 뒤안에서 목졸려, 견딜 수 없는 양심들의 처절한 몸부림마저 최루탄 개스에 숨막혀 거리 모퉁이에 쓰러져 가는 이 땅.

나는 잠들지 못한다.
남녘의 부모를 향해 폭동진압술을 익히는 국민의 군대, 북녘 형제들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밤낮으로 사격술을 훈련하는 멸공통일의 보루.
"저 흉악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자유를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권리를 인간적 존엄성마저도 깡그리 남김없이 백지위임하고 노랑 계급장과 M16 한 정을 얻은, 높으신 국방부 장관 나으리가 감독하는 민주주의의 예외지대, 인권 말살의 병영에 어쩌지 못해 몸을 맡긴 팔도 사나이들.

끝없는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타협! 숨을 쉬고 밥을 씹고 잠을 자는 것조차 침묵이 아니고서는 굴종이 아니고서는 타협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파쇼 군대를 산다.
타협하지 않으면 탈영이다 병역기피다!
순종이 아니면 불이행 명령 불복종 항명이다!
탈영도 항명도 선택하지 못하는 팔도 사나이들이 산다.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다물고 썩인다 삼 년의 청춘을. 서른 번 찼다 기우는 달을 그저 보고만 있다.

지상낙원 공화국 북반부가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오라 북으로! 남조선의 국군 사병 여러분. 함께 나누자 이 행복을.
미제의 식민지 남반부의 뒷구린내를 들추어내는 숱한 언어들이 수령님을 예찬하는 긴 수식어와 더불어 함께 모조리 거짓말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설마 모를까.
선진조국 대한민국이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오라 남으로! 인민군의 전사들이여! 함께 나누자 이 풍요를.
한강의 기적 88올림픽 대한민국의 발전을 소리 높여 예찬하는 모든 말들이 제5공화국이 자유민주주의 정의사회를 실현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와 더불어 함께 모조리 그럴듯한 허풍으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들은 설마 모를까.

도대체 저 아리따운 목소리들은 어느 쪽의 병사들을 위한 것인가?


나는 안다.
낙원이란 남이나 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려는 의지와 노력 가운데서라면 어디든 꽃핀다는 것을. 우리의 낙원은 우리 스스로 여기서 만드는 것임을. 나는 이루고 싶다. 지옥 한가운데 자주와 존엄과 우애가 꽃피는 작은 낙원을, 파쇼 군대 한가가운데 민주주의의 일개 소대를.
아직은 중대장의 담배연기로 날아가는 중대운영비를 붙잡을 수 없지만 아직은 대대 서무병의 손에서 여당 지지표로 만들어져 돌아가는 부재자 투표용지를 찾아올 수 없지만 아직은 모든 전우들이 집단적 창조의 기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확신한다.


녹슨 저 철책이 무너져 음흉스런 독초밭 같은 지뢰지대에 탐스런 곡식이 물결치고 원수처럼 맞선 남북의 형제들이 총을 버리고 함께 건설의 망치를 들 날이 바로 여기서, 이 파쇼 군대의 밑바닥에서 잉태되어야 하고 싹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내가 이룬 것은 비록 적어도 나는 믿는다. 지금 이룬 것만큼이 여기 남아서 그 위에 또다른 자주적인 인간들이 하나하나 변혁의 의지들을 쌓아갈 것임을.
고통스럽지만
나는 행복하다.


2

영민은 안타까운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려놓은 은가루만큼이나 반짝이던 별들은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켜켜이 앉은 겨울의 밤하늘. 달빛은 흔적조차 없었다. 세상 전체가 꽉 막힌 밀실 같았다. 은백의 눈으로 뒤덮인 맞은편 능선마저도 그저 희끄무레해 보일 따름이었다. 금세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듯한 날씨, 군데군데 선 투광등이 어두운 산비탈에 둥그런 빛무더기를 던지고 있을 뿐 하늘과 땅 사이에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영민은 방한모의 턱끝을 바싹 죄면서 발을 쿵쿵 굴러보았다. 방한화 속에 벌써부터 땀이 차는지 새끼 발가락께가 뻣뻣이 얼어들어왔다.
영민은 숨이 가빴다. 죄어맨 방한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갇혀 있었다. 폭 5m, 길이 45m, 이것이 하룻밤 그에게 허용된 땅의 넓이였다. 코앞에 버티어 선 철책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야구장 뒷그물처럼 촘촘히 엮인 철사그물, 서너 걸음 간격으로 늘어선 둥근 철제지주, 지주 한가운데쯤에 가로질러진 중단철주. 지주 위에 안팎으로 비스듬히 솟은 꺽쇠. 그리고 그 위에 육중하게 얹힌 철조망. 어둠 속에서도 영민은 철책의 생김새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맨날 보는 저 철책이 어쩐 일로 이리 낯설게 보일까.


그는 감시초소 안에서 앞을 보고 서 있었다. 참나무로 벽을 쌓고 싸릿대 지붕을 얹은 가슴 깊이의 근무호는 겨우 바람이나 막아줄 뿐 한데나 다름없이 추웠다. 바람이 휙 불었다. 계곡의 눈밭 위를 달려온 매서운 바람이다. 근무호 뒤쪽에서 지뢰밭 표찰이 철조망에 긁히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영민은 입안에서 되뇌어보았다. 일천 칠백 십사…… 일천 칠백 이십구…… 나는 1714번 지주보다 좌측으로 가면 안된다…… 나는 1729 지주보다 우측으로 가면 안된다…… 그는 완벽하게 갇혀 있었다. 철수는 10시간쯤 뒤에나 가능할 거야……. 오늘은 음력 보름인데 무슨 놈의 구름이 이리도 지독하게 끼었을까? 달만 뜨면 얼마나 좋을까…….


영민은 자기 구역의 좌우측 끝을 눈대중으로 짚어보았다. 연대 순찰반이 막 지나갔으니 이젠 마음을 좀 놓아도 될 거야. 하지만 방심할 순 없지. 내 적은 앞에서가 아니라 옆에서 오니까. 저 철책을 뚫고 들어올 순 없어. 저승차사마냥 소리없이 나타나는 순찰장교만 조심하면 돼. 그는 반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곳에 서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젠 전방생활도 그럭저럭 해나갈 만큼 일이 손에 익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인사계로부터 이야기를 듣던 만큼 전방은 위험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이등병 계급장을 댕그라니 붙이고 밤새 북으로만 달리던 열차 안에서는 잔뜩 겁을 먹었었지만 전방생활은 이제 따분한 일상이 되어버려서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영민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는 초저녁부터 줄곧 달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대낮처럼 능선과 계곡을 비칠 보름달. 그것만 나타나면 근무자의 절반은 막사로 철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아침 7시까지 말뚝으로 근무를 설 판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간절히 달바라기를 하는 것은 근무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실로 넉 달 반 만에 받아본 영희의 편지를 읽기 위해서였다. 훈련병 시절에 1주일이 멀다 하고편지를 하던 영희가 넉 달 넘게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가 영희의 기숙사로 보낸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 온갖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매일 저녁 편지를 받아오는 부식수령조를 기웃거렸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오늘 편지가 온 것이다. 성탄절 특식을 가지러 중대 본부에 다녀온 분대장이 빙긋이 웃으며 그것을 건네 줄 때 영민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급한 마음에 겉봉을 찢기는 했으나 그는 편지를 읽지 못했다. 근무 투입 전 군장검사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지금 방한복 상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구름은 걷힐 기미가 없었다.


"야! 김영민!"
이 병장의 거친 목소리가 영민의 상념을 깨뜨렸다.
"담배!"


영민은 얼른 장갑을 벗고 방한화 속에 숨겨둔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그리고 근무호 바닥 모서리에 웅크려 성냥을 그었다. 어둠 속에서 오목조목 여려 보이는 그의 얼굴이 빨갛게 드러났다. 그는 얼른 담뱃불을 붙이고 두려운 듯 성냥불을 껐다.
담배를 넘겨받은 이 병장은 익숙한 동작으로 M16의 권총손잡이 홈 속에 그것을 집어넣고 탐욕스레 빨아댔다. 향긋한 담배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영민은 어둠 속에서 이 병장을 바라보았다. 다 피우고 나면 저 꽁초를 또 철책 너머 쌓인 눈 속으로 집어던질 테지…… 겨우내 그렇게 버려진 꽁초들이 눈이 녹으면서 한꺼번에 나타나면 어떨까? 사단장이 보면 기겁을 하겠지? 후훗…… 영민은 소리나지 않게 웃었다. 담배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그는 왠지 가슴 한켠이 허전하게 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빈가슴 밑바닥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담배를 숨겨오는 건…… 언제나 졸병의 몫이지. 들키면 소대장한테 얻어터지고…… 군기 빠져서 그딴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고참한테 걷어채이고…… 정작 숨겨와봤자 자기는 눈치보느라 몇 모금 빨아보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졸병의 숙명이란 그런 거지. 반세기 동안 줄곧 그랬어. 왜놈 관동군…… 걔네들이 만든 관습이 그냥 내려온 거야. 사람이란 그렇게 어리석지. 장교들이 사병들을 모욕하고 학대하니까 사병 고참들이 그걸 그대로 따라 배워서 그렇게 된 것 같아.
영민은 성냥갑 모서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한만수 상병을 생각했다. 성냥 때문일까? 그래, 그럴 거야. 성냥…….


영민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황에서 한 상병을 만났다. 그리고 그 첫 만남의 순간부터 그에게 매료되었고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아마 전입온 지 사흘인가 나흘째 되던 날 이른 오후였을 것이다. 그전에도 보았겠지만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상 첫 만남인 셈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성냥이 있었다.

