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술술 인생
바위씨는 술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 나름 엄격한 철칙으로 늘 적당량만을 마셨던 바위씨의 술 매너는 그야말로 백점짜리였다. 심지어 대학생 된 기념으로 고향친구들과 술을 마셨다가 안경을 깨뜨린 큰 아들놈을 '자신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녀석은 필요 없다.'는 호통을 쳐서 마나님의 눈물바람도 무시하고 아침 첫배로 쫓아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니 자식들마저 바위씨가 술을 잘 못(?) 마시는 걸로만 오랜 세월 알았던 것.
그러나 나이 60을 넘어가며 어느 날부터 바위씨는 술을 자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인생을 되돌아보니 쓸모없이 허비하고만 살았다는 자책감이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주위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 괜한 강박관념과 서운함을 함께 갖게 되었던 것.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 앞으로 더 당당하게 남이나 자식들 눈치 안보고 잘 살아간다는 걸 보여줘야 하고말고.'
그날부터 바위씨는 작정을 한듯 호탕하게 동네 친구들과 어울렸고 청년들까지 붙들고 밤새워 술타령을 해대곤 했다. 굳은 결심과 의지로 선택한 술은 그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어버렸다. 모두들 몇 시간 마시다보면 쓰러지고 토해내고 슬쩍 집으로 사라져 가버렸고, 흐트러짐 없는 무사의 자세로 않은 바위씨만 혼자 남거나, 젊은 층 한 둘이 눈치 보며 겨우 자리를 지키는 정도가 되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이것들아, 니들 보다 나이는 많지만 더 쌩쌩하단 말이여, 알것냐들?"
집으로 발걸음 띠기 전에 그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주위 사람들은 고꾸라지며 항복을 해대곤 했으니. 그럴 적마다 그는 득의만만한 기색으로 강호무림에서 홀로 살아남은 승리자마냥 불콰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들어서기 일쑤였다.
"어이구, 내가 못 살어. 다 늙어서 뭔 영화를 보겠다고 내가 저 양반 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냐고! 내가 속았지, 속았어. 웬수가 따로 읍네."
바위씨는 서울 자식들 집에 올라와서도 긴장감을 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슬쩍 슬쩍 그 방법을 악용하는 듯 했다.
몹시 무덥던 7월 어느 날밤, 바위씨는 더위에 땀을 비오 듯 흘리는 체질이어서 여름에는 옷을 걸친다는 자체가 큰 고역이었다. 그날은 전주에서 친동생같이 지내는 하씨가 올라와서 기분 좋게 술 마실 핑계가 있었다.
딸이 해주는 안주에 이런 저런 얘기를 곁들여 가며 즐겁고 흔쾌한 한때를 보낸 바위씨, 술이 오르자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답답하다며 2차 장소로 널찍한 동네 공원엘 나갔다.
"야, 얼마나 좋냐, 집이 답답해서 술맛이 안 나더니... 싸나이라면 이렇게 바깥 공기를 마시며 호탕하게 마셔야지, 안 그러냐?"
"네 맞습니다. 정말 밖에 나오니 좋네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슈퍼에 들어가 술 두 병과 새우깡,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공원 정자에 자리하고 앉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주위엔 잠 없는 몇 몇 사람들이 더위를 잊기 위해 벤치에 앉아 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수박을 먹고 있었고 가로등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공원 분위기는 술맛을 달달하게 돋우어 주는 듯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들을 슬금슬금 바라보며 웃는 분위기였는데 바위씨는 별 대수롭잖게 여겼고, 옆자리에 먼저 와서 앉았던 두 노인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었다. 평소 기분이 동할 때만 인정 많은 바위씨의 성품이 술김에 어김없이 매력 발휘되었던 것에 두 노인은 고마워하는 듯 했고, 둘은 분위기와 흥에 취해가며 목청 돋워 한여름 달밤 공원에서 흥커니 권커니 술에 젖어갔다.
새 사업을 시작하여 바쁘게 이리저리 뛰고 있는 하씨가 희망찬 청사진을 내놓으며 자금이 모자란다는 걱정을 해대자 바위씨가 불쑥 일어서더니 소리를 질러대었다.
"야, 임마 넌 왜 이리 배포가 없냐, 엉? 니가 사업을 한다는 데 내가 모른 채 하것냐? 걱정을 말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다 해결해줄 테니……. 그까짓 거 하나 못해서 동생을 기죽일 순 읍지, 암 나만 믿어. 나만 믿으라고!”
이미 술이 바위씨를 9할은 먹어버린 상태라 ‘나만 믿으라'는 말만을 되풀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고, 주변 아파트 창문이 하나둘 열리며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곧 경찰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하씨의 간곡한 하소연이 먹혀들었는지, 바다사나이 바위씨는 태생적 자유로움을 막아서는 동생이 괘씸하긴 했지만 경찰이 온다는 말엔 위기감이 들어 그제 서야 ‘동네 인심한번 야박하다’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열어준 딸은 멍한 표정이다. 바위씨의 옷차림이 기묘했던 것이다. 덥다고 집에서 입고 있던 러닝셔츠에 잘 때 입는 흰색반바지 그리고 흰 양말에 검정구두까지 깔 맞춘 차림에 곤드레만드레 술독에 빠진 붉은 쥐와 같은 형상이었던 것.
"야, 뿌리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막 웃더라. 내가 그렇게 재미있으까? 얘기해도 웃고, 노래 불러도 웃고, 왜 그렇게 사람들이 날 좋아하는지. 괜히 쑥스럽드라고."
"아버지, 정신 좀 차리세요. 아버지 옷차림이 민망해서 비웃은 거예요. 또 목소리는 좀 커요, 촌스러운 사투리 써가며 그 조용한 공원에 나가서 분위기 다 망쳐 놨으니 앞으로 이쪽 아파트 단지 내에서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거라구요."
바위씨를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속옷 차림으로 동네를 당당하게 활보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주저앉아 실실 웃음만 터져 나왔다.
| 
야 기분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