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은~
당시 극장무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 정진흡씨와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갓 데뷔한 국민가수 이미자와 결혼하여
"동백아가씨"가 빅히트를 치며 최고 인기가수가 된 1964년에 태어난다
1941년 이미자는 서울 한남동에서 을지로 화원시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아버지 이점성씨와 어머니 유상례씨 사이에 2남4녀중 장녀로 태어난다
1943년 아버지인 이점성씨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다
1944년 아버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유골이 전해져 온다
1945년 유상례씨는 다섯살난 어린딸을 외할머니에게 맡기로 개가를 한다
그러나 해방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게 되나
아버지 이점성씨는 이미 폐인처럼? 병환으로 눕게 되고
이미자는 어린시절 외할머니 슬하에서 외롭게 성장하게 된다
1957년 문산여고 2학년때 <KBS 라디오 노래자랑>에 교복을 입고 출전한다
1958년 이미자는 HLKZ TV 방송이 개최한 아마추어 노래 콩쿨인
<예능 로타리>에 출전하여 1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1959년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가요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1960년 데뷔초 어렵고 힘든시기 그녀의 곁에서 함께해준 정진흡씨와
이미자는 1년여동안의 열애끝에 19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다
1964년 첫딸인 정재은을 낳는다
1965년 64년 발표한 "동백아가씨"가 국내가요사상 최초로
100만장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집과 전화
그리고 자동차를 장만할만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
이미자는 이때를 사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던 꿈같은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1966년 아버지 정진흡과 어머니 이미자가 이혼을 하게 된다
1967년 2월5일 강릉에서 공연을 하던 이미자는 자신을 찾아온 생모 유상례씨를
22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미자와 어머니의 몇시간의 짧은 만남이 끝난후
어머니는 영주로 이미자는 다음 공연을 위해 묵호로 떠나게 되었고
이것이 이미자와 어머니 유상례씨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이혼후 이미자는 "아씨" "여자의 일생"등이 연이어 히트를 하면서
이미자는 국내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연주자였던 아버지 정진흡은 3류 악단장으로 전락하게 되고
더더욱 아버지가 진 빚으로 인하여 지방을 전전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자거나
여인숙 주인에게 이미자의 딸이라고 말하며 잠동냥까지 하며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
1969년 정재은은 2살때 어머니와 헤어진뒤 지금까지 총3번 만났다고 한다
정재은과 이미자가 처음 만났던 때는
외할아버지 이점성씨가 정재은을 납치하듯 데려와 이미자와 만나게 된다
이때 이미자는 정재은에게 "나와 함께 살래?"라고 물었고
정재은은 "엄마는 너무 많은걸 가졌고 아빠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으니 아빠와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말한뒤 몇일후 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정재은은 3일간 어머니와의 짧은만남후 다시 헤어지게 된다
1970년 이미자는 KBS PD 김창수씨와 재혼을 하게된다
1971년 정재은은 만7살때부터 악극단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1973년 8월 9살이던 정재은의 데뷔앨범인 스필릿앨범에서
"나의 엄마" "즐거운 일요일" "꼬마 운전사"를 발표하게 된다
1978년 7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MBC 국제가요제에서
"무지개 피는곳에"를 불러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대회는 국내가수 9명과 해외(동남아)가수 9명이 참가 하였으며
필리핀의 [하지 알레얀드로]군이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으로 최연소로 출전한 정재은이 특별상을 수상한다
(참고로 국내가수 9명이 출전하게 되어 있었으나 9곡중 2곡이
표절곡과 이미 발표된 노래라서 차점을 차지한 정재은과 숙자매가
대신 출전하게 되어 정재은은 국제대회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9년 일본가요계에 픽업되어 싱글앨범 3장과 LP 1장을 발표하며 각광을 받는다
1981년 4월 1집앨범에서 "항구" "새아씨" "내가 떠난 뒤에"를 발표한다
8월 정란여상 2학년에 재학중이던 정재은은