영민의 중대가 철책선 경계근무에 투입된 것은 11월이었다. 그 전에는 검바우산 중턱의 해발 1,000m나 되는 한 봉우리에 주둔하고 있어다. 영민은 8월 초 섭씨 30도를 웃도는 복더위 속에 산 아래의 대대본부에서 두 시간을 걸어 전입을 왔다. 돌과 먼지뿐인 고갯길을 더블백을 메고 걷는 동안 그는 이십 년을 살면서 흘린 것을 다 합친 만큼의 땀을 뺀 것 같았다. 그는 기진맥진 중대장에게 전입신고를 마치고 3소대 2분대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사흘이 지난 날 오후였다. 영민은 쓰레기장에 재떨이를 들고 나와 거기서 불씨가 남은 꽁초를 찾아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내무반에 걸레질을 하고 고참들이 벗어던진 옷을 잽싸게 정리 한 다음 재떨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내무생활 그 자체는 견딜 만했다. 그러나 마음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또래들끼리 아웅다웅하던 훈련소와는 달리 영민은 소대에서 제일 졸병이었다. 낯선 고참들의 비위를 맞추자니 종일토록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제나 제대하게 되나 하는 끝모를 막막함과 외로움 한가운데서 눈코 뜰 사이 없이 사흘이 흘렀다. 침상에 누운 채 담배꽁초를 내무반 바닥에 던져버리고 점호시간이 다가와도 흙투성이 군화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고참병들, 어엿한 남자인데도 이년 저년 욕설을 해대는 사람들, 가슴 속에 소중히 모셔둔 누이를 들먹이며 자기의 좆집으로 주지 않겠냐며 낄낄대는 야비한 농지거리들이 그를 고달프고 서럽게 했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일은 성냥을 구할 수가 ㅇ벗다는 것이었다. 고참에게 불을 빌리자고 했다가는 날벼락을 맞을 판이었고 피엑스는 대대본부에 있었다. 영민은 불씨가 남은 꽁초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얼른 불을 붙이고 허리를 펴던 그는 깜짝 놀라 얼결에 담배를 비벼 껐다. 상병 계급장을 붙인 거구의 사나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이 영민에게로 다가왔다. 한낮의 햇빛이 그의 어깨 위에서 튀고 있었다.
"성냥이 없나 보군. 김 이병?"
영민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김 이병이라니? 세상에 이병에게 계급을 붙여서 불러주는 고참도 있다니, 그저 이새끼 저새끼…… 이름만 제대로 불러줘도 대접하는 셈인데…… 전입온 지 사흘밖에 안되는 내게 김 이병이라니? 넋나간 듯 보고 선 영민에게 그는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조그만 성냥 두 갑이었다.
"어제 대대에 부식조 갔다가 피엑스에 잠깐 들렀지."
햇살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영민은 성냥갑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다 성냥갑이 찌그러지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뺐다. 옆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그는 가버렸어. 그가 있던 자리에는 이 병장이 서 있었다. 이 병장은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서 그것을 철책 너머로 휙 집어던졌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계곡을 휩쓸며 불어왔다.

3

"니기미 씨팔, 달이 와 안 뜨노 말이다."
이충효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꼴이 한심스러웠다. 소대 왕고참이 근무를 서야 하다니…… 선임분대장이라야 1분대장 강 하사도 나보다 짠밥은 두 달이나 모자라는 놈이 아닌가. 군대야 짠밥이 최고지 그까짓 갈매기 하나 붙인 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보나마자 소대장 전령인 일등병 놈을 전화기 앞에 앉혀놓고서 그 자식은 자빠져 자고 있을 거야. 충효는 새삼 난로가 그리웠다. 다른 날 같으면 이 시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든가 아니면 취사장에 꼬불쳐둔 돼지고기로 찌개나 만들어 밤참을 먹을 텐데…… 그 한만수란 자식하고 날씨 때문에…… 빌어먹을.


그는 초저녁부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만 뜨면 절반은 철수한다. 그러면 내무반에 돌아가자마자 커피부터 한 잔 마셔야겠다. 개떡 같은 날씨…… 구름이 끼었으면 춥지나 말 일이지, 이거야 원……. 충효는 부아가 치밀었다. 경험으로 봐서 이런 심술궂은 날씨라면 밤새 갤 확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이 근무를 서고 있는 놈은 하필 고문관으로 소문난 등신 같은 김영민이 아닌가. 남산 밑의 무슨 얄궂은 이름을 가진 호텔 웨이터를 했다는 박 상병이나, 아니면 이태원에서 게이 노릇을 하다가 온 예쁘장한 신병 놈을 데리고 왔으면 재미나 있을 텐데 말야. 정말 일진이 사나워도 지랄같이 사나운 날이라니까. 그런데 도대체 한만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자식이 갑자기 사라지는 통에 내가 말년에 근무까지 서야 되잖아. 그러나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한만수는 처음 만날 때도 그러더니 가는 날까지 자기를 괴롭힌 셈이었다. 한만수는 충효가 군복을 입고서 처음으로 맞이한 직속 졸병이었다. 신병이 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사태는 그렇게 유쾌하지가 못했다. 그 저주받을 대학생 복무단축제도 때문이었다. 졸병이랍시고 하나 받고 보니 입대일은 2개월하고도 3주나 늦은데 전역예정일은 그보다 1주일 빨랐던 것이다. 한만수는 서울의 어느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탓으로 나이까지 그보다 한 살 더 먹은 졸병이었다. 그는 졸지에 놀림감이 되고말았다. 그의 고참들 중에는 한만수보다 늦게 제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한만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대신 충효를 놀려댔다. 짠밥 고참과 제대 고참 사이니 둘이 동기처럼 지내라느니, 한만수 먼저 제대하는 걸 보면 이충효가 배가 아파 입실하게 될 거라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그는 이를 갈았다. 사실 배가 아팠다. 더러운 놈의 복무단축제도를 아무리 저주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 화장실 뒤로 한만수를 불러내어 주먹다짐을 했다. 그리고 선언했다.


"좆같이 사회가 안 고르니까 군대도 고르지가 않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고르게 해주겠다 이 말이다. 알겠나? 너 이 씨팔놈아, 내보다 먼저 제대한다꼬 기올라탈라카믄 죽이뿌릴 끼다. 니가 3개월 덜하는 만큼 내가 그 대가를 돌리줄 끼다. 공평하제? 안 그렇나?"


머리통 하나만큼 더 키가 큰 한만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겁먹거나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지도 않았다. 건수가 잡힐 때마다 주먹질을 했지만 그래도 고참에게 내놓고 대들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하나로 맵고 짠 군대시집살이를 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몇 달 지나지 않아 한만수가 너무 커버렸다는 데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충효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만수는 도대체 대학을 다닌 먹물답지가 않았다. 그는 첫 구보에 낙오하지 않은 보기드문 신병이었다. 전 중대원 중에서 제일 형편없는 군장과 내피가 끈어져 핑핑 돌아가는 철모를 가지고서도 그는 낙오하지 않았다. 가장 힘든 고갯길을 오를 때는 지쳐 헐떡이는 소대장을 대신해서 구령을 붙이기까지 했다. 열 발을 쏴서 일곱 발밖에 맞추지 못한 충효가 사격장 앞마당 돌밭에서 치도곤을 당하고 있을 때, 열 발을 다 맞춘 그는 중대 탄약병을 도와 사격장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방끈이 긴 놈답게 병 공통과목이나 정훈 필기시험만 치면 대대 전체에서 언제나 첫번째였다. 5갤런 물통 2개를 지게에 얹고 1시간이나 산비탈을 올라야 하는 물당번도 중간에 한 번만 쉬면서 너끈하게 해치웠고, 훈련 나가서 분대용 텐트를 치는 일도 금방 익혀냈다. 뒷굽이 다 닳은 군화를 신고서 행군도 잘만 해냈다. 사단에서 실시한 전투력 경연대회 때, 병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그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자신이 소대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혹 갈 수 있을 지도 모르는 포상휴가를 포기하면서까지 모험을 했지만 그 때문에 자신까지 경을 친 일을 생각하면서 충효는 새삼 한만수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늘 한만수와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한만수는 그로서는 장악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내세울 것은 짠밥 그릇수가 많다는 것 하나뿐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실이었다. 사병들 사이에 짠밥 그릇수에 따른 위계질서를 빼면 남아날 질서가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한만수가 중대본부 요원으로 발탁되어 갈 것이라는 소문이 한동안 떠돈 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대장과 면담하고 온 그는 그대로 소대에 머물고 있었다. 중대본부에 오라는 중대장의 권유에 대해 자신은 화끈한 소총수 생활을 훨씬 좋아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거만스러운 본부요원들을 한편으로는 미워하고 한편으로는 동경하는 소총수들에게 이 말은 실로 통쾌한 것이었다. 그는 소대의 총아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럴수록 충효는 그를 더욱 미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한만수가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충효는 그 자식 때문에 자기의 군대생활이 몇 갑절 힘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목에 걸린 가시가 빠져나간 것처럼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제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지만 소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비밀, 그 불쾌한 사건의 주인공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졸병한테 얻어터지다니……. 충효는 소총을 들어 어둠 가운데 한 지점을 겨냥했다. 차가운 개머리판이 뺨에 와 닿았다. 가늠자리에 야광처리가 된 부분대장용 소총이다. 파아란 야광테 안으로 어둠이 동그랗게 들어와 앉았다. 거기 한만수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충효는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병신 같은 새끼. 지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군대에서 인격이니 뭐니, 흥…… 개소리야 개소리. 충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얼마나 무진 노력을 해왔던가. 한만수…… 그 자식만 없었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미쳤다고 주임상병 되어서까지 회식 때마다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민가에 가서 술을 사와? 내가 누굴 위해서 회식비 걷은 데서 뻥쳐 가지고 따로 소주하고 안주 사다가 고참들한테 먹였는데……. 고참 모실 줄 아는 소대일꾼이라고? 흥, 개소리 말라구. 내가 졸병들 닦달해가지고 늬네들 군화, 파리가 낙상하게 닦아주고 야전잠바 세탁해주고 속옷 삶아주고 한 게 제대하면 안면 몰수할 늬네들 위해서 그런 그런거라고? 미쳤나? 애들 욕먹어가면서 그짓 한 게 늬네들 위해서라면 내가 미친 놈이야. 흥…… 웃기지 마라. 나도 다 계산이 있는 놈이라구. 내가 내세울 게 뭐 있어? 문교부 혜택을 많이 보길 했나, 사격 구보를 빼어나게 잘하나, 아니면 힘이라도 세나? 만수 자식이 졸병들 인기는 다 차지했는데 그나마 고참들이라도 잘 봐주지 않으면 난 완전히 바지저고리밖에 더 되냐? 늬네들 배경으로 졸병놈들 꽉 잡아놔야 제대할 때까지 좀 편하게 지낼 수가 있어. 그 때문이야…… 딴거 없다구. 봐! 한만수 그 자식, 고참들 전출가게 되니까 대뜸 들고 나왆아? 그전에 내가 그 정도라도 애들을 잡아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난 지금 찬밥신세가 됐을 거야.


