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들 운동의 주체도 과거와 다릅니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 ‘파리쿡', ’쌍코', '킬힐', '소울드레서' 등 인터넷 취미동아리 회원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SNS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 주체들은 좀 더 발랄하고, 적극적입니다. 이들은 과거 관념적, 계급적 진보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인종들입니다. 과거 운동주체들이 진지하고, 엄숙했던 데 비해 이들은 한없이 가볍고, 유쾌합니다. 그래서 ‘날라리 부대’라고 불립니다.

이런 새로운 운동의 중심에는 ‘소셜테이너'가 있습니다. 김제동, 김여진 등 연예인들이 정치적 의제의 중심에 서서 대중의 참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 정치판을 기웃거리던 폴리테이너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과거 폴리테이너가 정치판의 액서사리였다면, 지금 소셜테이너는 사회적 이슈의 최전방에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소셜테이너가 묻는다, “정의로운가”
과거 폴리테이너들이 특정 정치인을 위해 동원됐다면, 지금의 소셜테이너는 스스로 의제를 촉발하고,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소셜테이너들은 이미 정치적 소통능력의 측면에서 정치인을 앞서고 있습니다. ‘소셜테이너 금지법’이라는 희대의 코메디는 이들 소셜테이너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들 소셜테이너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중들이 소셜테이너의 입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 과연 옳은가?’라는 물음입니다. 소셜테이너가 이렇게 정의를 따질 때, 침묵하던 대중들은 바로 “그렇지, 그게 진짜 내가 묻고 싶은 것이었어”라며 호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셜테이너들은 대안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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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억원의 적립금을 쌓아놓은 대학이 돈 몇 푼 올려달란다고 나이 많은 청소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까? 그리고 이런 어르신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당신들 임금 오르면 우리가 등록금 더 내야 한다’며 몰아붙이는 대학생들의 행동은 옳은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 대학이 더불어 사는 지성인이 아니라 자기 밖에 모르는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한 여성이 크레인에 올라가 1년 가까이 살려달라고 외쳤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관심갖지 않고 모른 채 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기업은 매년 천문학적인 이익을 남기는데, 노동자들은 그 이익을 분배받기는 커녕 언제든지 정리해고되는 현실은 옳은 것입니까?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용역업체 아르바이트생들은 우리사회가 키운 ‘괴물’이 아닐까요?
- 매년 수 천억원의 적립금을 쌓는 대학에 한 해 천만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야 하는 현실은 옳은 것입니까?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수 천만원의 빚을 진 실업자로 전락하는 현실은 옳은 것입니까? 그래도 이런 현실을 외면하며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충만한 대학생들은 우리사회가 키운 ‘괴물’이 아닐까요?

‘정의’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너도 아프냐,나도 아프다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적 농촌공동체는 붕괴됐습니다. 전통적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그 공동체의 윤리기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통적 가치기준, 정의에 대한 전통적 판단기준은 사라졌습니다.
농촌공동체의 잔재들이 동창회, 향우회, OO클럽 등의 형태로 잔존하고 있지만, 이들 모임에는 과거 농촌공동체를 지탱하던 윤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런 패거리 공동체에 싸여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권과 이런 이권을 위해 뭉친 패거리의식만 존재할 뿐입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늑대인 사회에서 오직 믿을 것은 돈과 패거리 뿐입니다.
문제는 이같은 이권을 중심으로 뭉쳐진 패거리가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 '이끼'에서 종교단체의 가면을 쓰고 양아치 행세를 하는 그 구성원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우리 사회 전체게 이익(혹은 시장,경쟁)으로 해체되고 있습니다. 국가가 이같은 시장에 의한 식민화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MB 정부 들어 국가가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옳고 그름의 준거를 찾아야 하는가 혼돈스러워하고 있습니다.연대와 공존을 통해 우리의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유지해줄 사회적 장치(공동체)는 어디 있는 것인지 찾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정치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윤리의식의 부재, 더 정확히 말하면 윤리의식의 뿌리인 공동체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입니다.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론적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이 적용되려면 공동체가 전제돼야 합니다. 공동체가 없는 곳에서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잘못된 전제의 오류'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의에 대한 소셜테이너들의 질문은 “우리 사회에 정의가 뿌리내릴 공동체가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같은 말입니다만, “우리 사회에 정의로운 공동체가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소셜테이너들의 슬로건은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사회정의의 정서적 토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공동체의 복원이 가능해집니다.
소셜테이너들은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옳은가?”, 나아가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근거인 공동체 속에 살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들의 질문에 호응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합창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민없는 진보는 허구다.
문제는 진보가 아직 여기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들은 기존의 진보가 이들이 제기하는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해 어떤 대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정당통합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결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진보통합의 논의는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진보통합 논의는 정치공학적인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직 소셜테이너들이 요구하는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희구하는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전보다 과거 분열주의에 바탕한 '사과'와 '굴복'이 의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당통합이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퇴행적 분열의 담론에 의해 지배될 때, 대중은 이 통합에 어떤 희망을 기대할까요.
통합은 산술적 합계를 넘어서는 질적 비약을 포함합니다. 이미 통합 속에는 전통적 진보의 혁신에 대한 요구가 내재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존의 사회운동으로 온전하게 대표되지 못한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해 새로운 대안이 바로 그 요구의 핵심입니다. 과연 진보는 여기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