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연리가 요즘 [캐릭캐릭 체인지]라는 만화에 푹 빠져있다.
13권이나 되는 책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는 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캐릭캐릭 체인지 ... 어린이집 갔다오면 또 캐릭캐릭 체인지 ... 잠들기 전에도 캐릭캐릭 체인지 ... 어디를 갈 때도 가방에 항상 캐릭캐릭 체인지를 가지고 간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만화를 보다가 혼자 까르르 웃다가 만화 인물들의 말을 흉내내기도 한다. 재미있는 농담이 나오는 부분은 읽어주며 내 반응을 살핀다.
“아빠, ... 얘가 뭐라고 하니까 쟤가 뭐라고 ... 까르르르 ... 재미있지?”
“ ... 유치하다 ... ”
내 반응이 냉담하거나 말거나 아무튼 캐릭캐릭 체인지만 끼고 산다.
무슨 내용인지 한 번 읽어볼까 하다가 ... 13권이나 돼서 ... 포기했다
그러다 어느날부터는 [캐릭캐릭 체인지]에 나오는 각 캐릭터들을 그린다.
주인공 7명에 수호신 10명 총 17명의 캐릭터를 틈만 나면 그리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 키만한 보드판에 가득 ... 또 스케치북에도 그리고 ...
공책에다 ... 뭐 그릴만한 데가 있으면 온통 캐릭캐릭 체인지를 그린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마징가 Z나 로봇 태권 브이를 주구장창 공책에 그린 기억이 난다. 지금도 안보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많이 그렸다.
며칠 전 ... 또 보드판 가득 캐릭캐릭 체인지를 그리고 있더라 ...
처음 이 집에 이사를 와서 뒷 베란다 벽에 하얀 페인트 칠을 할 때 ‘연리가 크면 여기에 함께 벽화를 그려야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랐다.
“연리야 ... 아빠랑 베란다 벽에다 벽화 그려볼까?”
“벽화가 뭔데? ... ”
“벽에다 그림 그리는 거 ...”
“음 ... 뭘 그리지? ...”
“캐릭캐릭 체인지 그리면 되잖아”
뒷 베란다로 데리고 나갔다. 높이는 1m 조금 넘고 폭은 5m 조금 넘는다.
근데 붓도 큰 거 두 개 밖에 없고 페인트도 없고 ... 있는 거라곤 연리 그림물감이랑 포스터칼라가 서너 개 ... 비가 들이치면 그림물감은 번질텐데 ...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안그러면 또 흐지부지 될 것 같아서 일단 시작했다.
우선 걸레를 빨아 벽에 먼지를 닦아내고 연리더러 연필로 스케치를 하라고 했다. 스케치북에 작게 그리는 것이 버릇이 돼서 그런지 커다란 벽에 적응을 못하는 연리 ... 지 딴엔 크게 그린다고 그렸는데 조막만 하다. 아무리 크게 그리라고 말해도 ... 안된다. 색칠을 시작했다. 연리가 색깔을 정해주는 대로 칠하다가 ...
연리가 그린 캐릭캐릭 체인지 (미완성)
어, 연리 따까리 노릇만 할 게 아니라 ...
나도 생애 최초로 벽화 하나 그려야 하는 거 아냐? ...
누군 태어날 때부터 화가로 태어나나 ...
뭘 그릴까? ...
날도 덥고 머리는 먹통이고 ... 할 수 없이 연리 동화책을 뒤적였다.
일단 쉽고 간단하고 ... 여름이니까 시원한 그림 ...
마침 하나가 딱 눈에 띄었다.
사자를 타고 달리는 엠마와 인형
마누라한테 아크릴 물감 무지개 색깔로 하나씩 사오라고 전화를 때리고 ...
작업이 지겨워지기 전에 얼른 게눈 감추듯 스케치를 했다 ...
그림이 세로 120cm 가로 180cm ...
오, 내 인생에서 최대로 크게 그리는 그림이자 최초의 벽화! ...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수채화를 마지막으로 붓을 꺾은 후 ...