힘겨운 상대가 사라져버렸다는 안도감에 충효는 어깨를 펴보았다. 이젠 자신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뒤늦게나마 명실상부한 소대 왕고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한 가지 의문만은 풀리지를 않았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간일까? 그 정도의 명문대학을 다녔고 또 논산에서 훈련을 받은 놈이 군단과 사단, 연대와 대대를 거치면서 어째서 좋은 보직을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보안대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자식 사상이 의심스러운 놈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혹시 고위층의 아들은 아닐까? 일부러 고생 좀 하라고 아들을 이런 곳으로 보내는 또라이 장군도 없진 않다는데…… 만일 그렇다면…… 혹시라도 내가 애들 봉급 뻥친 것 걸리면 어떡하지? 가슴 한 귀퉁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는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았다.
"니기미 씨팔, 달은 와 안뜨노 말이다."


4

"국군 사병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여러분을 위해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귀에익은 아리따운 음색의 여자가 대남방송을 다시 시작했다. 가끔씩 철책 저편의 마른 갈대를 우썩우썩 흔들어대던 바람소리는 김일성 찬가에 묻혀버렸다. 뒤쪽의 아군 스피커에서도 음악이 터져나왔다. 조모 씨의 단발머리. 양측 노래가락의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이 내는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영민은 왼편에 보이는 투광등을 보고 있었다. 1726번 지주에 바싹 붙어 설치된 52번 투광등. 영민은 그 아래의 계곡을 건너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에서는 소리들이 칼을 물고 싸웠지만 땅 위에는 오로지 죽음 같은 정적뿐이었다. 1726번 지주 앞은 가파른 바위비탈이었다. 그 때문에 투광등은 대개 철책보다 몇 미터 앞으로 나가 있었지만 52번 투광등만은 예외였다. 1726번 지주와 바짝 붙어 설치된 52번 투광등은 철책 안쪽의 순찰로에까지 희미한 빛줄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한 상병이 며칠 걸러 한번씩 그 투광등을 손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소대에서 제일 키가 큰 그는 1726번 지주 위의 꺽쇠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발로 지주 우측의 중단철주를 디딘 채 오른팔을 뻗어 소켓 부분을 만지곤 했다. 그러나 소켓이 너무 느슨해서인지 바람이 불면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속을 썩였다. 지금은 멀쩡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투광등을 바라보면서 영민은 달이 뜨지 않아도 편지를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순찰장교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그리고 이 병장에게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영민은 망설이고 있었다.


"야, 뭐하노? 인터폰 안 받고?"
이 병장의 호통에 영민은 얼른 벽에 붙은 인터폰을 집어들었다.
"예, 43번 근무호 일병 김영민입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소대장님일 텐데…… 의아해 하는 순간 난데없이 캐럴이 흘러나왔다. 북치는 소년. 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였지. 인터폰을 통해서 듣는 캐럴이라…… 재미있는데?
"뭐야? 누구야?"
이 병장이 수화기를 빼앗았다. 그는 얼른 귀에 대보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야, 이거! 장난치나? ……소대장님! ……소대장님! ……약올리는 겁니까, 예? …… 지금 장난칠 기분입니까, 내가? 차라리 커피나 타 오시지, 예? 아휴, 말도 마이소. 죽겠입니더. 내가 근무설 군번입니까? 이런 거 듣고 위로가 될끼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빨리 오이소. 누구는 뺑이치는데 내무반에서 뭐하는 깁니까? ……예, 그라고 안 있입니까? 쪼매 있다가 삐이급으로 빼입시더. 소초장 직권이라 카는 거 안 있입니까? 아까 연대 순찰반은 지나갔고, 이래 춥은데 누가 오겠입니까? ……예, 믿습니데이."


소대장은 영민과 비슷한 시기에 전입해온 알오티씨 소위였다. 알오티씨에게 군인정신이 있으면 꽃이 핀다는 속설대로 그는 장교도 사병도 아니었다. 계급장은 장교지만 3년을 탈없이 때우는 것이 최대 목표라는 점에서는 사병이나 한가지였다. 가끔 알오티씨 장교 가운데 매력적인 인물이 없지는 않았지만 박 소위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소대의 질서를 그럭저럭 유지해나가는 데 필요했기 때문인지 이 병장의 횡포를 묵인했다. 이 병장은 발빠른 일병 하나를 전령으로 붙여주고 주기적으로 닦닳여 반찬을 따로 만들어주거나 빨래를 해주게 하는 등으로 박 소위의 편리를 도모해주었다. 영민은 한 상병이 이 병장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나섬으로써 일어난 그 사건을 소대장이 그냥 묵인한 데 대해 소대원 대다수가 그렇듯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철책 투입 직전인 11월 중순의 일이었다. 영민은 그 생각만 하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막사를 두들겨대는 흙바람이 유별나게 살벌하던 그날 밤, 영민은 도포를 뒤집어쓴 채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터지긴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은 일병이나 이병이나 모두들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깥 날씨와는 달리 내무반은 너무나 평화롭고, 어찌 보면 목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각 소대별로 진행한 중대회식은 끝났다. 이젠 휴가 때까지는 술 마실 기회가 없다. 관사에서 살림을 하는 중대장과 선임하사들은 앞으로 1년 동안 생과부가 될 마누라를 달래러 나갔다. 미혼의 소대장들은 애인들을 만나러 읍내로 갔다. 주변머리 없는 박 소위가 주번사관 완장을 차고서 행정반 야전침대에 드러누워 있겠지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바람은 이리도 요란스레 불고 행정반은 50m도 넘게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웬만한 사단이 나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독립중대. 군용차가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낼 오르막길엔 더구나 눈까지 쌓여 있지 않은가. 어떤 미친 놈이 이 밤중에 여길 올까.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십중팔구 전기가 귾어지는 탓으로 평소에도 9시면 점호를 취했지마 오늘은 아직 8시도 안된 시각이다. 난로에는 마른 참나무가 탁탁거리고 그 옆 침상 위에는 호롱불을 가운데 놓고 모레면 다른 연대로 전출가는 말년 병장들이 화기애애하게 소주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민은 불안했다. 두런거리는 병장들의 말소리 너머로 또다른 소리들이 섞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이틀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틀 전 야간점호가 끝나기 무섭게 이충효가 소대의 상병들을 몽땅 불러나갔을 때부터였다. 그는 군화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나서 자기 손으로 한 달이나 일찍 계급장을 붙인 모자를 눈썹까지 푹 눌러쓰면서 명령했다.
"상병들 다 나와!"
조립식 막사의 얇은 벽을 ㅅ이에 두고 병장들은 소주를 즐기고 있었고 밖에서는 상병들이 엎드려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이 독기 어린 이충효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 상병놈의 새끼들! 고참들이 다 전출간다고 너그 세상 왔다싶으나? 그렇기 군기가 빠져갖고 전방에 들어가봐라! 오발하고 지뢰 밟고 다 뒤져서 나올끼다, 아나?"
듣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이충효 저 씹새끼! 전방에만 들어가봐라. 확 긁어버릴 테다. 개새끼."
"임마야, 그카지 마래이. 참으모 될 꺼 갖고 그라머 니도 남한산성 간다 아이가?"
"니기미, 내 기분이 그렇다 이 말이지 누가 그렇게 꼭 할 걸고 했나?"
"최 상병님 말이 맞습니다. 김 상병님, 그냥 꽉 참으셔야죠."
"중대장님께 면담신청이나 할까?"
"이 자슥, 장교들도 다 알면서 그냥 내비두는 거 아이가? 생각해보래이. 고참 몇이가 중대병력을 꽉 틀어잡기만 하모 장교들은 얼매나 편할끼고? 저그들은 고참 몇이만 살살 달개믄 끝나는기라. 내 겉에도 가만 놔두겠다."
"한 상병님은 왜 당하고만 있을까? 그 양반만 나서도 한바탕 해볼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가만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겠지요."
"군대 좆같네, 씨팔."
"우리가 사람이냐, 어디? 개지."
"이충효 그 씨발놈만 없이모 군대생활 풀릴낀데. 고참들 다 전출가봐라. 벌써 저카는데 앞으로 얼매나 할끼고."
낮에 화목(火木)조로 산에 갔을 때 고만고만한 상병들기리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면서 영민의 불안감은 더욱더 짙어왔다. 졸병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상병들 순서가 끝나면 이충효는 주임 일병을 불러 일병들 군기를 잡으라고 강요할 것임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바람은 점점 심하게 불었다. 몇 잔 마지못해 마신 술 때문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까물까물 정신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내무반 출입문이 쾅 열렸다. 그 서슬에 호롱불이 꺼졌다. 바닥께로 시린 바람이 회오리처럼 밀려들어왔다. 내무반은 암흑 천지였다. 영민은 커다란 그림자가 출입문을 막아서는 것을 보았다. 한 상병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휙 더졌다. 우당당 소리를 내며 내무반 바닥에 떨어진 것은 참나무 장작이었다. 영민은 일어날 수도 그냥 누우 있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한 상병의 음성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그는 병장들 쪽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술이 들어갑니까! 분대장님들은 잠이 와요! 부하들이 개취급을 당하는데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분대장 노릇 다 한 겁니까?"
"한 상병,왜 이러나, 응?"
"몰라서 묻소?"
"다 소대를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소대를 위해서! 이게 소대를 위하는 겁니까. 이게? 있는 동안 그랬으면 가는 마당에라도 고참 도리 좀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물어요? 그래 가는 마당에까지 졸병 등쳐서 사온 술로 파티하는 게 소대를 위해서란 말입니까!"
"……."
"명분 없는 매타작도 하루이틀이지…… 밤마다 이게 뭡니까? 군기고 뭐고 간에 다같이 여까지 와서 고생하면서 꼭 이래야 됩니까?"
"원래 전방 들어갈 때는 그러는 거야."
"좋소! 한번 해봅시다. 원래 그런지 어떤지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내 남한산성 가도 좋소. 졸병놈이 건방지다고 생가하면 붙어봅시다."
한 상병 뒤에 그림자가 여럿 보였다. 상병들이었다. 모두들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이런 대접받으면서도 참고 군대생활 할 사람은 지금 내무반에 들어가도 좋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박 소위가 달려와서 한 상병을 막아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충효는 한 상병에게 걷어채여 막사 뒤에 뒹굴고 있어다. 소대장은 두 사람을 데리고 행정반으로 갔다. 갓 전입온 신병들은 겁에 질려 떨고 영민을 비롯한 일병들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흙투성이가 된 상병들은 한 상병이 돌아올 때까지 침상에 앉아 있었고 병장들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모포를 뒤집어썼다.
다음날 아침, 박 소위는 사태를 무마하기에 급급했다. 모두가 나름대로 소대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없었던 일로 하고 앞으로 잘 지내라. 소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충효는 기가 꺾였다. 며칠 뒤에 한 상병은 소대 서열 2위가 되었고 소대원들은 한 상병을 믿고 의지하려고 했다. 철책 근무를 시작한 이래 이 병장이 사소한 주먹질을 하는 외에 집합과 집단 구타가 사라졌다. 내무생활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때 상병들은 취사장 뒤 양지쪽에 모여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해결했다. 일렬로 세워놓고 따귀를 올려붙이는 어제까지의 집합과는 달랐다.
그러나 소대내의 질서는 잘만 유지되었고 다른 소대에서는 한두 번 씩 다 겪은 오발사고조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소대장 전령인 김 일병은 이 병장이 시킬 때는 끓인 라면에 침을 뱉어 휘휘 저어 갖다주면서도, 소대장의 라면을 끓일 때에는 시키지 않아도 취사병에게 얻은 파와 고춧가루를 넣어 한 상병 몫까지 한꺼번에 끓이곤 했다. 영민은 저도 몰래 킥킥거렸다.

