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
호남여인숙에서 드디어 포르노를 보고 눈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친구 한 놈은 여자친구와 사고를 치고 ‘씹’을 해 본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지만 ...
여전히 내 청춘만은 삭막하고 쓸쓸했다 ...
남들 성문종합영어 볼 때 맨투맨 기본영어만 졸라리 뒤적이며 기초만 영원히 기초만 튼튼히 닦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고독했다 ...
... 음 ... 그건 인생의 고독이라기보단 ... 그저, 숫컷의 고독 ...
설상가상으로 드디어 내 짝꿍 꼴남이까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
독서실에서 만나서 여차저차해서 사귄 모양인데 ... 꼴남이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앙증맞은 글씨체하며 간지러운 문장들이 날 하염없이 간질였다.
꼴남이 여자친구가 시화전을 한다기에 같이 가봤다. 오동통통 내 너구리처럼 복스럽게도 생겼더라. 말투는 또 어찌 그리 사근사근 웨하스같던지 ... 꼴남이가 부러웠다.
단짝으로 지내던 4명 중에 2명이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할리퀸 로맨스나 읽으면서 청춘을 흘려보낼거냐! ... 남들은 성문종합영어 보는데 너는 언제까지 맨투맨 기본영어만 볼 거냔 말이다! ...
내 청춘이 참으로 처량하고 한심해보였던지 꼴남이가 너구리에게 청을 넣어 미팅을 주선했다.
궁전제과 ...
누이가 첫 월급 받아 사준 꼬까옷를 입고 머리도 무쓰를 발라넘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 첫 미팅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아서 ... 탁자를 두 손으로 잡고 어떻게 첫마디를 꺼낼 것인가 ... 신중하게 ... 고민하고 있는데 ...
드디어 ...
너구리를 따라 한 여자애가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색 바지에 빨간잠바를 입었는데, 껌을 씹고 있었고, 앉자마자 다리를 꼬고 팔꿈치 한 쪽을 의자위에 올려놓았다. 너구리가 토끼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하이에나를 데려왔다. 그 하이에나는 윤씨성을 가진 날라리였다.
내가 저 빨간잠바를 감당할 수 있을까? ... 기가 팍 죽었다 ...
당시 유행하던 비엔나커피를 시키고 ...
꼴남이와 너구리가 분위기를 풀려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꺼내고 나도 뭐라고 몇 마디 거들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윤양이 내게 지나가는 말로 ...
"그쪽 첫인상이 참 안좋으시네요 ..."
" ...!!!!!!!@$%^&**!@# ??????... "
얼마나 당황했던지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혼미했다. 사춘기 무렵의 나에게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 얼굴은 벌게지고 ... 그냥 ... 쥐구멍! 쥐구멍 어딨어? ... 쥐구멍도 없고 ... 비엔나커피에 풍덩 뛰어들어 거품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궁전'제과의 한없이 어두운 지하감옥으로 숨고 싶었다. 사극에서 퍼마시던 사약이 이보다 쓸까? 곰의 쓸개가 이보다 쓸까? 세상의 쓰디쓴 것들을 다 갖다놔도 이보다 더 쓸 순 없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녀의 평가는 “너는 영원히 총각으로 늙어죽으리라!”는 마녀의 저주였다. 아, 난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한 마리 가련한 깨구락지! ... 사지를 허공을 향한 채 바들바들 떨며 ...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꼴남이랑 너구리는 나를 사지에 혼자 내버려두고 즤들끼리 데이트하러 가버렸다. 남은 우리는 뻘쭘하게 서로 바라보다가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커피숍 ‘베토벤’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차라리 베토벤처럼 귀가 멀어 ‘첫인상이 참 안좋다’는 그 소리를 안 들었다면 ...
궁전제과에서 베토벤 커피숍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윤양이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첫미팅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해피엔딩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1시간 아니 30분이라도 얘기를 나눠야 한다 ... 그런데 쌩 찬바람이 이는 윤양의 얼굴을 보니 ... 5분도 안 돼 커피숍을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
절박하다, 그대! ... 가련한 내 청춘의 촛불은 이렇게 꺼지고 마는가? ...
그때 내 유일한 비빌 언덕은 형이었다. 형은 대학생이었는데 여자들한테 인기가 꽤 있었고 심심찮게 러브레터도 날라왔다. 형 책상서랍에 있던 ‘사랑하는 망팔씨’로 시작되는 낯간지러운 러브레터를 제일 많이 읽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어느날, 형과 라면을 먹으면서 연애의 기술, 특히 대화의 기술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두 가지만 기억해라. 첫째, 그 사람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걸 물어봐. 그리고 잘 들어주는 거야. 둘째, 여자들은 유머를 좋아한다! ... 끝!”
베토벤에 도착하자마자 윤양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피워도 돼죠? ...”
“네 ... 많이 피세 ... 아니, 맛있게 ... 피세요!"
“담배 안 피워요? ... 범생인가보네 ... 존나 공부 잘해요?
“... 아뇨 ... 존나 잘하고 싶은데 ... 좆빠지게 못해요 ...”
