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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목 집하장 -
광활한 황무지에 난 두 줄의 포장도로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마린다 공항의 활주로에 그들이 탄 여객기가 착륙했다. 낡은 비행기는 위태로운 느낌을 주는 겉보기와는 달리 꽤 부드럽게 착지하였다.
비행기가 비행장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이는 공항청사 가까이 굴러가서 정지하자 승객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두 명의 승무원이 승객들을 향해 아직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의 손동작을 보여준 다음 서로 도와 기체의 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밖으로부터 훅하고 들이닥친다. 밖으로부터 들어온 공기는 기체의 내부를 휘저어 하늘위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승객들의 체취를 마구 일으킨다.
김인철이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니 하퍼는 예상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유럽의 목재시장을 주무르는 독일 기업 ‘그란트팀버’그룹의 CEO 로서는 참으로 파격적인 행보다.
그는 일 년에 한번 꼴로 자신들이 사용하는 목재의 태반을 조달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다. 그와 같은 최고 경영자급의 인물이 산지를 직접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수도 자카르타나 제2의 도시 수라바야의 목재 가공공장을 둘러보는 경우는 있어도 원목 집하장이 있는 산속에까지 가는 경우는 없다.
이번 산지 방문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제 그의 회사와 전년보다 40% 늘어난 물량을 서로가 만족하는 가격에 계약을 하고 난 뒤 마련된 저녁식사 자리에서 김인철이 벌목장에 갈 계획을 이야기하자 그는 간곡하게 자신을 데려가 주도록 부탁했다.
데려가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곳은 나들이 가듯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길에서만도 온갖 고생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는 한참을 만류했지만 ‘나이 대여섯 살 더 먹었다고 네가 가는 곳에 낸들 못 가랴?’ 하며 한사코 따라가겠다는 그를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냉방이 시원찮은 공항 청사를 나서자 일제 SUV를 가지고 와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회사 직원 아구스가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냉방이 잘 된 차에 오르자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던 땀은 거짓말처럼 들어갔다.
그들이 탄 차는 양옆으로 사람 키 만 한 높이의 잡초와 갈대가 우거진 길을 30분 정도 달려서 바다처럼 넓고 호수처럼 잔잔한 강가에 도착했다. 사마린다 공항에서 임지까지 자동차로 가자면 네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는 하퍼의 양해를 구해 더 빨리 가는 길을 선택했다. 물길로 가면 여기서부터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강가에 대기하고 있는 스피드 보트로 갈아탔다.
기사는 혼자서 육로를 통해 차를 몰고 올 것이었다.
시간도 절약해 주지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의 물과 태양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물길을 그는 좋아했다.
가도 가도 그 자리에 있는 듯 느껴지는 아름답지만 단조로운 풍경을 가르며 보트는 달렸다.
하퍼의 하얀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부풀려져서 뒤로 날렸다. 바람을 즐기고 있는 듯 선글라스 안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물살을 가르느라 보트가 내지르고 있는 굉음 사이로 그가 소리쳤다.
“Do you like it?"
그리고 하퍼가 역시 소리쳐 대답했다.
“ I like it, I love it. Thank you so much for bring me here!"
상류 쪽으로 영원처럼 또는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만큼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보트가 이윽고 강의 왼쪽에 있는 캠프 마을에 도착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에 올라서자 캠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을 따라 수십 채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고 - 전적으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을로, 새로운 사람과 그 가족이 들어오면 나무로 집 한 채를 새로 짓는데 한나절이면 된다. - 너른 강물에 뗏목처럼 밧줄로 묶어놓은 수천 개의 원목들은 흡사 황토로 뒤덮인 육지처럼 보였다.
선착장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축구장 열서너 개 만 한 넓이의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원목 야적장인 그 초지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흡사 게처럼 생긴 중장비 두 대가 원목 둥치를 물었다 놨다 하며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고 강변에 면한 오른 쪽 끝에 있는 제재소에서는 수백 명의 일꾼들이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백여 대의 제재기들 사이를 분주하게 누비고 있었다.
가운데 쪽에는 나무로 만든 기둥 위에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제재목 보관소가 있고 그 안에서는 주로 아낙들이 말린 나무들을 번들로 묶고 있었다.
