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출신 감독 '세바스티앙 실바' 가 2008년에 공개한 하녀(원제 La Nana)는 최근까지 출품된 메이드풍 영화중 보기드문 신선함을 지니고 있다. 하녀의 세계를 일관적으로 포착해온 범국적인 스피릿 역시 그들을 성적인 노예나 괴팍한 흑인 식모로 통용시킴이 부지기수였음에도 실바가 연출한<하녀>는 메이드물 정상격인 루이 부뉴엘의<시골 하녀의 일기>를 압도할 획기적성과는 없었지만 극중의 실권자들인 남성에 대한 탐욕을 과감히 배제시키며 짜임새있게 우회하였다.
1960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김기영의<하녀>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10년에 임상수의 손으로 재구성 된<하녀>는 능력있는 가부장과 매력적인 식모의 어긋난 불륜을 1차적 주제로 삼고있다. 이는 곧 주인공이 하녀에서 악녀로 변신하여 '주인가정' 에 대한 파괴욕구를 서슴없이 드러낼것이며 그 무기속엔 부적절한 관계를 거쳐 잉태한 태아가 중요한 구심점이 됨을 예고한다.
한국의 두 하녀와는 달리<칠레 하녀>속 주인공의 타깃은 고용주들인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집주인의 저택에 새로 들어오게 된 '신입 하녀' 들이다. 소녀시절부터 20년 넘는 세월동안 주인집 가정의 가사노동을 해왔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던 가족들의 사랑이 또 다른 하녀들에게 분산될것을 우려하고 신경질적으로 경계한다.
김기영의<옛날 하녀>는 상류층은 아니지만 음악강사인 가장이 집안을 이끌어가는 당시로서 흔치 않았던 인텔리 가문이다. 임상수의 <요즘 하녀>는 원작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최상류층의 초호화 저택을 배경으로 하며, 실바의<칠레 하녀>는 산타아고 부유층을 꾸준히 대변해온 전형적인 가톨릭계 가정을 주 무대로 삼고있다. 세 영화속 주인공들의 시공과 장벽을 초월한 공통점은 모두다 특정한 계기를 통해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고 본분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옛날 하녀>는 주인집 남자가 가르치는 여학생이 그에게 접근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질투를 느낀다. 단지 시샘을 벗삼아 두 사람의 관계를 휘저을 목적 뿐 아니라 스스로 가감시키던 성적욕망까지 일시적으로 분출한다.<요즘 하녀>는 절대적인 권력처럼 그려지는 주인남자의 예상치못한 유혹에 특별한 반항이나 수치심없이 자연스레 이끌리는, 원작인<옛날 하녀>에서 약간은 변형된 복종에 가까운 색채를 보여준다. <칠레 하녀>는 자신의 존재에 위협이 될 거라 여겨진 신입하녀들을 향해 분노를 품고, 그들을 쫒아내기 위한 나름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공간의 결정권자인 남편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옛날하녀>와<요즘하녀>는 눈에띄게 기고만장해진다. 그들은 최초에 발을 디뎠던 가정부로서의 임무는 뒤로한채 집안의 구조나 가족사를 궁금해하고 안주인행세를 하며 본말전도에 가까운 소유욕을 보인다. 오랬동안 대저택의 살림을 도맡아온<칠레하녀>는 그녀가 평소 고질적으로 앓던 현기증과 편두통이 악화되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안일에서 손을 떼야하는 지경에 놓인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고역스러운 노동량 이었지만 이를 견뎌내며 주인집을 억척스레 돌봐온 시간이 20년이 훌쩍넘었다. 주인가정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그녀에게 또 다른 하녀의 등장은 크나큰 정신적 스트레스로 확대된다.
한국의 '옛날 요즘' 하녀들은 영화중반까지 존재감의 상승곡선을 가파르게 그리며 어웨이였던 그 집을 홈그라운드인 안방처럼 신나게 활보한다. '칠레 하녀' 역시 새로운하녀 2명을 짓궂은 말투와 고집스런 행동으로서 집밖으로 쫒아내기에 성공하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켈' 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은 또다시 '루시' 라는 새로운 하녀를 고용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상태. 칠레 하녀인 '라켈' 은 한국 하녀들과는 틀리게 총체적인 절망과 같은 양상으로 중반부까지 맥없이 끌려온다.
이 대목에서 한국감독들이 그린<하녀>와 칠레감독이 만든<하녀>의 차이가 극명하게 살펴진다. 한국의 하녀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 부잣집으로 고용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집요하면서도 때론 교묘한 술책을 동원해 주인가정을 수세로 몰아넣는 치밀함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칠레 하녀인 '라켈' 은 교육의 범주에 전혀 포함되지 않은 산티아고의 빈민촌에서 자랐으며, 철없는 소녀시절부터 대저택에 들어와 밤낮없이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 주인집의 모든 식솔을 감당하고 사실상 부잣집에 억류된 인생을 보낸 '라켈' 의 캐릭터는 실제로도 말을 더듬거리며 표하고자 하는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평균치 정도의 사회성에서 굉장히 뒤쳐지는 모습이다.
<칠레 하녀>를 만든 세바스티앙 실바는 산티아고 부유층의 자제로서 성장했다. 영화가 촬영된 대저택 역시 그의 부모 집이다. 어릴때 실제로 이집에서 자라며 수 많은 하녀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지적 발육지체에 가까운 '라켈' 이라는 여성은 영화속에서 만40세로 등장하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노동 탓에 외모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50대에 가깝다. 정신적 행동이 겉늙어버린 외모처럼 성숙한 것 또한 절대 아니다. 한정된 공간속 사람들과의 미진한 소통이 전부였던 그녀가 외부인을 경계하는 '수동적 공격성' 을 가진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중반부부터 실바감독은 사회성이 결여된 라켈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투영한다.
