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대 입법 -
아직 가을이 채 물러가지 않은 11월의 어느 날 첫눈이 내렸다. 명산을 배경으로 끼고 있는 청와대의 눈 덮인 풍경은 아름다웠다. 대통령으로서는 겨울의 끝자락에 입주한 이후 두 번째 새로 맞는 겨울이었지만 처음 맞이하는 눈처럼 느껴졌다.
집무실 창가에 서서 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대통령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임들도 여기서 지내는 동안 크고 작은 고뇌에 묻혀 지내느라 눈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눈 덮인 에베레스트 산이 연상되면서 곁을 떠나고 없는 문 정인을 떠올렸다. 왠지 그가 항상 에베레스트 산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와대에 들어온 이래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보이던 그를 늘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불쑥 에베레스트에 가겠노라고 사직서를 들고 왔던 그였다.
그는 휴가를 보내는 셈치고 사직을 허락했었다.
문정인이 없는 청와대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의지했던 대통령 마음속의 커다란 빈자리는 김인철에 의해 빠르게 메워졌다.
4월 총선에서 여당인 참민당이 국회의석 과반수이상을 차지하여 자신감이 충만해진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일을 해나갔다. 헌재 판결 이후 짧은 기간 동안에 국정은 활기를 되찾았다. 대북관계, 외교, 교육, 보건복지 쪽에 많은 성과가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가 견고한 흐름에 들어섰다. 시스템이 확립되자 공무원 집단이 안정되어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었다. 물론 자체적인 평가였다. 언론은 일관되게 총체적 난국상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국정으로 매도하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정치 쪽이 아직도 문제였다. 당에서는 국회의 과반수를 훌쩍 넘는 의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발의하는 법안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4대 입법 때문이었다. 4대 입법이란 총선승리로 고무된 참민당의 개혁성향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여 발의한 네 가지 법안을 말하는데 ‘언론개혁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국가보안법대체입법이 그것이었다. 언론개혁법과 사립학교법은 중요한 각각의 국정분야의 실질적인 개혁과 공정성을 제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나머지 두 법안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것은 야당의 목숨을 건 투쟁을 불러왔다. 정국은 교착되고 국회는 공전을 거듭했다. 그 때문에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과 내년 예산안까지도 발목이 잡혀있었다.
그것을 빌미로 언론은 국회 뿐 아니라 정치권을 싸잡아서 뭇매를 때리고 있었다. 양비론이야말로 그들에겐 전가의 보도가 아닌가? 당과 국회에서 진즉 처리했어야만 할 일이었지만 당에서는 일만 벌여놓고는 수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태에서 언제 까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단을 하기 전에 김인철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김인철의 존재는 그에게 결단의 외로움을 덜어주고도 남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할 생각이었다.
김인철이 접견실에 들어섰을 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 마르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김인철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김인철이라고 합니다. 대통령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 경력이 남다른 김인철 특보시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장태신입니다. 정책특보인데 이렇게 대통령께서 부르실 때만 청와대에 옵니다.”
대통령이 건네준 명단에 있는 이름이었다. 대선전 캠프에 합류한 이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쳐 현재는 국립대교수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채로 비상근 특보로 위촉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현 정부 이념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고 좌파로 불릴 만큼 진보적 성향이 강한 인물임을 김인철은 알고 있었다.
“저도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나는 대통령님 후보 시절부터 자문을 해오다가 인수위원회에도 참여했었지요. 장관 자리도 제의 받았지만 내가 사양했다오. 이유는 대학을 떠나기 싫어서요........., 그나저나 김 특보는 참 좋은 때 들어왔어요. 정권 초기에는 국회 때문에 무척 고생했지요. 이젠 아주 할 만하지 할 만해......, 언론도 전처럼 노골적이지 않고.........”
대통령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의 말은 끊어졌고 두 사람은 일어섰다. 대통령은 두 사람과 악수를 청하면서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은 지금 밖에서 오시는 길이지요? 눈길에 오시느라 힘은 들었겠지만 참 부럽네요. 나는 여기 갇혀가지고 꼼짝도 못하는데. 예전에는 몰랐는데 밖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이젠 평생 내 맘대로 돌아다니긴 틀린 거 아이가?”
“대통령 하시기가 그렇게 쉬울 줄 아셨습니까? 하하하”
장태신이 스스럼없이 농담으로 응대했다.
“자 앉읍시다.”
대통령이 앉기를 기다려 두 사람도 소파에 앉자 대통령은 본론을 꺼내었다. “오늘 두 분을 보자고 청한 것은 요즘 4대 입법 처리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정국에 대해서 조언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국회에서 아무 법안도 처리하지 않아서 우리도 아무 일도 못하고 손 놓고 있습니다. 그거 포기하던지 강행해서 처리하던지 이제 끝냈으면 좋겠는데 두 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태신의 대답했다.
“4대 입법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강행 통과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과거 정권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이부용 당의장이 저쪽에서 온 사람이라 말 빨이 안서서 그런지 참 답답합니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지지가 80%대에 이르는데 야당의 합의를 못 끌어내고 지지부진 하는 게 이해가 안갑니다. 청와대에서 직접 협상에 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과연 협상의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안 되면?”
“시간을 가지고 설득하는 한편 국민의 여론으로 압박을 가해야죠. 그들도 무한정 국민여론을 무시하면서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더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김 형의 생각은 어떻소?”
김인철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소신을 피력했다.