"야, 김영민!"
"예? 예!"
"뭐가 우습아서 혼자 비실비실 웃노?"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병장이 심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등신 같은 자식 하며 혀를 끌끌 차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참이 뭐지?"
"하느님과 동기동창입니다."
"고참이 죽으라 카면?"
"시늉이라도 냅니다."
"고참이 신나게 패면?"
"좆나게 맞습니다."
"고참이 헬기 타면?"
"쳐다보고 손 흔듭니다."
"음, 좋았어. 내가 며칠 남았지?"
"예, 144일 남았습니다."
"내가 근무 서는 거에 대해서 우째 생각하지?"
"말도 안됩니다."
"그럼 우짜지?"
"……."
"알아서 해라. 니는 자믄 안된다."
"알았습니다."


이 병장은 방한복 속에 숨겨온 판초를 꺼내 덮어쓰고 근무호 구석에 웅크렸다. 근무호에는 졸병들과 고참들이 함께 투입되는 데다가 같은 분대여서 영민은 이틀에 하루꼴로 한 상병과 함께 밤을 새우곤 했다. 그는 필요없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자기의 신상에 대해서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주로 영민의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하지만 침울한 성격은 아니어다. 아군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면 그는 영민을 부추겨 고고를 추곤 했다. 4박자춤이라는 재미있는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담배도 함께 피웠고 새벽이 되어 속이 쓰리면 숨겨온 건빵도 함께 먹었다.
영민은 혹시나 싶어 가슴께를 더듬어보았다. 한 상병이 맡기고 간 메모철이 없어지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야전잠바와 방한복을 입고 있는 탓으로 전투복 상의 호주머니에 넣어둔 메모철의 감촉이 와닿지를 않았다. 있을 거야. 아까 근무 들어오기 전에 확인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도대체 어딜 간 것일까? 어째서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갔을까? 영민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왠지 소름이 끼쳐왔다.

연대 보안반의 찝차가 소초 막사 앞에 멈춰 섰을 때 한 상병은 마악 대공초소로 주간근무를 나가고 없었다. 영민은 그때 제설작업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허리에 권총을 찬 대위가 들어왔다. 대위가 권총을 찬 것을 영민은 처음 보았다. 그는 대뜸 한 상병을 찾았다. 영민은 한 상병 대신 주간근무를 서기 위해 대공초소로 올라갔다. 그는 멍하니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상병님."
"웬일이야?"
"내려오시래요. 누가 찾아왔던데요?"
"날? 누가?"
"모르겠어요. 대윈데…… 권총을 차고. 소대장님이 완전 고양이 앞의 쥐던데요?"
순간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영민은 보았다. 그는 조금 창백한 안색으로 되물었다.
"차번호 봤니?"
"아뇨."
그는 영민을 호 안으로 불러들여 M60기관총의 안전장치를 채우고 수류탄과 실탄 등속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면서 인계했다. 하지만 그런 동작은 건성일뿐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영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영민은 왠지 몸이 오그라 들 것만 같았다.
"영민아."
"예?"
"내가 나쁜 사람 같니?"
"아, 아뇨. 천만에요."
"그럼 이유 묻지 말고 내가 시키는 일을 좀 해줄래?"
"뭔데요?"
"아무한테도 얘기해선 안돼. 그리고 누가 봐서도 안되고 말야."
"……?"
"잘못하면 네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할 수 있어요."
"정말이니?"
"그럼요."
그는 편지 몇 장과 메모철, 그리고 수첩을 꺼냈다.
"내 말 잘 들어. 시키는 그대로 해야 해."
"예!"
"네가 이따 점심밥 먹으러 내려가서말야…… 내 관물대를 봐. 내 칫솔 알지? 그 빨간 색…… 그게 있으면 이걸 그냥 가지고 있어. 만약 칫솔이 없으면 이건 다 태워버리고, 응, 알았지?"
"알겠어요."
"만약 칫솔이 없으면 내가 못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내 개인 소지품…… 내복, 커피, 책, 네가 다 가져. 더블백 밑에 보면 돈 3만원 있으니까 그것도 쓰고."
"무, 무슨 일이에요?"
"그동안 고마웠다. 넌 자신감만 가지면 뭐든 할 수 있는 친구야. 건강하게 잘 지내. 그리고 …… 들키면 안된다, 응?"


끝이었다. 한 상병의 뒷모습은 그답지 않게 쓸쓸하고 작아보였다. 내려가 보니 칫솔은 보이지 않았다. 콧날이 시큰했다. 고참의 관물을 챙겨둔다는 핑계로 더블백을 열어보았다. 책과 커피와 돈, 내복. 영민은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것들을 한 상병의 더블백 속에 넣고 꽁꽁 묶어버렸다. 그러나 한 상병의 당부를 완수할 수는 없었다. 바로 제설작업을 나갔고 돌아오자마자 저녁 먹기 무섭게 근무투입 시간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영민은 수업과 편지를 자신의 백 속에 넣어 두고 메모철만 호주머니에 챙겼다. 어쩐지 그것이 제일 위험한 것 같아서 잠깐 화장실에 들러 태울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투입 직전의 화장실이 너무 붐벼서 그마저 여의치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쓰레기장에서 태워버려야겠다. 그는 근무호 앞에 거치해둔 소총 개머리판에 철모 끝을 얹고서 살며시 엎드렸다. 옷을 잔뜩 입었는데도 어디론가 한기가 스며들었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잠이 쏟아졌다. 아, 오늘 일과는 너무나 힘들었어. 다섯 시간 자고 8시에 기상해가지고 밥먹자마자 한 상병님 대신 오전에는 대공초소 근무 섰지, 오후에는 제설작업 했지. 그리고 나서 곧장 여기로 왔으니까. 어제도 그랬어. 사단장인가 헬기 타고 이 위로 지나간다고 하루종일 막사 바깥 청소하고 순찰로에 얼어붙은 눈을 야전삽으로 쪼아내느라고 옷이 흙투성이가 되었지. 한 상병님이 있으면 교대로 조금씩 잘 텐데…… 내일은 내가 물당번이니까 개울에서 취사장까지 50바께쓰나 날라야 돼. 오후에는 부식조 나가야 하고 총기 청소도 해야 할 텐데……어디선가 한 상병의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육군 정량은 7시간이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찾아먹어야 한다구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끝이니까.


