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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주년) -2
대통령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실에 딸린 욕실에서 간단하게 얼굴과 손발을 씻고 나왔을 때는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영부인이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맥주와 마른안주들을 준비하고서였다.
오늘 같이 대중을 만난 후는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는 남편의 습관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주로 양주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맥주가 잠자기 전 친구로 선택된다. 소주는 고향 친구들이나 문정인 민정수석 같은 막역한 상대가 있을 때에만 마시는 술이므로 선택되는 경우가 없다.
그녀로서는 남편의 건강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자신도 한잔 씩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맥주가 좋았지만 언제나 남편의 선택을 존중했다. 오늘도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남편이 표정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의 표정읽기는 한 번도 틀려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두 개의 잔에 맥주를 거품이 나지 않게 가득 채운 후 하나씩 들고 가볍게 부딪혔다.
“어허 시원하다.”
단숨에 쭉 들이켠 대통령이 예의 상투적인 감탄사와 함께 빈 잔을 내려놓자 3분의 1쯤 마신 뒤 잔을 얌전하게 내려놓은 영부인이 대통령의 잔에 다시 맥주를 따르면서 말한다.
“천천히 마시세요. 늦은 밤에 마시는 술은 맥주라 해도 조심해야 해요. 오늘 지지자님들 만나는 자리는 어땠어요?”
“당신 예상대로요.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영이 좋기도 하고 미안하기도하고 ......., 내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무슨 특별초청 가수처럼 잠시 코빼기만 비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야 하는 대통령 자리가 참 불편한 거지?”
“그런 줄 모르고 대통령 하겠다고 나섰나요? 그나저나 또 사고나 안 치셨는지? 기자들도 많이 왔을 텐데.”
“왜 안쳐? 쳤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는 게 사고치는 거라면. 할 말 했지. 내가 하는 말은 나를 뽑아준 국민에게 하는 말이지 기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잖아?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쓰던 신경 쓰지 않을 참이요.”
“쯧쯧쯧, 그렇게 당하시면서........ 국민이 당신 말을 매체를 통해 들으니 문제지요. 그리고 언론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게 대중이라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 저는 솔직히 무서워요.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주기는 했지만 너무 변덕이 심해서 믿을 수가 없어요. 후보 때 지지율 때문에 속상하던 생각하면 끔찍해요. 오늘 그 자리에서 하시고 싶은 말 다하셨으면 내일 신문은 보지 마셔요.”
“궁금해서 안 볼 수가 있나?”
대통령은 영부인을 놀리겠다는 듯 심술 굳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보시고 나서 화를 내지나 마시든가, 나한테까지 화풀이를 해대시면서.........”
영부인도 애써 쀼루퉁한 표정을 만들고자 하지만 입가에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여보, 나는 내가 말한 내용 때문에 언론의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는 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요. 각자의 시각과 가치관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을 틀리게 보도하거나 말의 앞뒤를 편집해서 의미를 왜곡해서 보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겠소. 그리고 말의 내용이 아니라 엉뚱하게 말투가지고 시비를 당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해보았소. 당신은 대통령이 되어서 내가 쓰는 말이 그전에 쓰던 말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써 왔던 내 말투가 대통령이 쓰기에 부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평소에 쓰던 말투가 갑자기 달라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그 사람들이 꼬집어서 비판하는 ‘쪽수’니 ‘못해먹겠다’, ‘껭판친다.’ 이런 표현은 저도 대통령이 쓰기에는 품위가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단어를 뭐 하러 사용해요?"
"그런 단어들은 분명히 욕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이 쓰는 말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아닌 일반인이라 해도 아무자리 아무 상대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요. 내가 그거하나 구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내가 그런 말들을 사용한 것은 그런 말을 써도 될 만한 자리에서 딴에는 유머를 한답시고 서비스 차원에서 선택한 단어들인 것이오. 그런데 신문기자라는 사람들이 웃는 낯에 침을 뱉은 것이지. 대통령을 상대로 ........, 예전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였더라면 '서민적이다, 소탈하다' 하면서 칭찬을 했을 사람들이 말이요.”
"그랬었나요? 저도 당신이 장소 못 가리고 저급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직접 들으니 이해가 되는군요. 국민도 당신 말을 직접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진짜문제는 당신이 실컷 당하고 난 다음에도 그런 표현들을 계속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그런 걸로 당신을 공격하는 것을 알았으면 다시 안하면 되잖아요? 저는 당신이 오기로 그런다고 생각해요."
“오기?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내가 어릴 때부터 절대로 못하는 거 한 가지가 잘못도 없이 반성문 쓰는 거라는 사실 알지 않소? 언론에서 야단친다고 그만두면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소?"
