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억의기적 기자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다. 워낙 열정적으로 글을 쓰는 기자이기에 항상 감탄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너무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어 여기서 몇가지 덧붙이려 한다.
한국의 진보주의가 '신자유주의 반대'라고 하는 슬로건을 마치 전가의 보도인양 휘두르는 모습이 일반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사실이다. 너무 추상적이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애매한 개념인 것도 사실이며 국내의 사정이 신자유주의 만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반대'가 함의하고 있는 시대적 맥락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사상이든 이념이든 시대적 조류라는 있게 마련이다. 지금 미국, 유럽은 물론 세계의 사상적-지적 흐름은 무엇보다 지난 30년 동안 정치경제 영역에서 벌어진 그 어떤 반동적 흐름에 대해 고찰하고 반성하고 있다. 전후 30년과 그 이후의 30년은 무언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며 시민들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왔다는 성찰인 것이다.
물론 미국, 유럽의 역사적 시계의 흐름은 한국의 흐름과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는다. 한국은 1990년대가 되어서 군부독재 정권을 힘겹게 극복하고 나서야 겨우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막 작동하기 시작하던 그 때는 미국과 유럽을 휩쓸던 새로운 자유 시장주의라는 흐름이 정점에 이르던 때이기도 했다. 즉 우리가 막 민주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동시에 선진화 또는 세계화라는 담론속에서 정치경제 영역에서 전혀 새로운 흐름을 조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지적하듯이 한국은 독재와 결합된 국가주의 발전노선에서 어느날 갑자기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자유 시장주의 발전노선을 받아드렸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고삐 풀린 시장 자유주의가 정점을 넘어 파열음을 내기 시작할 무렵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개혁-진보적인 민주정부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97년의 뼈저린 고통과 2008년의 대공황 속에서 우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애증의 동반자를 맞이했었다. 그것은 시대와 불화, 또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하필이면 그 때가 왜 세계의 정치경제 또는 사상적 흐름이 대회전을 시작하던 때였을까.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선진화-세계화 프로그램과 자본시장의 개방에 이어서 97년의 고통 속에서 어금니를 깨물고 받아드려야 했던 IMF식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국가발전 모델은 급격히 새로운 자유 시장주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FTA라고 하는 양국간 자유무역은 그저 리카도가 말하던 비교우위에 입각한 무역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광범한 분야에서 양국의 정치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체질개선 프로그램에 가깝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97년과 2008년의 고통 속에서 급속히 설득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97년과 2008년 사이의 고통 속에서 시민들은 다시 독재와 국가발전이 결합되었던 과거의 향수 속으로 빠져들었고 점증하는 삶의 양극화와 피폐해져만 가는 삶을 목격하며 사람들은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미국도 유럽도 그리고 한국도 지금의 시간은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는 시기인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어서 전후에 이룩했던 유럽의 사회복지국가와 미국의 위대한 사회가 무너져 내렸는지 그리고 한강의 기적은 어떻게 해서 4대강의 비극이 되었는지 말이다.
진보주의가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은 나름의 시대적 맥락을 따라가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그것이 일반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시도자체를 냉혹하게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그랬듯 홀로 내버려두면 스스로를 자해하며 파괴하곤 했고 자유주의는 그런 자본주의를 방관하곤 하지 않았나? 유럽과 미국의 지난 30년과 한국의 지난 10년이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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