5

“자알 한다. 자알 해.”
충효는 눈을 떴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화다닥 판초를 걷고 일어섰다. 근무호 뒤쪽에 소대장이 쭈그리고 앉아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돌아보니 김영민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충효는 김 일병의 엉덩이를 뻥 찼다.
“이 자슥 이거…… 임마! 니까지 자믄 우짤끼고…… 아이구 이 새끼…… 미안합니다. 소대장님.”
그는 멋적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박 소위는 픽 웃고 있었다. 그는 소대장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소대장님도 차암. 오시려면 인터폰이라도 좀 하셔야지요. 쪽팔리게…….”
“왜 안 했겠어? 내가 나오자마자 강 하사가 했겠지. 못 들었단 소리는 않구서, 쯧쯧.”
“어휴, 미치겠네. 저놈아 저거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걱정 마. 내가 어디 순찰 다니나? 자는 아들 깨워서 커피 먹이러 온 거지.”
따라온 김 일병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따라주었다. 커피를 후룩후룩 마시면서 충효는 박 소위에게 물었다.
“뭐 좀 알아보셨입니꺼?”
“뭐?”
“한만수 말입니다.”
“글쎄?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아까 지휘보고 할 때 물어봤는데 중대장도 모르더라구.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그렇지만 좋은 일이면 그렇게 쉬쉬하겠어?”
“혹시 지난번 대남방송에 대한 설문조사, 그거 잘못 쓴 거는 아입니까?”
“아니야. 그때 내가 대충 훑어봤었는데 별 이상이 없던걸?”
“그라모, 이 산꼴짝에서 무신 일이 있다고 데려갔겠입니꺼?”
“모르지…… 하긴 한만수 걔…… 이런 데서 썩기엔 아까운 놈이었지. 안 그래?”
“하기사…….”
“그건 그렇고, 어찌됐거나 그 때문에 국방부 시계가 더 빨리 갈 일은 없는 거 아니야? 이 병장도 말년에 몸조심하라구. 내가 봤기에망정이지…… 군기교육대 체질 아니면 하나씩만 자야지.”
박 소위가 가자마자 충효는 김영민을 불러세웠다. 소대장에게 약점을 잡혔으니 며칠 기죽어 지낼 수 밖에 없다. 대가를 치러줘야 되지 않겠어? 그는 김 일병을 노려보았다.
“야, 고문관!”
“옛!”
“철모 벗어!”
우선 한대 귀쌈을 올려붙였다.
“똑바로 서!”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묵직한 촉감. 역시 사람을 치는 건 이런 맛이다. 충효는 어둠 속에서 미소지었다.
“차렷.”
“열중 쉬엇.”
“찻, 열.”
“심어!”


좁은 근무호 한켠에 원산폭격을 시켜놓고 충효는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온통 먹물을 풀어놓은 꼴이었다. 빌어먹을…… 말년에 재수 더럽군. 오늘은 되는 일이 없어. 신병 보충받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A급 근무 때마다 이 지랄 해야 하나? 강 하사 자식보고 교대로 서자고 할까? 하기야 거꾸로 매달아도 이젠 넉 달뿐이야. 국방부 시계는 이 시간에도 까딱없이 가니까 걱정할 건 없어.


충효는 가슴이 설레었다. 사단사령부의 그 넓은 연병장에서 전역 신고 마친 다음에 예비군 모자를 휘익 집어던지는 맛은 어떨까? 그 시간만 지나봐라. 장교고 나발이고 아무 눈치볼 일고 없다. 사회 나가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나기만 하면…… 어이, 박형, 당신 현역 때 장교라고 병들 뺑뺑이 얼마나 돌렸나? 흐흣…… 새끼들. 현역이니까 내가 설레설레 알아서 기는 거지 늬네들이 별 볼이 있어서 그런 줄 알면 착각이야. 잘해보라고.
충효는 벌써 예비군복을 입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만을 아니었다. 한만수처럼 돌아갈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이 들어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네에서 구멍가게 만한 슈퍼마켓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하려면 차라리 공돌이가 되는 게 낫지 월급도 안 주는 좁쌀영감 밑으로 기어들어가진 않겠어. 친구놈들도 이젠 대충 취직들을 했을 테니 그전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닐 수도 없고…… 제기랄, 머리나 좋게 나아주었으면 대학 가서 지금쯤 두꺼운 책이나 끼고 계집이나 낚으러 가닐 텐데 말야.
문득 여자의 살냄새가 그리워졌다. 대구 바닥에서 이름높은 자갈마당부터 휴가길에 들른 영등포 역전까지 그는 꽤나 여러군데의 사창가를 섭렵했었다. 두 달 전에 포상휴가 다녀오는 길에는 마장동에도 들른 적이 있었다. 욕정은 끝없이 솟아나고 해결하는 데는 돈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데 있는 계집애들은 괜히 콧소리만 질러댔지 은근한 맛이 없었다. 돈 안 들이고 해결하려면 장가를 드는 수밖에 없는데 좁쌀영감이 덜컥 장가밑천을 대줄 리도 없고 보면 뭐빠지게 일하더라도 몇 년은 걸릴 것 같았다. 빌어먹을…… 사회에 나가서도 육군 병장만큼 편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아예 사회에도 계급이 있어서 죽을 때까지 병장만 해먹었으면 좋겠다.
그는 끙끙 용을 쓰고 있는 김영민의 엉덩이를 슬쩍 걷어찼다. 모로 처박혔다가 헐레벌떡 일어나 다시 머리를 박는 영민을 보면서 그는 피식 웃어버렸다. 도대체 얘는 뭘 하면 잘하나? 벌써 반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신병 때나 거기서 거기라니까. 안되는 놈이야. 패기도 없고 오갈 데 없는 고문관이지. 첨에 애인인지 동생인지 하는 계집애 사진을 안 보여주겠다고 버틸 때는 제법 물건인가 싶었는데 말이야. 용감해서가 아니라 뭘 몰랐을 때라서 그랬나? 이등병이라 재수없다고 손을 안 봐줬더니 영 개판이라니까.
충효는 자신의 졸병 시절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모질고 악독한 고참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내가 일병 때만 해도 대단했었지. 요즘은 거기 비하면 너무 좋아진거야. 이틀이 멀다 하고 집합, 줄빳다, 요새 그랬다가는 당장 난리가 나지…… 내가 애들한테 한 건 당한 것에 비하면 반도 안 돼. 근데 날보고 악독하다느니 어쨌다느니 수군거리는 놈이 있으니 말도 안되는 일이야. 내가 그 정도도 안 했어봐. 일찌감치 개판이 되었을걸? 군대는 계급이고 질서 그 자체라구. 누구나 강제로 끌려온 군대고 하기 싫은 일뿐인데 그게 없어봐, 되는 일이 뭐가 있나? 요새 졸병놈들이 꼭 그래. 고참 보고 아침에 인사를 제대로 하나, 배식할 때 건더기를 하나라도 더 뜨기를 하나?이건 이등병이나 병장이나 위아래도 없어. 단 한만수놈 때문이야. 그 자식 때문에 잠깐 손을 놨더니 그렇게 변해버린 거야. 김영민이 같은 애가 왜 생겨? 쟨 이등병 때부터 조졌어야 해. 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내무반 정리 시켜놓으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군화 끝선 하나 못 맞추지, 톱질도 제대로 못하지. 깡다구도 없지…… 하긴 전투력 경연 대회 땐 그럭저럭 따라오기는 했는데, 그게 신통하단 말이야. 대대장이 하도 족쳐서 그랬나? 맞아! 소대에서 가만 내버려두는 바람에 저렇게 된 거야. 날 때부터 고문관은 아니라니까. 눈에 불이 번쩍 나게 뺑뺑이 돌리면 저런 애도 하루아침에 싹 달라진다구.

