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는 부산에서
1948년 핵물리학자인 한창석과 피아니스트 박정자 사이에 태어난다
그러나 아버지인 한창석은 1948년 백일된 한대수를 홀로 나두고
서울대 공대 재학 중 핵물리학분야 최고 명문인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하워드 한"이라는 이름으로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산다
1954년 미국에 유학중인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경남 도지사를 지내고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신학자인 할아버지 한영교 박사와 살게된다
1958년 미국 뉴욕 할렘으로 이민을 떠난다
1962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에 다닌다
1965년 18세에 다시찾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롱아일랜드 고등학교에 전학.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산다
1966년 뉴햄프셔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 그러나 곧 자퇴하고 뉴욕사진학교에 입학
1968년 한국에 귀국하여 송착식 윤영주 조용남과 함께 쎄시봉에 데뷔한다
(이때 한대수는 한국에 포크록 이라는 장르를 처음 소개한다)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의 연주회는 번안곡이 대중음악의 전부였던 당시
상당수의 곡을 한대수 본인이 18세때 자작곡한 곡이란 점에서
이 공연은 1969년을 [한국 포크의 원년]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71년 해군에 입대 1974년 제대한다
1974년 1집앨범 <멀고 먼 길>에서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발표한다
그해 동갑나기 디자이너인 김명신과 결혼을 한다
1975년 코리아 헤럴드에서 기자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던중
2집앨범 <고무신>을 발표하나 체제 전복적인 음악이란 이유로
2집앨범은 수거령이 내리고 1집앨범은 판금조치가 취해진다
1989년 한국으로 되돌아온 한대수는 3집앨범 <무한대>를 발표
그해 첫번째 부인인 김명신과 이혼후
한때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낸다
1990년 재즈를 실험한 4집앨범 <기억상실> 발표
1991년 미니멀리즘으로 내달린 5집앨범 <천사의 담화>를 발표하며
실험의 선구자임을 대중에게 보여준다
1992년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에서 관리부장까지 지낸
22살 연하인 몽골계 러시아인인 옥사나 알페로바를 만나 재혼을 한다
1997년 일본의 록스타 "카멘 마키"를 앞세운 후쿠오카 공연에서 한국 대표로
출전한 한대수는 일본에서 엄청난 호응과 인기를 얻는다
잊혀졌던 한대수. 그를 재조명 한것은 국내가 아니라 일본이었던 것이다
2006년 12집앨범 <욕망>을 발표한다
2007년 22살 연하인 러시아인 옥사나와 결혼한지 15년만에 첫딸(한양호)를 얻게된다
결혼 당시부터 유전적인 영향으로 심한 알코올 의존증을 앓아오던 옥사나는
지금은 상태가 좋아 지긴 했지만 완치가 불가능할 정도의
가장 심한 수준의 알콜 중독으로 인해 5살짜리 어린딸 한양호양을
부인인 옥사나가 돌볼수 없는 상태라 한대수가 돌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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