연리랑 스케치북에 물감으로 장난 친 거 빼고 ...
이 얼마만인가 ...
내 스케치를 보더니 연리는 내 것이 더 재미있게 보였던지 ...
내 그림에 색칠을 하겠단다 ...
금 밖으로 물감 칠하기 챔피온 연리랑 같이 예술(?)하면 안되는데 ...
치사하다고 할까봐 칠하라고 했다.
연리가 나무에 몇 번 붓질을 하니 ... 금새 금 밖으로 삐죽 물감이 나갔다.
“아빠 ... 미안해 ... 내가 아빠 그림 다 망치겠어 ...”
“(부글부글) 괘, 괜찮아 ... 나중에 진한 색깔로 덮으면 돼 ... ”
으, 난 아빠니까 참아야 한다 ...
또 삐죽 연리 붓이 금을 넘었다. ... 으, 난 아빠니까 화내면 안된다 ...
연리가 나무는 어렵다며 바탕색을 칠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
잠시후 ...
“아빠 ... 내가 모르고 ... 나무 하나를 바탕색으로 다 칠해버렸어 ...
어떡해 ... 아빠 그림 다 망치겠어 ...”
으, 난 아빠니까 ... 인상쓰면 안된다...
문득 작년 스케치북 사건이 떠올랐다.
학기 초에 어린이집에 스케치북이랑 물감이랑 사서 보내면 학기 끝나고 스케치북을 집으로 가져온다. 연리가 스케치북을 넘기면서 이건 뭐 그린 거고 저건 뭐 그린 거고 설명을 해준다. 못 그렸지만 잘 그렸다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면서 듣고 있는데 ... 연리가 그림 하나를 그냥 넘기길래 다시 넘겨서 뭐냐고 물었더니 ... 연리가 쭈뼛주뼛 말하기를 ...
“어 ... 이건 ... 내가 바다를 그린건데 ... 선생님한테 야단 맞았어 ...”
“왜? ...”
“내가 바다를 핑크색으로 칠했는데 ... 선생님이 바다는 파랑색이라고 ...
야단을 쳐서 ... 다시 파랑색으로 칠했어 ...“
“넌 왜 바다를 핑크색으로 칠했는데? ... ”
“응 ... 난 바다가 좋거든 ...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핑크색이잖아 ...
그러니까 핑크색으로 칠했어 ...”
그림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사물의 색깔이라는 것이 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 더구나 아이가 그린 그림에 맞고 틀리고가 어디 있나 ... 그리는 것이 즐겁고 재미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
가끔 보면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너무 정답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기 전에 어른들의 시각 - 때로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일 수도 있는 - 을 주입시키는 게 적잖이 걸린다. 물론 애엄마와 나도 연리에게 무심코 정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을테고 ...
아, 이놈의 금을 어찌할거나 ... 금이 아예 없어도 문제지만 금 안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것도 문제 ... 때로는 금을 넘나들어야 하고 ... 금을 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
연리와 함께 그린 벽화
벽화를 그리다가 ...
색깔이 금 밖으로 나간 것에, 나무 하나를 바탕색으로 칠한 것에
어쩔줄 모르는 연리를 보니 쫌 짠하다.
다음에 벽화를 그릴 때는 연리가 금 밖으로 나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 음 ... 벽화 제목은 ... 떡칠? ...
베란다에는 ...
아직도 하얀 벽들이 많이 남아있다 ...
천장에도 그릴 수 있겠다 ...
성당천장에 그림을 그린 옛 화가들처럼 나도 베란다 천장에? ...
가을이 오면 ...
그렸던 벽화를 싹 지우고 새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
겨울이 오면 ...
또 싹 지우고 시원한 물놀이 그림을 그려볼까? ...
그리고 다음에는 동화책 베끼지 않고 ... 쫌 기발한 걸로다가 ...
누드? ... 음 ... 끌리는 군 ...
연리의 미완성 벽화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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