6

“넌 자신감만 가지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친구야.”
영민은 이를 악물었다. 얼어붙은 땅바닥에 이마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고 허리가 끊어질 듯 저렸지만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난 해낼 수 있어. 이 병장 앞에선 엄살 부리고 싶지 않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장딴지에 있는 힘을 다 넣었다.
“군대일은 너나없이 힘들어해. 하지만 힘들다고 비굴해지면 정말로 개가 되고 말 거야. 드러나게 반항하지 않고 힘든 일 하면서도 생색내지 않고, 그리고 개인적인 안락함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걸 알아둬. 장교든 고참이든 마찬가지야.”
영민은 항변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에요, 한 상병님. 정말 본의 아니게 깜빡했다구요. 돼지같이…… 이 병장이 저 혼자만 판초 쓰고 자는데 내가 깜박한 건 별로 죄될 것이 없잖아요. 그리고 난 이제 그리 약한 놈이 아니라구요. 난 알아요. 내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지 스스로 할 수 있어요. 봐요. 지난번에 한 상병님 낙오할 뻔했을 때 말예요. 내가 한 상병님 총을 한참이나 들고 달렸다구요. 목에서부터 흐르는 땀이 코끝에 매달렸다. 속옷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영민은 사단 사령부로 넘어가는 도토리고개를 달리고 있었다. 13킬로그램이 넘는 군장이 등을 짓눌렀다. 물이 가득한 수통과 대검의 무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께를 긁어댔다. 철모에 가리운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흐르고 전투복 솔기 사이로 시큼한 땀내가 올라왔다. 장딴지가 팍팍하게 쥐가 날 것 처럼 저렸고 군장끈과 소총 멜빵에 눌린 어깨는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5분 먼저 출발한 6대대 병력이 우쭐우쭐 코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남은 거리 4킬로, 현재 시간 34분!”
분대장의 구령은 경쾌했다. 이제 6대대를 따라잡고 고갯마루에만 올라서면 만점은 따놓은 당상이야. 영민은 신이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상병의 호흡과 보폭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바로 앞에서 달리는 영민의 뒤꿈치를 두 번이나 밟았다. 그는 2열종대의 좌측 맨 뒤였는데 언제부턴지 줄곧 오른손으로 군장 아랫부분을 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왼손에는 소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세로는 상체를 전혀 쓸 수가 없을 터였다. 영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뒷모습을 보니 이충효도 꽤나 힘겨워 보였다. 그는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내려다보고 달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도토리고개이지만 결코 뛰어서 오르게 만만치는 않았다.
“자! 포상휴가가 보인다! 힘을 내!”
분대장의 음성을 들으면서 영민은 자신이 이처럼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만일 60분 안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면 이건 전화위복이야.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3주 동안이나 연습을 했는데 그럴 리는 없어. 마지막 연습 땐 59분 40초 밖에 걸리지 않았잖아? 분대장은 구령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숨이 가빠왔다. 이럴 땐 생각을해야 된다. 영민은 누이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포상휴가만 나갈 수 있다면…… 첫 구보 때부터 세 번이나 낙오를 한 내가 구보를 잘해서 포상휴가를 간다? 그는 뒤를 돌아보앗다. 아무래도 한 상병님이 좀 이상해. 저럴 리가 없는데. 수요일 오후마다 대대본부에 내려가서 뛴 소대 단위 구보에서 내가 연속 세 번 낙오하고 나서 실컷 기합을 받은 후 밤늦게 올라왔을 때 내게 가르쳐준 이치를 스스로 못 지키다니?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구보가 선착순이니, 아니면 단체경기니?”
“단체경깁니다.”
“정말 그러니?”
“예.”
“그러니까 넌 낙오할 수밖에 없는 거야.”
“……?”
“구보는 말야…… 선착순이야. 그것도 가장 잔인한 선착순.”
“예?”
“생각해봐. 보통 선착순은 1등만 살고 나머진 다 죽는 게임이지? 근데 맨 꼴찌만 죽고 나머지는 다 사는 선착순이 있다고 해보자. 하나는 반드시 꼴찌를 하겠지?”
“예.”
“산 사람들이 꼴찌에게 뭐라고 하겠니?”
“병신 같은 놈…… 그러겠죠.”
“하지만 원망하진 않겠지?”
“고맙게 생각하겠죠.”
“그래, 그게 다른 점이야. 보통 선착순에서는 1등이 원망을 듣지. 저 새끼만 없으면 내가 살 텐데. 개새끼, 좆나게 잘 달리네. 이런 식으로 말야. 하지만 구보는 꼴찌 선착순과도 달라. 꼴찌는 경멸당하고 또 저주받고 원망받고 하여튼 나쁜 건 다 그놈 탓이 되지. 왜냐? 그건 꼴찌 성적이 전체성적으로 되기 때문이야. 잔인하지?”
“예.”
“구보가 단체경기라는 건 저 높은 데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소리야. 직접 뛰는 우리에겐 정말 잔인한 선착순이지. 낙오하는 놈 혼자 죽는 선착순 말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소대가 몇 명 뛰었니?”
“30명이요.”
“선착순 하면 29등 할 자신 있니?”
“예. 29등이라면…….”
“그런데 넌 왜 맨날 제일 먼저 낙오하기 시작하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넌 강박관념 때문에 낙오하는 거야. 스스로 못 뛴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은 다 너보다 잘 달리는 것 같고. 잘 달리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첨부터 주눅이 드는 거지. 하지만 완전군장을 하고 10km를 달리는 동안 낙오하고 싶은 유혹에 한 번이라도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어. 당장은 편하게 될 테니까 말야. 낙오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어. 아무도 낙오하지 않으면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까 제일 못 달리는 사람이 반드시 낙오를 하게 돼. 그러면 나머지는 한숨 돌리는 거야. 갤 끌고가려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으니까. 속으로는 고맙지.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낙오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거야. 말하자면 누구나가 다 남이 낙오하기를 바라면서 달리는 것이지.”
“그래요. 하지만…….”
“넌 잘 달리려고 하면 안돼. 29등을 목표로 달리란 말야. 하나가 낙오하면 그 다음엔 28등을 목표로 하고. 어때? 29등이나 28등은 할 수 있겠어?”
“예. 그 정도라면…….”
“됐어. 그럼 넌 낙오를 안하게 될 거야.”
“근데 한 상병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달려요?”
“잘 달리긴? 난 늘 꼴찌에서 두번째를 목표로 잡고 달렸을 뿐이야. 꼴찌선착순에서 이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바로 그것이니까.”


영민은 8등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사단사령부에서 나온 시험관들이 하필 영민이 속한 분대에 동그라미를 그렸을 때 운명은 결정되었다. 분대장과 나머지 일곱 명의 고참들 모두가 적이 된 것이다. 3주 동안 구보 연습을 하면서 영민은 한 번도 8등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오늘 9등을 하면 대대의 불명예가 모두 내 탓이 된다. 영민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런데 잘못하면 한 상병님이 9등을 하게 생겼으니……. 갑자기 뒤가 허전했다.
한 상병이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 군장이 삐딱하게 매달려 있었다. 오른쪽 어깨끈이 끊어진 것이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분대장이 한 상병의 소총을 빼앗았다. 영민은 그의 철모를 받아들었다. 한 상병은 군장을 어깨 위에 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오는 흐트러지고 자신감은 땅에 떨어졌다. 코앞에 보이던 6대대 병력이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다행히 고갯마루부터 사령부까지는 완만한 내리막과 평지뿐이어서 한 상병은 낙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완전히 풀린 낙오병 하나를 밀고 끌고 가는 6대대 병력의 발뒤꿈치를 밟다시피 사령부 테니스 코트에 들어섰을 때 시험관들은 영민의 등을 탁치면서 스톱워치를 눌렀다. 영민네는 한덩어리가 되어 쓰러져 누웠다.


60분 24초. 한 상병의 등뒤에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그는 테니스장 화장실 쪽으로 군장을 들고 사라졌다. 사단 직할의 수색대대를 포함해서 17개 대대 중 2등이었다. 1개 대대에서 1개 분대씩 무작위 추출된 선수들이라 다 마찬가지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중대장의 위로를 뒤로 하고 영민은 한 상병을 찾아보았다.
그는 양지쪽에 앉아서 군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등이래요. 군장만 끊어지지 않았어도…….”
한 상병은 맥빠진 웃음을 지으며 영민에게로 군장을 던졌다.
“봐!”
영민은 눈을 의심했다. 끊어진 군장 끝의 안쪽 면이 깔끔하게 잘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나머지 부분은 군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서서히 끊어져 나간 것임에 분명했다.
“아니! 누가 이런 짓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왜요?”
“말할 필요가 없어. 남을 흙탕물에 밀어넣다가는 자기 옷까지 버리게 되는 법이니까 말야.”
“무슨 소리에요?”
“곧 알게 될 거야. 범인은 우리 가운데 있어.”
“설마?”
“설마가 아니야. 포상휴가는 1주일뿐이지만 남은 군대생활은 6개월이니까, 6개월을 편하게 지내는 쪽을 택하는게 당연하지 않아?”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이 그의 흰 얼굴에 쏟아졌다.
그는 예언자처럼 말했다.
“대가를 받게 될 거야, 반드시.”


정말 금방 대가를 받았다. 화풀이주 겸 위로주 겸 인솔 나온 박 소위가 사준 막걸리를 몇 잔 걸치고 대대본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대대장의 불호령을 맞은 것이다. 산악의 가을밤은 이미 차가웠다. 영민은 이른다 ‘빤빠물포’의 진수를 맛보아야 했다. 돌밭 같은 대대 연병장. 빤쓰 바람의 아홉 사나이는 개처럼 뒹굴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낮은 포복 앞으로, 높은 포복 앞으로! 뒤로 취침, 철조망 통과 앞으로! 짠밥 찌꺼기가 심심찮게 떠다니는 개울에서 물포복을 하면서 영민은 무궁화 두 개의 위력을 절감했다. 대대장은 술이 취해 있었다.
“군대에서 2등은 필요없어! 이 자식들…… 무얼 잘했다고 술까지 처먹고 들어와? 나 같으면 임마, 사령부서부터 낮은 포복으로 기어들어왔을 거야! 정신상태가 그 모양이니까 2등밖에 못한 것 아니야?
역시 너희놈들은 대접해주면 안되는 놈들이야! 그저 개돼지 다루는 것같이 차고 때리고 해야 돼! 이 자식들아, 한 달 가까이 비오큐에서 재우고 쌀밥에 기름끼 멕였으면 뭔가 보답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배때기에 비계가 꼈어! 내가 그걸 다 빼줄 테다. 알았나?
뭐하는 거야? 너희놈들 목욕하라고 물 속에 처박은 줄 알아? 포복 앞으로! 어이, 당번! 바께스 가지고 와. 너희들은 철조망 통과!“
돌아눕자 밤하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개울물과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눈을 쓱 닦았다. 맑은 가을 밤, 화사한 별무더기가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대대장 당번이 바께쓰로 벗은 몸 위에 시린 개울물을 퍼부었다. 그때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어머니이!”