이곳은 그의 회사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8년 전에 개발을 허가받은 제주도 절반 크기의 삼림지의 시작점이자, 원목을 벌채하여 내다팔기 전에 보관하고 수종을 분류하고 일부는 제재도하는 중간 기착지, 베이스캠프이다.
처음에는 이곳에서부터 벌목을 시작했으나 나무를 잘라나감에 따라 벌목지점이 점점 멀어져서 지금은 여기서 스피드보트로 여섯 시간을 더 가야만 전방캠프가 나타난다.
8년 전 처음 나무를 베었던 이 베이스캠프 주변은 어느새 다시 울창한 숲으로 변하였다. 그의 회사는 벌채하는 나무 한 그루 당 20그루의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새로 심는 묘목 중의 절반은 백년 후에 지금 그들이 베는 것과 같은 크기(지름 1.5m -2m, 높이 20m -30m)의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고 경제성이 있는 수종인 머란티(나왕) 종이 선택된다. 나머지 절반은 지구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큰 재목이 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지만 성장이 빠르고 잎이 무성하여 10년이면 새로 심은 한 그루가 베어낸 한 그루 만큼의 산소를 내뿜는 '알바지아'라는 수종이다. 이놈은 나무가 물러서 경제성은 별로 없지만 여차하면 베어서 종이의 재료인 펄프를 만들 수 있는데 금방 다시 자라므로 부담 없이 벨 수 있다.
베어진 원목은 5미터 길이로 잘라져서 300개에서 500개 단위로 줄에 엮인 다음, 조그맣고 ‘톡톡톡톡’ 하는 엔진소리를 내는 1인용 터그보트에 매달려서 이곳까지 끌려 내려온다. 이 거북이 배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거기서 여기까지 30시간이 족히 걸린다.
이곳에 도착한 원목은 물에 떠있는 채로 1차 선별작업을 거쳐 조건에 맞는 놈들은 바로 바지선에 실려 원목상태로 가격이 좋은 합판용으로 판매된다. 합판용으로 팔기에 적합하지 않은 놈들은 땅으로 올려서 2차선별을 한다.
수종이 틀리거나 (물론 다른 수종도 합판용으로 쓸 수 있으나 이 산판에서 주로 나는 수종인 머란티로 합판회사와 판매계약이 체결되어 있으므로 머란티 만을 원목상태로 판매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머란티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강질목인 방끼레이, 머란티바뚜 등의 수종은 유럽시장에서 선호하는 수종으로, 가공해서 팔면 머란티 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 하퍼의 회사는 이 두 가지 수종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판매하는 회사이다.), 길이가 틀리거나 (벌목한 나무를 5미터 씩 자르고 난 나머지), 굵기가 다르거나 (지름 1.5-2미터를 벗어나는 것), 중간에 이상이 있는 것 (썩은 데나 커다란 옹이 등이 있는 것) 등은 제재소로 들어간다.
거기서 수종에 따라 고객으로부터 주문받은 규격으로 제재되고 자카르타에 있는 가공공장으로 옮겨져서 건조와 몰딩 등의 재가공의 공정을 거친 다음 반제품 건축자재가 되어 수출된다.
일하다가 뛰어온 캠프 책임자인 하산이 손을 내밀며 친구에게 하듯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는 인사를 받고 하퍼를 소개한 후 곧장 식당으로 가서 하퍼와 함께 맥주를 곁들여 간단하게 현지 음식으로 요기를 하였다. 식사 후 그는 현장을 둘러볼 채비를 하면서 하퍼에게는 좀 쉬도록 권했으나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따라 나섰다.
그들은 먼저 제제소로 갔다. 그는 이곳에 오면 언제나 몇 시간씩 서서 일꾼들이 제재하는 모습을 바라보곤 한다. 왜소하나 근육질인 일꾼들이 집채 만 한 원목을 들고 뛰어다니며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잡념마저 사라진다.
원목을 집어넣으면 입력된 규격에 따라 자동으로 공정이 진행되어 제재목을 토해내는 수십만 불짜리 기계를 수십 대나 보유하고 있다는 하퍼로서는 정말로 한심하고도 가소로운 작업일 터이지만 그는 전혀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대개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기계 한 대씩을 맡아서 일하는데 조별로 그들이 처리한 목재의 양만큼 성과급을 받는다. 5인조 한 팀이 생산하는 제재목의 양은 독일제 기계가 같은 시간에 해내는 양보다 많고, 수율도 더 높다. 기계는 썩은 부위, 휘어진 부위를 구분하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탓이다. 비용은 이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적게 들고 실업률이 높은 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으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시스템이다.