특히, 부의 역겨운 오만과 모순에 극단적으로 맞섰던 한국의 '하녀' 들과는 달리 '칠레의 하녀' 가 뿜어낸 짙은 시사점은, 집주인들이 '라켈'을 학대하거나 폄하하는 모습이 전혀없지만 그들은 라켈이 무엇때문에 고통받는지 왜 다른 하녀들과 끝없는 사투를 벌이는지에 대한 관심자체가 전무했던 점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이 명확한 칠레사회에서 주인가정을 실제 가족처럼 여기던 라켈의 생각은 그녀만의 일방적 착각이었음도 관객에게 재확인된다. 주인들은 누군가가 떠나면 오로지 새로운 하녀만 고용하면 될뿐, 새우싸움에 고래등 터질리 없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한번 곱씹게한 연출보다 더욱 잔인한것은 여전히 '라켈' 은 자신과 주인가정을 꾸준히 한식구로 일치시키는 장면들이다.
미리부터 권력구조를 간파한 뒤 집주인 남성을 유혹하며 쥐약을 동원해 전가족을 몰살시키려한 '한국의 옛날하녀', 주인남자를 애아빠라 부르고 자신과 아이를 책임지라는 뒤틀린 명분을 요구하던 '한국의 요즘하녀' 와는 달리, '라켈' 이 보여준 복수는 아이들이 자신보다 새로운 하녀를 더 좋아할것에 못견뎌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숨긴다거나, 다른 하녀들을 놀래키기 위해 고릴라탈을 쓰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녀가 처음 대저택에 시녀로 들어왔던 소녀일적에 칠법한 장난을 40대가 넘은 나이에 목숨을 건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의논리에 눌려 인격적 성장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영화속의 가장 애처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중서두에 '라켈' 이 2명의 하녀를 쫒아낸뒤, 집주인은 '루시' 라는 하녀를 또다시 고용한다는 것을 말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라켈은 루시를 가만두지않고 그 특유의 '유치한 방법' 으로 신입을 괴롭히고 못살게군다. 그러나 쉽게 그만둬버린 이전의 하녀들과는 틀리게 루시는 라켈의 모든것을 받아주고 그녀에게 일관된 미소로서 화답한다. 난생처음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애정을 경험한 라켈은 루시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스스로 잃고살아온 정체성을 조금씩 뒤돌아본다.
영화 중반까지 일종의 '성취감' 에 도취되어 하루하루를 즐기던 한국의 두 하녀와, 영화내내 조울증에 가까운 수렁을 겪던 '라켈' 의 결말은 순식간에 반전을 맞는다. 김기영의 '옛날 하녀' 는 주인들과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그 당시 부의 상징물인 '2층집 계단' 에서 생을 마감하며, 임상수의 '요즘 하녀'는 최고급 샹들리에 아래 목이 휘감긴채 불타버린다. '칠레 하녀' 라켈은 처음생긴 하녀친구 루시와 함께 저택밖으로의 '오후 외출' 을 시도하는데 그녀는 평생 섬생활을 하다 우연찮게 육지를 밟아본 원주민의 낯설음처럼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당황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녀' 로서 묵묵한 내일의 일감만 기다릴 뿐이다.
'라켈'과 같은 지적 발육지체의 캐릭터는 우리주변에 널려있다. 한국인이 만든 비현실적 가학성을 담은 '옛날 요즘' 하녀들 보다 칠레의 영화<하녀>가 더욱더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태어날때부터 영문도 모른채 밭일만하다 생을 마감하는 시골노인들, 배우지 못한 죄로 일용직 목공수가 되어 전국의 공사현장을 떠도는 사람들, '입상' 이 아니면 진학할수가 없어 책은 접어두고 뙤약볕아래서 죽어라 운동만하는 체육부 학생들, 그외의 셀수조차 없는 이땅의 모든 빈익빈들. 어느 곳에서도 이들을 흔히 접할 순 있지만 칠레의<하녀> 처럼 중심소재로 포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다.
임상수의<하녀>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던 '서우' 의 미스캐스팅 논란에 대해서는 일종의 옹호가 필요하다. 애초부터 남편의 사랑과 시댁의 연명을 사수키위해 이정재라는 절대군주 1인에 의존하는 캐릭터였으며, 타인을 향해 특별한 인간미를 베풀 필요가 없는 표독스런 안주인의 모습엔 서우 특유의 '인공적인' 외모가 배역에 적격이라는 분석이 제작전부터 주 를 이뤘다. 한마디로 수준급의 소화력을 기대한 영입이라기 보다 '원작 하녀 속 안주인' 이상으로 극대화된 이미지를 확보시키기 위한 전략적 캐스팅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여배우는 필연적으로 한영화속 여배우들과 실력앞에 비견되는 법. 신인급이던 그녀의 맞상대는 애석하게도 대한민국 최정상급인 전도연과 윤여정이었다. 서우 자신도 잘나가는 연예인보다 '좋은배우' 를 꿈꿔갈테니<하녀>로 겪은 비난의 집중포화는 본인의 역량에선 쉽게 얻지못할 소중한 경험과 스펙으로 여길거라 생각한다.
의무적으로 봐야할 영화는 없어도 굳이 '칠레 하녀''옛날 하녀''요즘 하녀' 셋중에 반드시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명장, 김기영의 옛날<하녀>를 선택하고 싶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60년에 35mm로 완성된 탈아시아 급의 정교함과, 오컬티즘의 진수를 선보인 김기영식 섬뜩함을 느끼지 못해봤다면 그것이 곧 불행이요 시대적 문화혜택을 거꾸로 흡수해온 반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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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수고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