일본에서 "물망초"를 취입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국내에선 "항구"를 불러 MBC 가요순위 12위에 오르며
레코드 판매부문에선 조용필에 이어 정재은이 전체2위를 차지한다
그해 KBS 가요대상에서~
한경애의 "옛시인의 노래" 남궁옥분의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를 제치고
"항구"를 부른 정재은이 여자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참고로 그해 MBC 신인상은 남자는 유심초 여자는 민혜경이 차지한다)
1982년 2월 2집앨범에서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의 "연락선"을 발표한다
1983년 1월 3집앨범에서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의 "짝잃은 철새"를 발표한다
4월 일사와의 전속계약에 관한 소송에서 정재은이 승소한다
(참고로 내용은 1979년 2월 일본의 린도사와 일본에서 3년간 전속가수로
활동한다는 조건으로 매월 미화600달러와 일화 10만엔을 받기로 계약했으나
1980년 12월 사전통고없이 해약했다는 이유로 린도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으나 재판부는 소급 적용해 정재은 손을 들어준다)
11월 4집앨범에서 "사랑뿐이야" "어깨를 감싸며 살아요"와
한민이 불러서 히트했던 "어짜피 떠난 사람" 을 리바이벌해 발표한다
1984년 10월 5집앨범에서 "무정한 당신" "두고온 산하"를 발표한다
1985년 11월 6집앨범에서 "사랑의 사슬" "가야할 이사람 을"을 발표한다
1986년 아버지 정진흡씨가 큰 빚을 지고 몰래 일본으로 도피를 떠난다
이로인해 갑자기 아버지의 채무를 모두 떠안게 된 정재은은
모든것을 잃고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신세가 된다
1987년 6월 22일 강남 태극당 예식장에서 정재은은
DJ로 활동중인 5살 연상 한신우씨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정재은이 현실도피 수단으로 선택한 결혼은
결혼과 동시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파경에 이르게 된다
정재은과 어머니 이미자와의 두번째 만남은~
그해 전영록과 함께 해외공연을 가기위해 김포공황에 갔을때
전영록이 이미자를 먼저 보고는 정재은에게 "너희 어머니 저기 계신다"
"어여 인사를 들여라"고하여 정재은은 이렇게 이미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때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라며 말끝을 흐렸고
"사람들 보는 눈이 있으니 어서 가봐라"라며 두번째 만남은 짧게 끝난다
1988년 1월 7집앨범에서 "남자인데" "망향의 여인"을 발표한다
1991년 3월 8집앨범에서"사랑같은건 안할래" "이미 오래전 부터"를 발표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고수하던 트롯 대신 발라드가수로 변신을 시도한다
1997년 정재은과 이미자의 3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은~
모 스포츠 센터에서의 역시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계셔서
정재은은 이미자와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해 9집앨범에서 "애조" "바보같은 사랑"을 발표한다
1999년 9월 아버지 정진흡씨가 살고있는 일본으로 건너간 정재은은
일본 음반계에 거물로 김연자의 남편인 제일교포2세 김호식씨의
소개로 정재은은 일본에서의 제2의 가수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일본에서 엔카가수로 활동중인 정재은은
일본에서 데뷔곡인 "도쿄 트와이라이트"로 일본 레코드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오리콘 차트 엔카 부문 연속 1위, 3년 연속 일본 유선대상 유선음악 우수상
전일본 유선방송대상 골드리퀘스트상 등을 수상하는 등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
2002년 일본에서 각종차트와 시상식을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정재은은
자궁이 서서히 굳어가는 희귀병을 얻어 자궁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받는다
2008년 1월 "나리타 출발"로 USEN 가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해 고등학교때 헤어진 이복여동생의 결혼식장에서
이복여동생들과 새어머니를 2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이복여동생인 수임씨가 정재은의 매니저 역활을 하며 함께 한다고 한다
(참고로 아버지 정진흡씨는 새엄마와 재혼하여 딸 두명을 두고 있으며
86년 빚을 잔뜩 지고 몰래 일본으로 도피하여 현재는 일본에서 살고 있다)
"도쿄돔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 정재은
단 한번만이라도 어머니 품에 안기어 보고 싶다는 그녀
그러면 그리웠던 모든 감정이 사그러질 것 같다는 그녀
그녀의 재능을 타국에서 마음껏 펼쳐 그녀의 꿈이 꼭 이루워 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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