성한 데 없이 긁히고 벗겨지고 멍든 몸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영민은 밤새워 필기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두 시간이나 화풀이를 한 대대장은 사격과 필기시험마저 제대로 못 해낼 경우에는 모조리 영창을 보내버리겠노라고 으르릉댔다. 상병놈이 군장 하나 제대로 준비못했다고 이충효는 한 상병을 불러냈다. 눈두덩이 시퍼래서 돌아온 한 상병은 밤새 필기시험 교관 노릇을 했다. 보람이 있어선지 이틀 뒤에 있은 사격과 필기시험에서도 각각 2등을 한 영민의 부대는 결국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영창을 보내겠다던 대대장은 어렵게 구해왔노라고 생색까지 내면서 걸쭉한 밀조 막걸리로 회식을 열어주었다. 취사병들이 사병 부식으로 나온 돼지고기를 몇 덩이 삶아왔다.
“그날은 많이들 아팠지? 허허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응, 남은 과목 잘하도록 내가 용병술을 쓴 거야. 결국 이겼잖아? 난 이길 줄 알았어. 이 막걸리 좋지? 내가 그날 밤에 미리 이야기를 해서 준비시킨 거라니까, 하하하…….”
한 상병은 술을 억병으로 마셨다. 그러나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며칠 뒤 분대장과 이충효는 사단장 표창을 받고 일 주일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한 상병은 소대원들의 동정을 받았다. 영민은 군장에 칼질을 한 것이 이충효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증거가 없었다. 어쩌면 철책 투입 전의 그 반란이 한 상병에게는 이충효에 대하 개인적인 응징일 수도 있었다.


잔뜩 피가 몰렸는지 머리가 우지끈거리고 귀에서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영민은 뒤로 맞잡은 손을 풀러 눈으로 흘러드는 땀을 훔쳐냈다. 힘들지 않아요. 그날 도토리고개 위를 달릴 때의 한 상병님만큼은요…… 어지러웠다. 근무호가 빙긍빙글 돌아갔다. 그때 이충효의 음성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그 자식…… 꽤 오래 버티네? 음, 좋았어. 군기 들면 안되는 일이 없다니까…… 그만 일어서!”
영민은 모로 쓰러졌다. 근무호의 지붕이 바람에 술렁이고 있었다.

7

이충효는 52번 투광등을 정조준했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가슴속이 서늘해왔다. 감았던 왼쪽 눈을 떴다. 가늠자 구멍 안에 들어와 있던 투광등이 밖으로 비껴나갔다. 다시 눈을 감았다. 투광등은 그대로 가늠쇠 끝에 얹혀 있었다. 저것이 간첩의 머리통이라면…… 빌어묵을 놈의 간첩이 왜 안 오나? 몇 사단이라고 했지?…… 간첩이 넘어왔는데도 그걸 못 잡고 말았다고……병신들……제발 나한테만 걸려들어라, 틀림없이 죽여줄 테니까.


간첩을 잡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였다. 그런 일은 이야기 속에서만 있었다. 언젠가 한강 어귀에서 간첩을 사살한 일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지만 동부전선은 사정이 달랐다. 곳곳의 지뢰밭. 한 뼘의 빈 곳도 없는 철책. 험악하기 짝이 없는 지형, 추위, 도무지 파고들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책선은 태평성대였다. 오발사고를 빼면 사건이라고는 없었다. 그곳은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받는 2년동안의 힘겨운 훈련으로 지친 몸을 달래는 휴식처였다.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곳. 높은 사람 행차나 주책없이 쏟아지는 눈 때문에 정규 취침시간을 빼앗겨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밤에 근무호에서 자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도 하나만 확실히 깨어 있으면 순찰장교도 겁나지 않았다. 더욱이 상급부대 순찰대가 지나가면 인터폰으로 미리 연락이 오니까.
와야 잡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충효는 허리를 펴고 내다보았다. 좌우로 늘어선 투광등은 끝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아놓은 꼬마전구처럼 어둠 속의 투광등 행렬은 아름다웠다. 검바우산의 북쪽 비탈을 가로지르는 불의 행렬은 멀리 어둠 한가운데서 갑자기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우리 충효가 군에 가더니 정말 사람이 되었는갑다.”
국민학교 다닐 때 가끔씩 개근상을 타온 외에 상이라고는 받아본 일이 없는 그가 사단장 표창을 받아 포상휴가를 갔을 때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이름을 잘 붙여주었지만 사실 충효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군대 와서 3년 썩으니까 충성은 남들만큼 했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효도라 할 만한 일을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흐흣…… 뭐 잘난 게 있어야 남들보다 충성도 더 하고 효도도 하지…… 간첩이나 한 마리 오면 또 몰라. 하지만 내 복에 그런 행운이 오겠어? 간첩만 한 마리 잡아보지…… 사단장 표창? 흥, 대통령 표창인들 못 받을까? 게다가 상금을 5천만 원이나 받지, 헬기 타고 휴가가지, 사회에 나가서 출세하지…… 하여튼 끝내주는 인생일 텐데 말이야. 그는 1번 크레모아 잭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나무쐐기로 안전장치를 해놓은 탓으로 잭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하긴…… 알 게 뭐야. 몇십 년 동안이나 한 번도 눌러보지 않고 인수인계만 되었을 텐데…… 이게 터지기나 할는지? 그는 빳빳이 서서 앞만 보고 있는 김영민을 불렀다.


“저기 1번 접근로에 간첩이 오고 있다. 그라모 니 우짤래?”
“누르고 던지고 쏩니다.”
“뭘?”
“우선 1번 크레모아 잭을 누르고, 그 다음에 수류탄을 던지고…… 그리고 소총으로…….”
“이 짜슥아 이거, 말하는 거 보래이. 그거는 교과서에나 있는기고, 임마. 니 만약에 크레모아가 안 터지믄 우짤끼고?”
“안 터질 리가 있겠습니까?”
“안 터질 수도 있다카이! 누가 눌러보기나 했는 줄 아나? 그냥 인수인계 받은기라. 그라이 첨부터 크레모아 누르면 안되는기라.”
“그러면요?”
“잘 보래이. 이 고참이 한수 가르치줄 테니까 저눔아들 오면 보통 몇 인조고?”
“3인좁니다.”
“그래. 3인조 아이가. 그라모 젤 앞에 오는 놈이 철책을 몰래 끊을라카믄 여하튼간에 거기 들어붙어야 될 거 아이가? 다른 놈들은 몇 미터 뒤에 숨어 있겠제? 그라모 얼매나 좋노? 철책에 붙은 놈을 소총 가지고 딱 조준해가지고 단발로 맞추는기라. 그눔아는 뒤질끼고 딴놈은 놀래가 튀겠제? 그때 여유만만하게 크레모아를 타앙 터치는기라. 후폭풍이 여까지 오니까 따악 엎드려서 수류탄 안전핀 뽑아서 휙 던지고…… 그담에 자동으로 놓고 소총을 드르륵 긁어주는 거야. 그라믄 어째 되노? 예광탄이 짝 나가니까. 총알이 어데로 날아가는지 옆 초소에서 보겠제? 그라모 조 위에 대공초소에서 기관총으로 끝내 주는 거지. 살아 도망갈 놈이 어딨노?”
“…….”
“알겠나? 그래만 하모 니는 스타 되는기라, 스타. 상금 타고…… 제대하고 사회에 나가도 팔자 핀다. 강연회나 슬슬 댕기모 끝나는기라.”
“알겠습니다.”
“그라모 순서가 우째 되노?”
“쏘고 누르고 던지고…… 그리고 다시 쏜다…….”
“맞다! 누가 와서 물어보믄 누르고 던지고 쏜다. 그렇게 대답한다 해도 진짜로 간첩이 나타나모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예…….”
“내가 누구냐?”
“예, 소대 왕고참님이십니다.”
“그런데”
“예?”
“이 왕고참이 쫄따구 쏘위한테 쫑코 묵어서 되겠나 안되겠나?”
“죄송합니다.
“니는 내한테 찍힜다, 아나?”
“예, 압니다.”
“반성할 기회를 주까?”
“예.”
“믿어도 될까?”
“됩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좋았어. 소대장은 저 밑에 소초에서 선임하사하고 바둑 두고 있을끼고…… 대대 순찰조 오나, 그거나 잘 봐라.”
충효는 다시 판초를 뒤집어썼다.

8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영민은 52번 투광등을 건너다보았다. 이제 달이 뜨기는 어차피 틀린 일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째서 그동안 편지가 없었을까? 회사를 옮긴 걸까? 그렇다면 영철이라도 연락을 했을 텐데…… 하기야 내가 집안 소식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야 없지. 못난 아들, 못난 오빠니까……. 아버지는 요즈음도 맨날 동네 복덕방에 나가서 화투구경으로 소일하고 계시겠지? 그놈의 부두 하역 일이란 게…… 아버지 허리를 다친 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버렸어. 그전엔 그렇게 활달하고 무섭기까지 하던 분이 갑자기 노인처럼 변했으니까. 어머닌 여전히 새벽 4시에 물건 받으러 나가실 거야. 영희가 아침밥 해서 영철이 학교 보내고 출근하자면…… 또 코피가 자주 터지는 건 아닐까? 바보같이…… 아니야. 나 때문이야. 난 어떤 일도 잘해낸 것이 없어. 차라리 공고나 상고를 갔더라면 좋았을걸. 까짓 재미도 없는 인문계 학교를 다녀설랑…… 차라리 공부 잘하는 영희를 고등학교 진학시킬 생각으로 일찌감치 공장에나 갔어야 했어.
영민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대할 때까지의 반 년을 허송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노가다 몇 번 따라다닌 외에 별로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기술이든 익혀두어쓰면 특수병과를 ?을 수가 있었을 터이고, 그랬으면 군에서 기술을 좀더 닦아서 제대하면 취직도 수월할 것을……. 그는 몇 번이나 그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하게 서서 북한 땅이나 구경하다 제대하는 수 밖에.


