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분류학자들에게 대나무는 매우 골치 아픈 존재란다. 대나무는 나무일까, 풀일까? 지구상의 모든 대나무를 확~ 씨를 말려서 해결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상편 글에서 카테고리 분류가 가지고 있는 난점을 대충 말했다. 카테고리 분류틀은 배타적인, 그러니까 필요충분적인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에만 오류 없는 분류가 가능하다. 그런데, 자연현상에서 이러한 필요충분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카테고리 분류틀은 실세계에서는 충족되기 어려운 매우 엄격한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비해 전형성 분류틀은 이러한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사람의 행동을 분류하는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런 문제점 때문에 카테고리 분류의 대안으로 일부 정신장애의 진단에 전형성(prototypicality) 개념을 사용한단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보이는 문제에 대해 필요한 경우 동시에 여러 개의 진단을 부여하는 것이 이 방식의 특징이다.
전형성 분류틀에서는 분류 명칭을 전형적인 특징의 측면에서 정의한다. “전형성”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분류 명칭의 가장 중요한, 또는 가장 빈번하게 나타내는 특징을 말한다. “새”라는 분류명칭을 생각해보자. 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새는 새의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정의할 수 있다.
1. 난다.
2. 날개가 있다.
3. 알에서 부화된다.
4. 부리가 있다.
5. 깃털이 있다.
뭐 이 정도 될까? 이게 다라고 치자. (또, 새를 특징짓는 중요도도 번호 순이라고 치자). 이 다섯 가지로 새를 삼빡하게 규정 또는 정의할 수 있다.
"새"를 카테고리라고 생각해보자. 새가 카테고리 명칭이라면 카테고리 분류틀의 기본 전제에 따라 모든 새는 위의 1, 2, 3, 4, 5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새 아닌 어떤 것도 1, 2, 3, 4, 5 중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모든 새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까? 새 아닌 것들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니다. 새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인 1을 충족시키지 않는 새도 있다. 그런가 하면 1을 가지고 있지만 새가 아닌 것도 있다. 그래서 새에 있어서 "난다"는 특징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그저 ‘대부분’의 새에서 가장 중요한, 즉 전형적인 특징일 뿐이다. 이들 1, 2, 3, 4, 5는 새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배타적인 특징도 아니다. 3은 어류도, 양서류도, 파충류에도 해당된다.
사례를 찾아보자. 가장 새다운 새는 어떤 것일까? 이것을 가장 전형적인 새라고 하는데, 참새가 여기에 해당된다. 위 1, 2, 3, 4, 5 특징(및 그밖에 번외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다 충족시킨다. (그래서 이름이 “참”새다). 그러면 가장 새답지 않은, 가장 덜 전형적인 새는 무엇일까? 펭귄쯤이 아닐까? 이놈은 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1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나름 새는 새다. 자, 이번에는 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1을 가지고 있지만 새가 아닌 놈을 찾아보자. 박쥐나 잠자리가 그렇다. 이놈들은 아무리 잘 날아도 새가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가장 새다운 새도 있고, 가장 새답지 못한 새도 있다. 새 답지만 새아닌 놈도 있다. (근데, 내가 왜 하필 새를 예로 들었지? 미안타). 우리가 흔히 카테고리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분류대상들이 실은 본질적으로 전형성적 개념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봉팔닷컴을 가지고 얘기하자. 어떤 글은 전형적인 정치방글이고(참새처럼), 좀 덜 전형적인 정치방글도 있고(칠면조처럼), 어떤 것은 정치방에 심하게 어울리지 않지만 정치방글일 수 밖에 없는 글도 있을 수 있다(펭귄처럼). 생활방에 있지만 정치방스러운 글도 있을 수 있다(박쥐처럼). 내 말은 이 점을 인정하고 수용하자는 것이다. 봉팔닷컴에 올라오는 글들이 배타적이고 필요충분적인 조건에 의해 확실하게 어느 한 방 소속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마치 모든 글이 그런 것처럼 취급하다 보면 무리가 생긴다. 카테고리 먼저 있고 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글 먼저 있고 카테고리 있다.
그래서 간단한 결론은, 쬐금 느슨하게 가자는 것이다. 어떤 글은 오갈 데 없는 정치방글이고 어떤 글은 생활방의 특징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정치방글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해결책은 하나의 글이 양쪽 방 성질을 다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양쪽 방에 다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혼돈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성격이 복합적이거나 애매한 글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글이 많음 또 어떤가.... 뭐 명백하게 방을 잘 못 찾은 글은 옮겨야 되겠지만...
나는 봉회장의 "복사이동" 선언을 읽고 한편 반갑기도 하고, 한편 감탄하기도 했다.
(글이 통 마음에 안 들어 약간 수정했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