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의사가 퇴근하며서 들렀다.
"약사님, 요즘 늦게까지 계세요?"
"네. 약사들만 죽어 나네요. 저는 왜 의사 선생님들이 수퍼 판매하라고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도 반대인데. 의협에서는 그렇게 주장하지만......"
그리곤 견디셔 4병만 달래더니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놓고 갔다.
견디셔 값보다 훨씬 많은 2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던지다시피 하고 간 거다. "오늘은 받으세요." 이러면서.
미안한 맘이 들어서였을까?
평시엔 사소한 거 달라할 때 묵인된 동의로써 돈을 주고받고 하지 않는다. 함께 한 지 10년이니, 거의 가족과 비슷하다. 가족한테 돈 받겠나?
아직 젊은 편이지만 의사로서 훌륭하다. 성실하고, 환자에게 많이 친절하고, 무리한 처방 많이 내지 않고 가능한 용법에 맞게 쓰느라 처방이 복잡해지긴 하지만.^^ 또 한 가지, 항생제를 조금 많이 쓰는 편인가 보다. 어떤 환자가 와서 인터넷에서 봤다면서 항생제 많이 쓰는 의원으로 공개되어 있다더라. 이비인후과를 보니 그러려니 이해하고 한편으론 소아 환자가 많은데 항생제는 좀 자제했으면 싶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도 나보다 서비스 정신이 좋은 의사라고 인정한다. 환자의 아픔을 함께 할 줄 아니까. 토요일날 많이 안 좋은 환자가 있으면 특별히 일요일 몇 시까지 오라면서 따로 봐준다. (요건 1석2조의 이득도 있다. 의사 1인 진료건수가 많으면 삭감되는 부분이 있으니 근무 일수를 늘려서 평균을 낮춰야 하는 문제가 있으니까. 약사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인간성도 그렇고 의사로서의 자질도 그렇고 괜찮은 의사다. 약국에 무리한 요구 안하는 한가지만 봐도 인간성 좋다. 별의 별 방법으로 약사 괴롭히는 의사가 있다는 걸 듣고 난 윗층 의사에게 감사해 했다. 이 의사는 자기가 약국할 사람을 널리 구해서 아무 준비없던 나와 운 좋게 인연이 닿아 하게 되었지만(나이도 비슷하고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의기투합), 나한테 10원 한 푼 요구하는 속내를 비친 일이 없었다. 난 병원에 의자 한 개 보태지 않았다. 어떤 인간들은 무슨 기계를 들이는데 어떻게 해달라는 둥, 간호사 하나 월급을 책임져 달라는 둥 별의 별 해괴망칙한 소릴 다 들었지만. 이런 거 해주는 약사들이 속 없는 거지, 그러고 사니까 의사들이 발 바닥 때처럼 여기며 '약싸개'니 뭐니 하며 존중을 해주지 않는 거다.
난 의사 모두를 파렴치하게 보지 않는다. 가까이 이런 훌륭한 의사도 있으니까. 하지만 '의협'이 하는 짓에는 당분간 계속 분노할 것 같다.
(난나님에게 미안하네. 님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해서.^^)
어제 약사회 반회에서 근무현황 조사를 했다. 주로 한 동네(1,2,3동으로 나눠져 있고 일부는 다른 반으로 편입)를 묶어 '반회'란 게 있다. 동네에 약국이 많다. 거의 5~10분 거리에 약국이 있다는 거다.
반장이 조사를 다 한 다음에 반회 게시판에 게시를 했다. 아래와 같았다.
약국명 전화번호 평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
8:30~21:30 좌동 좌동 좌동
9:00~21:00 9:00~15:00 매주9:00~13:00 9:00~13:00
9:00~20:30 9:00~17:00 휴무 휴무
9:00~21:00 9:00~18:00 휴무 휴무
8:30~20:00 8:30~17:00 휴무 휴무
9:00~22:00 9:00~18:00 휴무 9:00~18:00
9:00~21:00 9:00~21:00 매주15:00~21:00 10:00~21:00
8:30~19:00 8:30~15:00 휴무 9:00~12:00
9:00~20:00 9:00~16:00 휴무 휴무
9:00~22:00 좌동 매주14:00~21:00 9:00~22:00
8:30~21:00 8:30~21:00 휴무 8:30~21:00
9:00~23:00 9:00~23:00 휴무 9:00~23:00
9:00~22:00 9:00~16:00 휴무 9:00~14:00
8:30~19:30 8:30~17:00 휴무 8:30~13:00
9:00~21:00 9:00~19:00 휴무 9:00~20:00
격주16:30
8:30~20:00 8:30~16:00 휴무 9:00~12:00
9:00~18:00 9:00~13:00 휴무 휴무
9:00~20:00 9:00~16:30 휴무 9:00~13:00
9:00~23:00 9:00~23:00 매주19:00~23:00 9:00~23:00
9:00~21:00 9:00~17:00 휴무 휴무
8:30~20:00 8:30~16:30 휴무 휴무 이런 댓글이 달렸다.
1. 참 살인적인 근무시간들이시네욤.
2. 약사들 수명이 짧다더니~~~~~~~~~~
3. 이런데 뭐가 불편 하다고.....
이상 근무시간이 외에는 응급실을 가야 하는데 넘 비싸~
이 탓은 의원이 문 닫은 탓, 당번의원 안한 탓이지...
4. 억울해서라도 약사 대통령 하나 빨리 키워야죠.
- 의사 대통령 나오기 전에. 못배운 설움에 공부시키듯.
아버지께서 약대 안간다는 걸 괜히 우겨서 보냈다고
- 약국에 오실때마다 미안해 하셨습니다.
