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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의 실상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은 <기기>의 비밀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풍토기> 역시 중요한 열쇠지만, 남아 있는 사료가 너무 적고, <만엽집>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실린 것이어서 ‘열쇠’라기 보다는 교차 검증 가능한 사료라고 판단된다. <기기> 편찬 100년 후, <속일본기>(797년) 편찬 후에 나온 <신찬성씨록>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당시에 일본에 살던 귀족들에게도 중요한 책이다.
천황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 귀족들의 姓氏(성씨)에 대한 정확성 판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천황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책의 ‘권위’를 말한다. 천황이 보증하는 ‘계보’이니 딴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문의 편찬 목적을 보면 마치 ‘귀족(지배층) 중에 엉뚱한 姓(성)을 사용하는, 남의 姓(성)을 빙자하는 귀족이 있으니 이를 방지하고 가짜를 가려내기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고대 귀족(지배층)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고대귀족은 지금의 졸부와는 다르다. ※여기서 姓(성)과 氏(씨)는 별개의 의미인데, 별도 항목에서 다룬다.
<신천성씨록> 편찬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 가문은 아무개의 후손으로 ▲▲의 손자가 ◆◆천황 때 성을 하사 받았고, 某천황 때 아무개의 X대 후손이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 후손들 중에 계보를 혼동하는 이가 있으니 기록에 남겨 주십시오.’라고 천황에게 하소연을 하는 지배층이 등장한다.
<기기> 편찬 후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후손들조차도 자신들의 시조와 계보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신찬성씨록>에 지배층 중 ‘황별’과 ‘신별(천신, 천손, 국신)’이 65% 가까이 되는데, 이들 시조는 전부 <기기>에 등장하는 神(신)이다. 그러므로 지배층이 ‘자신이 어떤 신의 후손인지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고사기>를 712년에, <일본서기>를 720년에 각각 펴냈으니, <기기>를 보면 자신의 조상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층이 문맹이라는 가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기기>가 있음에도 조상(시조)을 판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제번(諸蕃) 역시 마찬가지다.
815년 당시에 <기기>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주요 지배층은 자신들의 ‘家傳(가전)/ 系譜(계보)’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가문들이나, 천황에게 상소를 한 가문 역시 쟁쟁한 가문들이기 때문이다.
<기기>의 주장대로라면 신무천황(BC 660년) 이후부터 815년 전후까지 1500년 이상 된 ‘족보’가 유·무형으로 이어져 왔어야 한다. 천황가의 족보를 암송하는 직책이 따로 있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문서로 된 ‘족보/계보’가 없었다하더라도 1000년이 넘는 가문 또한 그와 유사한 직책을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설령 해당 직책의 가신이 없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과 노래로 숱하게 조상에 대해 이야기 했을 텐데 왜 자기 조상과 시조를 못 알아보고 천황에게 상소를 하여 기록에 남겨달라고 했을까?
왜 천황은 정부가 공증하는 <신찬성씨록>을 편찬해야만 했을까? 궁금증을 뒤집어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신찬성씨록>을 펴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1)고대 귀족이 하루아침에 형성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2)거주와 이동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점, (3)따라서 귀족가문은 쉽게 세탁이나 위조를 할 수 없는 시절이라는 점, (4)<고사기>, <일본서기>가 있음에도 상류층이 자신의 시조와 조상을 쉽게 알 수 없었다는 점. 위에 언급한 4가지 이유 등으로 미루어보면, <신찬성씨록>의 서문에 있는 편찬목적은 그저 명분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얻고자 하는 결과물은 분명해 보인다. 지배층(귀족)들이 계보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니 천황이 공증하는 <신찬성씨록>을 배포하니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계보를 정확하게 알아두라고는 것이다. <기기>에서 너무 심하게 꼬아 조상과 역사를 숨겨두었기에 생긴 ‘우픈’ 결과물이다.
<신찬성씨록>은 서기 815년 당시 일본의 귀족들조차도 자신들의 계보, 조상을 알아보기 힘들어 할 때, 조상과 계보를 알아보라고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도 이 책을 이용하면 고대 일본의 귀족(지배층) 계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기기>가 있음에도 자신의 계보를 알지 못하는 일본 지배층이 <신찬성씨록>만 있으면 <기기>에서 자신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고 과거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신찬성씨록>으로 <기기>에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신찬성씨록>은 <기기>를 해독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단, 우리는 21세기의 시각으로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기기>를 이해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815년 당시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지배층의 시각으로 <기기>를 풀어야 한다. 노련한 수사관이 범행할 당시의 범인의 처지가 되어 범행 동기를 헤아리듯 해야 한다.
서기 720년과 서기 815년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기 712~720년에 <기기>가 편찬 되었다. 이 시기에 지배층들은 별다른 문제없이 <기기>를 통해 자신들의 계보를 파악했다. 그런데 815년 즈음 지배층들은 계보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슨 이유일까? 해독이 불가능해서다. 무슨 말인지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지금의 일본인이나 한국인들만큼은 아니겠지만, 815년 당시에도 <기기>의 내용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지배층은 알아볼 수 없었고, 720년의 지배층은 알아볼 수 있었기에 <신찬성씨록>이 편찬 된 것이다. 720년과 815년은 3~5세대 차이가 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세대차이가 크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시대였다. 같은 책을 두고 해독에 차이가 날만큼 큰 차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말=언어가 달라진 것이다.
720년대 <기기>를 읽는 사람들은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이고, 815년대에 사람은 한국어를 잊은 사람들, 토착화되어 일본어만 가능한 사람들인 것이다. 둘 다 漢字(한자)는 읽을 수 있지만, 한국어는 720년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능했다는 말이다. <기기>는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가능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760년에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등씨가전(藤氏家傳)을 편찬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 <기기>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사용했다는 것은 <기기>를 해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설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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