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역시 댓글보단 본글로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여기다 쓰는 거야.
종교 쪽은 관심이 많이 가는 분야라 나도 이것저것 나름 들여다보긴 했는데 밥기자만큼은 안될듯 싶어. 내 이전 글에 대한 딴지 또는 반박의 여부를 떠나 밥기자의 내공은 인정해. 덕분에 윤회와 구원에 대한 나의 언급이 신본주의나 힌두주의적이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리고 힌두의 병폐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그런데 밥기자가 간과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무수히 많지만 한 두개만 들여다볼게.) "힌두의 병폐는 상상 그 이상이다." "'나'가 사라진다면 귀결은 허무주의가 될 뿐이다."
위의 진술들은 단정의 오류 혹은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팩트가 사실은 전체의 일부분임을 안다면 이런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고 이것이 동전의 전부다."라고 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이 동전의 일부이긴 해도 동전의 전부는 아니기에 이 역시 단정의 오류,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런 지적이 지나친 비약인 거 같지만, 의외로 이런 오류를 간과하는 논지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이 사실이야. 그러니 이런 오류를 기정 사실화하고 글을 전개하거나 이런 류의 오류들이 눈에 많이 띨수록 그 논지의 허술함은 스스로 증명되는 게 아닐까 싶은거지.
힌두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힌두교가 종교의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어. 또 힌두교의 병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종교로서의 힌두교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종교의 그 가르침이 인간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해서 또 인간정신을 말살하고 인간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해서 종교가 가리키는 진리까지 악이거나 병폐인 것은 아니라고 봐.
이것은 마치 누군가 불로 사람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 불이 악이거나 병폐인 것은 아닌 것과 같지.
뭐, 밥기자가 다른 종교는 몰라도 힌두교만은 병폐요 악이라고 보면 그것까지 뭐라 할 수 없겠지.
"'나'가 사라지면 그 귀결은 허무주의다."라는 언급도 비슷한 맥락의 오류라고 생각돼.
왜 '나'가 사라지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이런, 난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는데...
'나'가 사라지는 것은 '나'를 온전히 깨어서 꾸준히 지켜보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거잖아. 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내가 진정 누구인지도 모른채 어떻게 현실을 제대로 헤쳐나갈수 있겠어?
밥기자는 혹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니? 내 호흡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 내가 밥을 먹을 때는 어떻게 씹고, 어떻게 삼키는지... 앉을 때는 어떻게 앉고, 걸을 때 발바닥의 느낌은 어떤지, 허리는 어떻게 쓰는지... 또 이렇게 저렇게 생활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고 어떤 생각이 꺼지는지... 내가 어떤 마음을 내서 누구를 미워하는지, 또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지금 일어나는 의도는 무엇 때문인지, 내가 고개를 돌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등등 말이야.
'무아'라는 것은 이런 일들의 끝에서 일어나는 거고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렇지 않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가 계속 필요하게 될 거야. "아버지 저들은 저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이야.
카이스트 학생 만난 에피소드도 그래. 파동으로 존재한다거나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하고 야구방망이로 후려치는 것하고 이상하게 연결한 거 같아.
현대물리학은 아주 거대한 현미경으로 물질을 관찰하고 모든 물질이 파동임을 밝혀냈어. 게다가 원자를 이루는 양자와 중성자 간에도 어마어마한 공간이 있다는 것 역시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됐을 정도잖아.
나는 이런 원자가 물질을 이루고 어떤 물질은 세포가 되고 신경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야. 어마어마하지 않아?
내 존재만으로도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의 증거인데 야구방망이에 맞아서 아픈 걸 느끼는 건 일도 아니지. 그런데 맞아서 아픈 거 하고 파동하고 무슨 연관인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