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냉면을 끓여 먹다가 ...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냉면 ...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귀가 많이 아팠다.
가장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가 ... 엄니가 나를 업고 있는 장면인데 ...
밤에 귀가 아파서 칭얼대면 엄니가 나를 업고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그래도 안 자면 동구 밖까지 갔다오곤 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애기 ... 얼뚱 애기 잘도 잔다 ...”
일곱 살 무렵 ...
귀에서는 여전히 고름이 흘러나왔고 ...
한동안 자전거로 한 시간쯤 걸리는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나는 할아버지 허리춤을 잡고 자전거 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느날 ...
치료가 끝나니 점심무렵이 됐다. .
“ 너 ... 냉면 안먹어봤지야? ...”
“ 냉면이 머시다요? ...”
가정집 같은 식당 마루에 앉아있는데 냉면이 나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 국수도 아닌 것이 ... 라면도 아닌 것이 ...
... 아, 그 시원한 맛이란 ...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 후루룩 ...
여름에 맹물에 설탕 쳐서 먹던 국수는 쨉도 안됐다.
그렇게 맛있는 냉면을 먹을 수 있다면 평생 귀가 아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딱 한 번 ... 할아버지가 사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냉면 ...
커가면서 할아버지를 많이 미워했다. 할아버지는 평생 할머니에게 못된 시어머니처럼 굴었다. 입이 짧아 반찬투정을 자주 하셨고 ... 밥 때가 됐는데 칼국수를 썰고 있으면 칼국수를 집어다가 마당에 패대기를 쳤다. 게다가 손이 귀한 집안에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는 이유로 작은 마누라를 얻어 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다. 할아버지는 그시절 흔하디 흔한 못된(?) 가부장이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 여자로 살아보니 어때? ...” 하고 여쭤봤다.
할머니는 뭔 쓰잘데기 없는 걸 물어본다냐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
“긍께 ... 거시기 ... 벌레 ... 벌레만도 ... 나는 ... 벌레만도 못한 ... ”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
그러나 ... 할머니의 ‘웬수’같은 남편이 나에게는 때로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어릴적 잠들기 전에 옛날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지네 이야기, 몽달귀신 이야기 ...
그리고 난생 처음 먹어본 냉면도 ...
가끔씩 볏짚 보퉁이에 잔치 이바지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손주들을 먹였다.
할아버지는 5년 전 돌아가셨다.
병원에 누워 계실 때, 간식으로 즐겨 드시던 딸기우유랑 영양갱을
가끔씩 사다드렸다. 문득 그 옛날 ‘냉면’ 생각이 나서 ...
“할아버지, 저 어렸을 때 자전거 뒤에 태우고 병원에 간 거 기억하세요?”
“... 응? ... 병원에? ... 그랬냐? ...”
“그때 냉면 한 번 사주셨는데 ... ”
“... 응? ... 냉면? ... 그랬냐? ...”
“퇴원하시면 냉면 한 번 먹으러가요”
“... 응? ... 냉면? ... 오냐 ... 그래 ... 가자 ... 가 ... ”
결국 냉면은 못 드시고 돌아가셨다.
좀 더 일찍 서둘렀더라면 냉면 한 그릇쯤은 대접해드릴 수 있었을텐데 ...
집에서 인스턴트 냉면을 끓여 먹다가 ...
그 무덥던 여름날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페달을 밟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 그날의 시원하고 맛났던 냉면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