“야당과 합의하여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은 버리고 언론법과 사학법만 통과시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언론법과 사학법은 참민정부의 국정과제로서 정책 집행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면서 상대적으로 야당에게 덜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은 국정운영에 꼭 필요한 일은 아니면서 그들에게는 사생결단을 내야할 만큼 치명적인 사안입니다. 국가 보안법 폐지는 제3 공화국 이래 지금까지 그들이 유지해온 반공의 이념을 포기하는 일로서 그들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과거사법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지지층인 이 나라 지배 계급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 또”
김인철의 말이 끝나도록 기다리지 못하고 장태신이 끼어들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법은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사학법이나 언론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 이루어지는 개혁조치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밝혀내고 왜곡된 것을 바로 잡아서 애국과 매국,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으면 누가 후세에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애국과 옳은 행동을 할 것입니까? 그리고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국가 보안법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인 법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은 아니겠지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총선 승리에 흥분해서 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재에 신음하던 나라에서 연속집권에 성공한 개혁세력이 처음으로 국회까지 장악하니 식민지에서 독립한 것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 만들고 식민세력 처단하고........., 아직 언론이 저들의 편이고 검찰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모두 저쪽편인 상황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민 여론? 아주 쉽게 언론에 조종당할 수 있습니다. 이념을 바로세우는 일은 한 두 번 더 집권한 후, 정권을 상대에게 내주더라도 지역 연고에 의존하지 않고 다시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국민의 의식이 성숙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저쪽에서 그 두 가지 법안도 안받아주거나 이쪽에서 장특보님 생각처럼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양보할 수 없다면 국회 경호권을 발동하던 단독국회를 하던 법대로 강행처리 하는 것이 중책입니다. 하책은 협상을 한답시고 시간을 끄는 일입니다. 국민은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책임은 여당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는 동안 일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의견에 대한 평가를 함으로써 편을 드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나 김인철이 말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몇 번 끄덕이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장태신의 의견을 하책이라고 김인철이 말한 것을 대통령이 동의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4대 입법은 반드시 원안대로 통과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개혁의 아주 기본적인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할 일 태산인데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런 것도 포기해야 한다면 정권을 잡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경호권 발동해서 강행처리해야겠군요.”
이 말에 놀란 듯 장태신은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든 오른손을 내저으며 그는 말했다.
“그렇다고 물리력을 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저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독재정부에서 하던 짓을 우리가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파병연장 동의안 카드로 야당을 4대입법에 찬성하도록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부의 정체성으로 볼 때 사실 이라크 파병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대미관계를 생각해서 지지층의 반대와 이탈까지 무릅쓰고 어렵게 결단한 거 아닙니까? 국회의 공전으로 파병연장 동의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철수해야하는데 저들이 겁을 내지 않겠습니까?”
김인철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제 생각과는 아주 많이 다르시군요. 지금 파병되어있는 사람들을 철수시킬 형편은 못되고 동의안 처리가 늦어지면 그 자체가 불법이 되는데 그게 어째서 야당이 겁낼 일입니까? 다수당에다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당이 야당이란 말입니까? 양보도 없이 물리력을 사용하지도 않고 꼭 처리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검찰을 시켜서 의원 개개인들의 약점을 잡고 겁을 주어서 압박한다든지 하는 방법이 현실성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검찰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말입니다. 이건 상대방이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저들에겐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전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는 여러 가지 안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일에는 때가 있는데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애초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 지지층의 반대가 있었다는 의견에도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소위 우리나라의 진보세력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민정부가 진보의 기치를 내걸어서 집권에 성공했으니 마땅히 자신들이 주장하는 소위 ‘진보적인 정책’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정부를 탄생시킨 세력은 굳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이름붙이고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현실성 없는 주장을 일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정부는 자신들의 힘으로 행복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고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탄생시킨 것이지요. 참민정부 지지층을 포함한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이라크 파병을 거절하고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라크 파병은 애초에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최소화하여 보낼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을 잘 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지요. 우리 정부는 국민 여론을 핑계로 전투부대가 아닌 최소한의 규모를,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보낸 가장 성공적인 협상을 해낸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을 만큼 강대국입니까? 이 정도의 파병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에서도 칭찬해 줘야할 일인데 지지층 이탈이라니요. 저는 파병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행동도 정부의 운신의 폭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벌인 짜고 치는 고스톱 정도로 해석을 합니다. 파병 자체를 진심으로 안하기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한마디로 철부지라고 할 수 밖에 없지요.”
장태신은 벌게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할 말은 많지만 당신과 토론하러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니 더 이상 반론하지 않겠소. 대통령님께 내 의견을 말씀드렸으니 되었소. 김 보좌관이 이 장태신이나 대통령님을 보좌하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요. 나도 개인적으로는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님께 잘못된 조언을 드릴까봐 우려가 됩니다.”
그러나 김인철은 굳이 장태신을 김인철과 부딪치게 한 대통령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장태신을 상대로 그렇게 거침없이 이야기했던 것은 그 사람의 말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렇게 해보라는 대통령의 의사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색한 장면에서 대통령이 빙그레 웃고 있었으므로 그는 대통령의 의중에 대해서 확신했다.
‘현실성 없는 이상론으로 무장한 저런 자들이 대통령을 망쳐왔던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이주일 후 국회 여야 합의로 보안법 개정안과 과거사법은 폐기되고 사학법과 언론법은 통과되었다. 그와 함께 그 때까지 국회에 계류되어있던 파병연장 동의안, 새해 예산안 그리고 78개의 각종 민생법안이 처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정책특보 장태신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 날 이후 장태신은 참민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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