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유적지에서... [2008/03/08]

신하가 저군을 죽이는 불충의 시대, 장인이 사위를 죽이는 불륜의 시대, 부인이 남편을 죽이는 不淨의 시대 바로 정약용이 살아야 했던 시대이다.
정재원의 아들 다섯과 딸 다섯 중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약용의 친누이가 이승훈에게 시집감으로써 해남 윤씨 소생의 3남 1녀 모두가 거센 시대의 풍랑을 온몸으로 맞는 것은 孤山 尹善道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용의 선조 여덟 명이 내리 옥당, 즉 弘文館 관리였다.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는 문인화의 대가였던 공재(恭齋) 尹斗緖였으며 노론 영수 송시열과 맞섰던 남인 영수 고산 윤선도는 윤씨 부인의 증조부 윤이석의 조부였다. 한때 송시열과 역적 논쟁을 주고받으며 싸웠던 윤선도의 뜨거운 피가 정약용 형제에게 흘렀던 것이다.
약용이 7세에 지었던 山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遠近地不同 가깝고 먼 곳이 같지 않네
역시 7세때 천연두를 앓아 눈썹 한가운데가 나누어져 이 흔적을 부끄럽게 여기기보다 ‘눈썹이 세 개인 사람’이란 뜻의 삼미자(三眉子)란 호를 짓는 해학을 보였다.
영조는 순감군을 동원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세손의 대리청정 의식을 거행했고,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스물 다섯의 장년으로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즉위 당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란 말로 정조의 시대를 열었다. 사도세자 추승작업에 나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세자, 묘호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높였다.
이익의 부친 이하진(李夏鎭)은 대사헌등을 역임한 남인이었는데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유배형에 처해졌고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이잠이 숙종 32년 상소탓에 숙종을 분노케 해 형장 열여덟 차례를 맞은 끝에 장살당하고 말았다. (형신이 약 30여대) 중형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이익은 평생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은 실천을 지향했다. 그 결과 균전법(均田法)을 주창하고 신분, 지역 차별과 당쟁에 대해 극도로 분노했다. 희대의 천재 정헌(貞軒)이가환이 바로 이익의 종손이었다.
정약용의 인생에 있어서 이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정약용이 마음으로 점 찍은 스승이었으며 그의 통넓은 생각이 정약용의 시야를 넓혀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 승하 후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이란 호를 지어 정조 없는 세상을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잘 보여준다.
정약용과 약전이 가족과 눈물로 이별한 곳은 숭례문에서 남으로 3 리 떨어진 석우촌(石隅村)
한 말은 남쪽으로 가고, 또 한 말은 동쪽으로 가야 하네
숙부님들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큰형님 두 뺨엔 눈물이 줄을 잇네...
뒤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다시 만날 기약이나 새기면서
정약용을 18년 동안이나 귀양지에 가두어 놓고, 그의 형약전을 16년만에 유배지에서 죽게 만들었지만 그 죽음의 나날을 정약용이 잘 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상사회에 대한 희구로 승화시켰다면, 약전은 거친 어부들과 물고기, 그리고 해초와 소나무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를 보았다.
정약용은 독서 도중 한 자라도 모르는 곳이 나오면 널리 고찰하는 방법을 기조취도(旣祖就道)라는 단어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기조취도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노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인데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이다.
‘가령 사기, 자객전을 읽을 때 기조취도(旣祖就道)라는 한 구절을 만나 “祖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스승은 “이별할 때 지내는 제사다”라고 답할 것이다. 다시 “그런 제사에 꼭 祖라는 글자를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스승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면 집에 돌아와 사전에서 祖라는 글자의 본 뜻을 찾아봐라’라고 가르쳤다.
‘祖라는 글자가 제사의 뜻이 된 것은 옛날 황제의 아들 累祖가 여행을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기 때문에 길에다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정약용은 ’조‘라는 한 글자로 얼마나 깊게 공부할 수 있는지를 계속 설명한다.
‘또 사전의 뜻을 근거로 다른 책을 들추어 그 글자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고찰해 보고, 그 근본적인 뜻과 지엽적인 뜻도 뽑아두고, 또 『통지通志』『문헌통고文獻通考』등의 책에서 ’조제祖祭‘의 예를 모아 책을 만들면 문득 없어지지 않는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한 가지도 모르고 지냈던 네가 ’조제‘의 내력까지 두루 아는 사람이 되어 비록 이름난 큰 한자라도 ’조제‘에 대해서는 너와 다투지 못하게 된다. 이 어찌 큰 즐거움이 아니겠느냐?’
정약용은 역사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그것도 그냥 읽는 데서 그치지 말고 정씨 가문과 조선, 중국역사 연표를 스스로 제작해보라고 권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적을 중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을 인용하는데 이 역시 비루한 일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국조보감』,『신증동국여지승람』,『징비록』,『연려실기술』과 동방의 다른 문자와 사실을 수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한 뒤에 시에 인용해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
윗글은 정약용이 아들에게 책을 읽는 방법과 어떤 책을 읽어야하며 그 책을 읽고 어떤식으로 공부해야하고 어떤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글인데 평소 알고자 했던 많은 부분이 씌어 있어 내게 큰 귀감이 되는 글이다.
주역은 무엇 때문에 지은 것일까? 성인이 천명에 청하여 그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였다. 오직 일은 공정한 선의에서 나왔지만 그 일의 성패화복은 역도(逆睹:사물의 결말을 미리 내다봄)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이에 비로소 천명에 청하는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선한 뜻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과연 그 일이 하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은 것이 『주역』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에게 『주역』은 점치는 책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늘의 뜻대로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경전이었다. 그 천명을 지상에 실현하면 곧 이상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주역사전을 쓴 것은 바로 그런 사회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주역사전』에 너무 자세하게 풀이해 놓은 것이 아닌지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요즘 세상에 수령이 상경했다가 다시 내려오면 백성들이 길을 막고 거절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유배객이 다른 섬으로 이주하려 하자 원래 있던 곳의 섬사람들이 길을 막고 남아 있어 달라고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선대왕(先大王:정조)께서 매번 ‘현이 동생보다 낫다’고 하셨으니 아! 성명()께서는 형님을 알아보셨던 것이다.
정약전의 장례는 사실상 우이도장이었다.
정약용의 행복한 글쓰기는 형이자 친구이며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던 손암 정약전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즉하면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경집(經集)240권을 새로 장정해 책상 위에 보관해 두었는데, 장차 그것들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했으랴...
귀향 4년 후 순조 22년 (1822)임오년 그의 회갑 년 이었던 다산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이는 지난 인생을 회개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애가 왜곡되어 전해질 것을 염려함에도 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할 때 천주교도가 아님에도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묘지명을 지어 이들의 무죄를 후세에 알리고 싶어했다. 특히 그가 가장 신경 쓴 인물은 정약전 외 정헌 이가환과 녹암 권철신이었다. 이가환은 남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묘지명을 저술한 것인데 둘 다 자신의 회갑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의 장례절차에서 집의 동산에 매장하고 지사에게 물어보지 말라 유언했다.
또한 그의 학문에 대해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짓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하였다.
우리 사회는 지금 천명을 받아들이는 세상인가?
다산의 사상을 불 속에 처넣고 태워 버리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정약용이 도를 펼칠 수 있는 사회인가?
서용보, 이기경. 홍낙안 등이 득세하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다산이 꿈꾸었던 그런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6개월여 전에 읽었으나 친구를 빌려주는 바람에 돌려받은 이제서야 나름대로의 간단한 줄거리를 쓴다.
[2008/02/23]
치매백신님에 필 받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펌한다. 과거의 남자사람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 정약용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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