하퍼는 그의 옆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거리는 주로 머리 동작을 하면서 그들이 일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간헐적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Marvelous!’, ‘Amazing!’등 주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인생의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승려에게서 볼 수 있는 환희의 표정이 서려졌다.
그는 하퍼를 데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면서 일꾼들하고 농담도하고 격려도 하고 애로사항도 들어주면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분주하게 보냈다. 그가 다가온다고 해서 특별히 일을 열심히 하는 척 하거나 그를 어려워하는 일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하던 대로 단순한 일을 즐기고 있었다.
하퍼는 내일 떠나고 그는 며칠 더 묵을 예정이어서 그는 하퍼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퍼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행운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운이 좋은 쪽은 김인철이었다. 그는 지금 유럽 굴지의 바이어가 그의 든든한 평생의 후원자로 맺어지는 순간임을 느끼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목재 생산업자로서 하퍼와 같은 사람과 이렇게 친해질 기회가 있다면 누구나 목숨을 걸고라도 덤빌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람이 고맙게도 제 발로 걸어와서 그의 영원한 고객이 되고자 맹세하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의 사업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가 죽어라고 매달리고 쫒아 다닌 일들은 지독히도 어긋나고 실패로 돌아가는 반면 욕심 없이 순리에 따랐거나 그의 마음이 좋아하는 느낌에 따라 처리한 일에는 뜻밖의 행운이 따랐다. 그가 원목사업에 손을 댄 것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타인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그는 원래부터 나무를 좋아했고 나무에 대한 신비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느낌이 좋았었다. 그래서인지 원목에 손을 대고 부터는 사업이 승승장구, 일취월장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엄청난 수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미국 굴지의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입사한 이유는 오로지 한국을 떠나서 살겠다는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입사 후 미국 본사에서 연수를 겸한 3년의 근무 경력을 쌓은 후 임지를 배정받을 때 그는 한국 근무를 거절하고 모두가 기피하는 동남아지역 근무를 자원했다.
자카르타로 발령을 받아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이곳이 그의 사업을 시작할 곳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곳에서 국제금융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던 세 번째 해를 채 채우기 전에 회사를 사직하고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창업하고 한동안 추진하는 건마다 될 듯 될 듯 빗나가서 고전하고 있을 때 목재업을 하는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의 한 고객의 권유와 배려로 원목브로커 일을 시작하면서 나무와 인연을 맺었다.
산림개발을 시작한 것은 그 일이 잘되어 어느 정도 자금이 축적된 후인 17년 전,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산림청 관리의 권유와 도움 때문이었다. 그 당시 턱없이 부족한 자금으로 산림개발에 투신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등에서 식은땀이 날만큼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의외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산림개발이 궤도에 오르자 그의 회사는 한 단계 도약했다. 그러나 그의 회사가 큰돈을 한꺼번에 벌어 반석위에 올라간 계기는 아이엠에프로 일컬어지는 1997년의 아시아금융위기 때 만들어졌다. 그는 그때 환율이 1달러당 2000루피아에서 15000루피아 까지 치솟자 수출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모두 풀어서 정부 붕괴에 대한 불안으로 인하여 현지화 표시 가격이 아직 그대로인 수입차량, 기계, 장비와 원목, 부동산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그 후 나라가 안정되고 그것들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제 가격을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IMF를 앞세운 선진국들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삼림보호 압력은 원목 가격의 폭등을 불러왔고 그 때부터 수년간 오름세가 계속되었다. 수년 동안의 우호적인 사업 환경과 적절한 재테크의 결과로 아이엠에프 후 5년 만에 그의 재산은 수백 배로 불어났다. 불어난 자금력에 힘입어 그의 회사는 원목업계에서의 시장 지배력을 더 늘렸지만 산판운영은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그의 회사는 이곳 말고도 2개의 산판을 더 가지고 있다. 17년 전 개발한 첫 번째 것은 이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깔리만탄 섬의 남쪽 반자르마신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거의 나무가 고갈되어 적은 인원만 남아서 관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파푸아뉴기니와 국경을 맞댄 이리안자야라는 곳에 있는데 이곳의 1.5배 면적으로 이제 막 정부의 허가가 떨어져서 개발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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