편지를 얼른 읽어야지. 그리고 밤새 답장을 생각해두었다가 철수하면 곧바로 써서 보내야지. 뭐라고 할까? 그는 이 병장을 돌아보았다. 아직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고 내려가서 볼까? 아니야, 싫다. 그저 여자라면 좆집이니 깔판이니 하는 말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소중한 편지를 보여줄 순 없어. 그는 잠시만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새 답장이나 생각해두어야겠다. 뭐라고 쓸까? 옳지, 그 이야길 써야겠다.


영희야.
오빠는 굉장히 어른이 되었단다. 봄에 만나면 아마 놀랄 거야. 오빠가 칠칠치를 못해서 너는 걱정을 하겠지만 염려 말아라. 난 아주 잘 하고 있으니까.
이젠 뭐든지 자신이 있어. 지난번에 우리 분대가 사격이랑 구보랑 해가지고 사단에서 일등했는데 나도 한몫을 했다. 그때 잘하면 포상 휴가 나갈 뻔했단다. 나 제대하면 용접이나 뭐 그런 기술 배울 거다. 우리 내무반엔 별 사람이 다 있어. 미장이, 용접공, 재단사 하다가 온 사람도 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기술만 좋으면 월급도 제법 많이 받는데. 너무너무 멋진 고참이 있는데, 한 상병이라고,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 사람도 나보고 프레스나 용접을 배우라고 그래.
미안하다, 영희야.
내가 제대할 때까지만 좀 참으면 될 거야. 오빠가 철이 없어서 네가 너무 속상했을 거야. 난 이제야 그걸 알았단다.
거기까지 썼다고 생각하니 영민은 더 할말이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이 병장을 돌아보았다. 그는 꼼짝 않고 있었다.


“이 병장님, 이 병장님”


영민은 목소리를 낮추어 불러보았다. 작지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영민은 조용히 소총을 집어들고 근무호를 빠져나왔다. 양쪽의 스피커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 주위는 적막했다. 우수수 갈대가 흔들렸다. 일렬로 늘어선 투광대의 행렬은 저 멀리 어둠 한가운데서 끝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 같았다. 영민은 얼어 붙은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순찰로에 내려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이 병장은 계속 자고 있음이 분명했다. 1727번 지주를 한 손으로 잡고 영민은 투광등을 쳐다보았다. 손바닥 위에 불빛이 떨어졌다. 조금 어둡다 싶었다. 바로 아래에 가야겠구나. 그는 발을 내디뎠다. 순간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어둠의 절벽. 불이 나가버린 것이다. 영민은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가슴 밑바닥이 우르르 무너졌다. 소총이 떨어졌다. 그는 1726번 지주를 잡고 일어섰다. 근무호를 돌아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영민은 한동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어떡할까? 다시 올라가서 인터폰으로 보고를 하고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까? 그러다가 오늘밤에 편지를 못 읽게 되면? 그는 망설였다. 그래, 기다려보자. 이러다가 저절로 불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영민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긴 시간이 흘렀다. 아니, 그에게 그렇게 느껴졌을 뿐 사실은 잠깐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철책 가운데를 가로지른 중단철주를 밟고 서서 전구를 매만지던 한 상병의 모습이 생각났다. 만약 필라멘트가 나가버렸으면 어떡하지?…… 아냐, 그렇진 않을 거야. 한 번 만져주기만 하면 될 텐데……


그는 왼손에 쥐고 있던 소총을 순찰로 나무계단에 살짝 걸쳐놓았다. 방한모와 철모를 벗었다. 방한장갑도 벗었다. 실장갑만 낀 손으로 지주를 만져보았다. 희미히게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양손으로 1726번 지주를 힘껏 쥐고 오른발을 중단철주 위에 올려놓았다. 새벽에 속이 쓰리면 먹으려고 방한복 내피 호주머니에 이 병장 것까지 두 봉지 넣어둔 전투식량이 허벅지와 배를 눌렀다. 그러나 방한복을 벗는 것은 너무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는 다리에 힘을 넣었다. 꺽쇠와 철조망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는 왼손으로 꺽쇠를 잡고 오른손을 뻗었다. 손 끝에 갓이 와 닿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얼굴에서는 후끈후끈 열이 났다. 계곡에 습기 가득한 찬바람이 불었다. 왜 전구가 손에 닿지 않을까? 그는 발끝에 힘을 주고 한껏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둥글고 매끄러운 것이 와 닿았다. 전구다! 가슴속에서 희열이 솟아났다. 그러나 전구가 잡히지 않았다. 그제서야 영민은 자신의 키가 한 상병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될 거야…….
그때 아래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총이 미끄러졌나? 그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아! 경보석이 떨어졌구나! 중단철주 위에 포개어놓고 바깥족에 페인트로 새로줄을 그어놓은 세 개의 납작한 돌멩이. 그것은 철책 침투를 발견하기 쉽게끔 설치해둔 보조경보장치였다. 영민은 조급해졌다. 빨리 일을 마치고 제자리에 올려놓아야지. 순찰차가 보면 난리를 칠 거야. 그는 다시 전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9

충효는 눈을 떴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다. 신나는 꿈 같기도 하고 악몽 같기도 하고……. 그는 고개를 휘휘 저어보았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데다 와들와들 떨리기까지 했다. 내가 지금 잠을 깬 건가, 아직도 꿈을 꾸는 건가? 무슨 소리가 났는데……. 그는 천천히 전방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투광등 때문에 제법 훤하던 왼쪽 계곡마저도 마냥 껌껌하기만 했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간첩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소총을 움켜잡았다.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라. 그는 야간 경계수칙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시커먼 그림자가 철책을 넘어오고 있었다. 간첩이다!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가늠자의 야광테 가운데로 그림자가 빨려들어왔다.
타앙 ―
총성이 정적을 뒤흔들었다.
탕, 타앙 ―
가늠자 안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충효는 소총의 안전장치 레버를 오른손 엄지로 힘껏 밀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소총이 좌우로 요동쳤다. 탄창 속에 남아 있던 열일곱 발의 실탄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갔다. 섞여 있던 몇 발의 예광탄이 어둠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는 1번 크레모아 잭의 나무쐐기를 빼내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손이 떨렸다.
콰앙 ―
불꽃과 굉음이 어둠을 찢어발겼다. 흙덩이가 후두둑 날아들었다. 그는 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영민! 야, 영민아! 이 새끼 어디 갔지? 야 임마!”

그는 벌떡 일어섰다.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굉음이 일대를 뒤흔들고 있었다. 인접 초소의 모든 화기가 왼편 계곡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한 것이다. 예광탄이 그리는 붉은 선들이 뒤엉켜 화려한 죽음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영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찰로 계단의 나무 말뚝이 등을 찔렀다. 그는 철책의 쇠그물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 속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버린 듯 허전했다.
52번 투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영민은 미소지었다.
저것 봐. 달이 떴네. 이젠 편지를 읽어야지…… 그런데 무슨 불꽃놀이일까?
유탄 하나가 투광등을 박살냈다.
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부릅뜬 그의 눈 속에서 달이 졌다. <끝>(200X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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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인삼의향기는담장을넘…                   날짜 : 2011-04-11 (월) 17:00 조회 : 5135 추천 : 27 비추천 : 0

 
 
[1/9]  인삼의향기는담장을넘… 2011-04-11 (월) 17:01
웹서핑을 하다가 유시민 대표님의 소설을 찾아냈습니다
 
 
[2/9]  둠바 2011-04-11 (월) 17:47
감사합니다 이귀한것을
 
 
[3/9]  박봉애 2011-04-11 (월) 19:10
유시민 선생, 계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지요.
잘 하면 우리는 작가를 대통령으로 모시게 됩니다.
기대되지 아니한가.

 
 
 
[5/9]  제이 2011-04-12 (화) 23:21
난 몰랐지....

근데 유짱이 진짜 작가이기도 한거야???
 
 
[6/9]  금은화 2011-04-13 (수) 11:54
흐미 좋아라...읽어봐야징..
 
 
[7/9]  박봉애 2011-04-13 (수) 12:52
제이/ 네 그렇습니다.
      <달>은 데뷔작입니다.
      <<창작과 비평>> [1988 여름] 통권 60호에 실렸지요.
      유작가는 등단이후 소설은 쓰지 않고 사회, 경제, 역사, 정치 관련 책만 써오고 있기 때문에
      문단에서는 권외 작가로 분류하고 있겠지요.
      시대적 소명의식 때문에 문학권 밖에서 쓰고 있지만, 그의 글에는 항상 문학의 토대가 있습니다.
      정확한 어휘선택, 문장력과 구성력
      지적인 통찰력, 가슴을 흥건하게 적시는 감수성도 놓칠 수 없습니다.
     
      기대합시다. 복지와 민생문제를 항상 고민하며, 문화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겸비한,
      지적이면서 냉철한 정치력을 갖춘 대통령
      이런 대통령을 .


 



<<창비>> 지난호 목차에서 유시민이란 이름 볼 수 있습니다.

http://www.changbi.com/quarterly/intro.asp?pKind=01&pVOL_ID=60
 
 
[8/9]  박봉애 2011-04-13 (수) 13:01
말은 또 얼마나 잘 합니까. 품격과 논리
적절한 유머를 갖춘. 해박한...
^^
작가들은 대개 눌변이거든요.
 
 
[9/9]  나도한방 2011-04-20 (수) 11:59
고맙긴 한데, 이거 그냥 읽어도 되는거냐? 저작권료라도 내야되는 거 아냐? 일단 읽고 나서 생각하자..ㅋㅋ
 
 
[10/9]  사원진 2011-05-03 (화) 12:56
글이 엄청 드라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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