그녀는 다리까지 달달 떨어가며 나를 그로기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담배 한 대를 필 동안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온 신경세포를 파르르 긴장해서 윤양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 눈짓 하나, 몸짓 하나를 놓치지 않고 집중했다. 그 뒤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담배를 비벼 끄며 그녀가 물었다.
“저 어때요? ... 존나 발랑 까졌죠? ...”
발랑 ... 까졌냐고? 도대체 이건 무슨 질문인가? 솔직하게 발라당 홀라당 까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까진 건 아니고 약간 벌어진 거죠” 이렇게 수위조절을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까졌다뇨? 청순가련 하세요!” ... 이렇게 쉴드를 쳐줘야 하나? 답은 너무나 쉽지만 대답하기는 참으로 난해한 이 질문 ...
“ ... 왜 ... 그쪽이 ... 발랑 ... 까졌다고 ... 생각해요? ...”
“저 날라리에요 ... 존나 발랑까진 날라리 ... 딱 보면 몰라요? ... ”
“알면서 ... 왜 물어봤어요?”
“에그 ... 여자가 그렇게 물어보면 쫌 알아서 ... 대답해주면 덧나나? ... 참”
뭘 알아서 대답한단 말인가?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못했듯이 나는 까진 걸 까졌다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 그 뒷얘기는 별 게 없다. 미팅 처음 해 본 놈하고 날라리하고 만나서 있어봤자 무슨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녀는 외로웠고, 가슴에 맺힌 게 많아서 사람들 욕을 끝없이 해댔다. 그녀가 자기 친구를 ‘씨발년’이라고 욕하면 나는 “친구 분이 참 씨발년이네요!”라고 맞장구를 쳐주었고, 담탱이를 ‘꼰대 씹탱구리’라고 씹으면 “진짜, 씹탱구리 꼰대시네요!” 하고 화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그중에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질문을 던지고 받아주었다.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얘기 끝에 ...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엄마를 ‘씨발년’이라고 불렀는데 엄마의 죽음이 아버지와 새엄마와의 바람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새엄마에 대한 증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새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를 뀌는 여동생에 대한 미움 ... 가출도 몇 번 했고 ... 엄마가 죽기 전 생일선물로 사준 곰인형과 몸이 아픈 할머니만이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고 모든 게 불만스러웠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윤양은 그때까지 내가 본 여자 중에 욕을 가장 다양하고 찰지고 맛깔나게 잘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머리를 매만지고 손톱을 씹어댔다. 그녀는 껄렁함과 담배와 욕으로 고슴도치처럼 위장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가시를 피해 다가와주기를 바랬다.
훌쩍 두어 시간이 흘렀다. 비엔나커피도 두 잔씩 마시고 ...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내 몸도 녹초가 됐다. 그녀가 할머니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일어섰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 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 ... 애프터 신청 ... 안해요? ...”
나는 ‘애프터 신청’한다는 게 뭔지 몰랐다. 그래서 ... 그게 뭔데요? 물었더니 ...
“애프터 몰라요? ... 에이.피.티.이.알 ... 다시 만나자고 하는 거 ... 참, 나 ... ”
“아, ... 에이.에프.티.이.알 ... 애프터! ... ”
“뭘 그렇게 따져요, 따지길 ... 아무튼 ... 애프터 할거에요, 말거에요?”
“... 애프터 ... 애프터 해요, 그럼”
다음주 토요일날 애프터를 하기로 하고 ...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내가 물었다.
“아까, 처음 만났을 때, 내 첫인상이 참 안 좋다고 했잖아요 ...
뭐가 그렇게 안좋았어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샐쭉 웃으며 ...
“ ... 못생겼잖아요! ... 존나 촌스럽고! ... ”
아, 그랬구나 ...
“못생기고 존나 촌스런 놈하고 왜 다시 만나려고 하는데요? ...”
“알고 싶어요? ... 음 ... 나도 존나 착한 일 좀 해볼라구요 ... 됐어요?”
버스가 왔고 ... 그녀는 떠났다.
그 후로 한 번 더 그녀와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 번째 만남은 절박했지만 두 번째는 잘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서
집중을 덜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애프터 신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형의 조언대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윤양은 ‘못생기고 존나 촌스러운’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난생 처음 자신만이 구제해 줄 수 있는 가련한 중생을 만나 ‘착한 일’을 해보기로 했을까?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반해’서 끌리지만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서 끌린다.
한때는 첫눈에 반하고, 멋진 모습에 반하는 사랑을 꿈꾸었지만 ...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의 ‘상처’와 만났을 때인 것 같다.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혹은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진 것에 연민을 느끼고, 그것이 사랑이 되는 ... 늙어가는 걸까? ... 사람은 상처 때문에 만나고 때로는 상처 때문에 헤어진다. 그러나 상처없이, 연민없이, 사람은 서로 만날 수 없고, 깊어질 수 없다.
영화에서 날라리 여자애가 나오면 항상 윤양이 생각난다. 나에게 청춘의 첫 시련을 주고 또 시련을 견디기 위해 온 몸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사람 ... 그리고 그녀의 가장 인상적인 질문도 ...
“ ... 저 어때요? ... 존나 발랑 까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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