저기 약국 하는 사람들 거의 나홀로 약사들이다. 교대 근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처방 많은 몇 곳만 근무 약사 두고 있지. 그렇더라도 근무 약사는 보통 오후 6,7시면 퇴근한다. 나처럼 보조나 전산직원 하나 없는 진짜 '나홀로' 약사들도 많다. 그리고 밤 10시, 11시까지 하는 약사님들, 거의 여자 약사다. 남편이 놀고 먹는 것도 아니고, 다 자식들 공부시켜야 하기에 저러고 산다. 마누라 고생시키는 놈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일부는 짝꿍 병원이 없어서 낮엔 개점 휴업하고 밤 늦게 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동네 의원보고 저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까? 국민 건강과 편의를 위해서 하라면?
난 이제 화를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난 예전에 "제발 좀 약사들도 삶의 질을 높이자"고 외치던 사람이다. 반회원들끼리 야유회도 가고 가끔 모여 맛난 것도 먹고 스트레스 풀자고 벙개 모임을 자주 갖자고 했다. 그나마 우리 반회가 우수반회라 모임이 그런대로 자주 있는데 그 마저도 나오지 못하고 약국에 매여 있는 분들도 많았다. 결국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소풍 가자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약국 사정이 다 달라서. 나는 "웬만하면 자신을 위한 시간도 가지자고요. 우리가 일하는 기계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하루도 못 노는 건가요?" 이런 식으로 얘기했었는데 그건 누군가에겐 배부른 자의 한가한 소리였다. '니가 처방을 많이 받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지.' 이런 거.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들보다 더 열을 낸 얼마간이었다. 이제 좀 힘이 빠졌고 나도 내 생각만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약사법이야 내년 초나 되어야 통과될지 말지이고, 통과된들 금방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나야 처방 위주이니 곧바로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고, 방방 뛸 일 없는 거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이제 드디어, 마침내, 약사들이 과도한 책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노라고, 자축하자고 축배를 들어야지. 나 혼자라도. 병원 문 닫을 때 같이 닫고 집에 일찍 가서 애들 보고, 공부 가르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자고. 야간엔 수퍼에서 책임져 줄 테니까.
내가 또 한 풀 꺾인 것은 가까운 사람한테 들은 소리가 있어서이다. 원래 선진국으로 갈수록 소위 '전문직'은 희소 가치가 줄어들기에 별 볼 이 없어진다고. 선진국은 마케터니 엔지니어니, 교수니 이런 직업이 돈도 더 잘 벌고 잘 나간다고.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다. 미국 가면 발에 채이는 게 의사, 변호사란 얘길 들은 것 같다.
그렇구나, 이젠 전문직이란 걸로 콧대 세우고 자존심 내세울 일이 아니겠구나... 이게 다 자존심 싸움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만 줄이고 나면, 그 다음엔 욕심을 줄일 수 있다. 전문직으로서, 일정 부분 '희생'까지 하는데 대한 '보상'의 수준을 낮출 수 있겠지. 궁금하기도 했다. 의사들은 맨날 '의료 수가 현실화'를 부르짖던데 얼마면 만족하겠니? 하루에 몇 명 환자를 봐서 한 달에 얼마를 벌기 원하는 걸까? 많을수록 좋겠지만 앞으로는 그 보상치를 낮출 필요가 있겠지.
호기심이 생겨 검색했더니 이런 게 걸렸다. 미국에서 인기있는 50대 직업이 나왔다. 약사 9위, 의사 30위. 미국 사는 형제가 나한테 미국 약사 공부해서 미국오라더니 미국에선 의사보다 약사가 더 인기 좋네. ㅎㅎ.
http://uhakport.blog.me/30108929917
그리고 또... 이 글을 몇 시간째 쓰다보니 동문에서 출발해 서문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다.
영업사원이 와서 몇마디 나눈 것이 도움이 되었다. 돌아다녀 보면 의식 있는 의사들도 많다고, 그들은 지금 잘못하고 있다 말한다고. 하지만 힘이 없고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거라고. 어디나 그렇지만 윗대가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통을 안하는 거다. 그렇게 나대서 훈장 하나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보통 사람(의사나 약사)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욕을 먹건 어쨌건 그렇게 해서 높은 비례 순번이라도 받으면 그들은 성공한 거니까.
나는 몰랐지만, 의사들 역시 예전에 약사한테 당한 게 많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단다. 그래서 그 앙금이 계속 남아 있기에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란다. 이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고 국민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닌데. 하지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ㅠㅠ
의약분업 전과 후, 분명 세대 차이가 있다. 이젠 양쪽 모두 구원을 묻고 상생을 지향하는 새로운 젊은 지도부가 나왔으면 좋겠다. 병원이 많지 않아 국민의 건강을 많이 담당해오던 오래 전 선배들의 노력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자부심조차 나의 자부심으로 착각하던 것을 나는 이제 내려놓으려 한다. 그분들 세대는 이미 끝났으니 우리 세대(의약분업 이후)는 우리의 책임과 몫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어쨌거나 수퍼 판매 되면 하위 제약회사는 많이 정리될 것 같단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MB의 개똥 철학은 오로지 '경쟁력 있는 것만이 살아난다'는 거 같다.
p.s.
오전부터 쓴 것 같다. 일하며 쓰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이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오타나 문맥의 어설픔은 각자 해결하시랍.
아무래도 강제 로그아웃 되었을 것 같다.
다행이다. 복사한 후 올렸더니 역시나 글 쓸 권한이 없단다. 이럴 때 글이 안 날라가게 할 순 없을까?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