“젊어서부터 고집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시더니....... 그런데 그 언론 한다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당신을 미워하는 겁니까?”
“첨에는 정치인으로서 언론의 눈치를 안 보니 그냥 좀 찍힌 수준 정도였겠지 ‘저 친구 철이 없네, 언제 한번 버릇을 고쳐줘야겠군’ 정도? 그러다가 자기들이 기피하는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니 낙선하도록 그들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게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와 저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상충하니 당연히 자기편 드느라고 나를 반대하는 거 아니겠소?, 더구나 내가 이루고자하는 언론개혁은 시장을 독점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직접 그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거 아니요? 자기들 살자고 생존에 위협이 되는 적을 공격하는 거야 이해할 수 있지."
잠시 끊은 대통령이 담배를 찾자 영부인은 이야기가 끊길세라 얼른 담배와 재떨이를 대령한다. 담배연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뿜으며 대통령의 말은 이어진다.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들 참 비겁해. 독재정권하에서의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자기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권에게 이렇게 까진 못할 텐데......, 내가 당선되고 나서 초기에 신문들의 태도가 어땠는지, 그리고 그 후 어떻게 변해왔는지 당신은 눈여겨보지 않았겠지? 대선 후 정명준씨가 보여준 행동하고 너무나 비슷해.”
“어쨌든 당신 말조심 좀 하셔야겠어요. 십분의 일 발언은 공연히 하셔가지고,....... 낮에 시간이 나기에 신문을 좀 읽었더니 참 가관입디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오간 정치자금의 본질은 다 내다버리고 그 말하나 꼬투리 잡아서 십 분지 일이 넘나 안 넘나만 가지고 따지고 있더군요. 당신 십분의 일 넘으면 아주 큰 봉변당하겠던데 자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 문제는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검찰 사람들이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는 내 의지에 고마워하면서 좌고우면 없는 수사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오. 자기들 본래 성향이 그래선지 아니면 눈 부라리고 대드는 야당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러는지 우리가 오히려 차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야. 어쨌든 우리 쪽 불법자금이 저쪽의 십분의 일이 안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요. 야당 사람들은 내 십분의 일 발언이 검찰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거라 말하는 데 검찰을 장악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이라면 굳이 언론을 통해서 가이드라인을 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소? 불러서 지시하면 되지. 언론에서는 뻔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야당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검찰은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정치적인 고려로 숫자를 맞추려고 하는 모양이오. 그러니 내가 말을 잘 못한 건 맞구려. 참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말이요.”
영부인의 얼굴에 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참 당신도 많이 변했는 모양이네요. 당신 원래 한 성질 하는 사람 아녜요? 나한테 툭하면 부리던 그 성깔 다 어디 갔나요? 당신이 대통령인데 한번 성대로 해버리지 그러세요? 검찰이다, 국정원이다, 국세청이다, 장관이다, 다 당신 부하들 아닌가요? 왜 힘 가진 당신이 만날 당하고 있어야 하나요? 신문사도 정권이 갋자고 들면 맘대로 못한다고 하던데.”
영부인의 말에 대통령은 눈을 크게 뜨면서 짐짓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확 성질대로 한 번 해삘까? 모두들 시껍하그로?"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대통령의 말이 이어진다.
"권력기관들을 정권에서 독립시키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요. 한 정권의 성패를 떠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요.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해도 권력기관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싶은 유혹 만큼은 물리쳐야 하오.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소? 일단 내가 먼저 독립시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놓으면 그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달라질 것이고 자신들의 새로운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도 하겠지........, 정권이 바뀐다 해도 마음대로 흔들 수는 없을 거요. 이런 일 하자고 대통령 나간 거 아니겠소? 그러니 힘들어도 견뎌야지.”
영부인의 얼굴에 서려있던 노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희미한 미소가 대신 떠올랐다.
“당신 대통령 되고나서 참말로 훌륭한 사람 됐어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카더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하, 내가 대통령 되고나서 좀 발전했지만 당신 따라가려면야 아직도 멀었지 멀었어.”
“호호호”
대통령의 말을 순순히 칭찬으로 받아들인 영부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곧 다시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그런데 만약에 정권이 바뀌어도 그 기관들이 당신이 해놓은 대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네요.”
“나 떠나고 나서 자기들 독립 유지하고 못하고는 저거들 알아서 할 일이지. 그것까지 내가 걱정할게 무어람?..........하긴 우리 쪽에서 한번만 더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텐데."
허공을 응시하는 대통령의 얼굴에 어느새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3캔의 맥주가 비워지자 여사가 냉장고로 가서 2캔을 더 가지고 왔다. 내일은 대통령의 외부 일정이 없으니 오늘밤은 좀 늦어도 큰 상관이 없을 터였다. 밤이 깊도록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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