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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
글쓴이 :  만각                   날짜 : 2019-01-11 (금) 10:39 조회 : 479 추천 : 7 비추천 : 0
만각 기자 (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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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짤방 해파리는 보기에는 화려하나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물체다. 나 또한 그러지 않을까 경계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고자 노력한다

2017년 9월에 위암진단으로 위를 50% 절제수술 받고 연말에 평소 지인 임철중(치과원장으로 5권의 수필집을 낸 보수인사)과 2017년 송년 저녁을 먹으며 나는 잡초처럼 남다른 인생을 살아왔기에 죽기전에 뭔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지나온 여정을 대충 엮어 작가에 주면 어떨까 의견을 제시하니 임철중은 날 보고

 "만각 당신이 직접 써도 될 거 같다, 꼭 유식하게 쓴 글만 글이 아니다, 당신의 글은 날것(Raw)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니 직접 써 보시오!" 하여 2018년1월에 그동안 디어뉴스에 파편적으로 올린 글과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을 임철중에게 스크린 해달라고 하니 그는 '발문'을 써주며 책 표지 뒷면에 사용거나 추천사로  써도 좋다고 했다.앞으로 여건이 허락하면 출판하여 국세청 동료,후배 및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10달을 간직하던 중, 봉추님이 디어뉴스에 올려서 집단지성의 힘을 모아보자 하여 올린 것이다. 그러니 소설은 아니고 나의 인생 고백서라고 할까?

오늘은 첫 날이고 금요일이니 3일분 17페이지(배고팠던 시절)를 올리고...평일에 몇 페이지를 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총 193페이지 이니 독자들의 뜻에 따라 10일~15일 안에 올리고 빨리 끝내는 것이 어떤지 판달할 것이다! 자, 그럼 들어간다!!

 배고팠던 시절: 나의 뿌리와 영등포 찍새                   

                              < 들 어 가 기 >

  봄바람 부는 어느 날, 공주 산림박물관을 구경하러 가는 도중에 공암리 길가에 있는 뿌리공예장을 들렀다. 버려진 가지, 고목의 뿌리 등 폐목도 활용가치에 따라 다양하게 재창조 공예품으로 변신된다. 그 중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끈 통나무탁자의 나이테는 관록을 자랑하듯 단단한 주름살을 감추지 않고 근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물끄러미 나이테를 보는 순간, 오래전 서울 명동의 심지다방에서 대마초를 한 모금 빨아 입안에 물고 집중하던 태극선 모양의 동심원이 오버랩 되었다. 순간 나의 뇌는 동심원의 구심점인 나이테의 원점을 향하여 빨려들어 갔다

  나이테의 밀도, 간격과 모양에 따라 계절의 변화무쌍함, 빛의 방향과 연륜을 알 수 있듯이, 내 인생의 나이테에 숨어있는 추억과 그리움의 날개를 펄럭이고 싶었다. 이야기는 추억의 원점에서 빠져나와 나의 뇌 속에 흐릿하게 새겨진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여정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모두가 어려웠던 1950년 후반부터 나의 이야기는 시작 된다

                                            < 복잡한 족보 >

     충남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병산사사당은 한말의 유학자이자 항일의사인 덕천 성기운선생을 모신 곳이다. 덕천은 본관이 창녕이고 대제학 성석용의 16대 손이자 한말의 대유학자 간제 전우의 문인이다. 청도에서 출생하였으나 일제에 항거하여 배일거두로 지목되어 유배생활 하시다가 선조의 고향인 연기군 달전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시니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신 선생의 충의에 감동하여 따르는 제자가 전국적으로 800여명이나 되었다. 그 후 선생은 1953년 충현서원의 장을 지냈으며 195680세로 하시었다. 병산사에는 2기의 비석과 선생의 문집, 목판 250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7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 병산사: 향토문화재 제36

     위 덕천장 성기운 선생의 셋째 따님이 내 아버지의 아내가 되었으니 덕천장과 아버지는 장인, 사위 관계가 되었다. 선생은 우암자손 족보 하나 보고 딸을 나의 아버지께 주시었다고 들었다. 어쨌든 두 분은 아들을 하나 낳고 사시다가 존귀한 덕천의 따님이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그 때 재취로 들어오신 분이 나의 생모이었으니 돌아가신 덕천장의 셋째 따님과 나와의 관계는 큰 어머니가 틀림없으니, 나의 외할아버지가 덕천장이라 해도 거짓은 아니리라. 따라서 나는 어머니가 둘 이었고 외가도 둘 이었다

    옛날에는 족내혼이 흔하여 아버지의 사촌형님 딸(나에겐 육촌누나)인 당질을 덕천장의 큰 아들과 결혼 시켰으니 덕천장의 아들은 나의 누님의 남편이자, 아버지의 처남으로서, 외삼촌이기도 하고 매형이기도 하였으니 참 족보가 혼란스러웠다. 호칭은 가까운 곳으로 부르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 처남은 외삼촌으로 불렀고 외숙모는 전부터 부르던 누님이라 불렀다. 바로 그 누나가 나에게는 유일한 손위 누님이었으며 정겹게 날 귀여워하셨다 

                                              < 유 년 기 >

     어머니는 아들 3명을 낳았으니 생모 입장에서는 내가 큰 아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학자집안의 유식한 부인과 살다가 재취로 시집온 나의 어머니와는 지적, 문화적 차이로 소통에 문제가 생겼는지 또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셨다

     아버지는 철도청 공무원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전라도 여수에서 한 여인을 알게 되어 우리가 살던 대전시 소제동, 같은 동네의 중턱 날망이에 작은 어머니와도 딴 살림을 차렸다

     공무원 봉급에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는 작은 집에 더 신경 쓰니 우리 집은 생활이 참으로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정한 행위에 항거하고자 여수출신 여수 같은 첩년이 고생 좀 해보라고 우리 형제를 작은 집에 보냈다. 가서 보니 반찬이나 씀씀이가 우리 집 보다 훨씬 나앗다. 이틀이 지난 후 세 살 먹은 동생은 작은어머니가 우리 엄마 아니라며 쪼로록 내려가 버려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국민학교 입학 전인 나는 통밥을 굴려보니 이곳의 생활이 훨씬 윤택하여 작은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면서 그 곳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 작은어머니 역시 정 붙이고 살려면 나라도 인질을 삼아야 했기에 아주 살갑게 대하여 주어 나는 아예 눌러앉아버렸다. 친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괘씸하였겠는가? 어린 동생은 친엄마 아니라고 하루 만에 내려왔는데 믿었던 큰 아들이 배신을 때렸으니.....그 후 나는 작은 어머니의 고향인 여수에 함께 기차를 타고 다녀오는 등, 5개월간 두 집을 왕래하는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한참 후 아버지는 한 동네에서 같이 살기가 불편했는지 작은 집을 이웃동네 가양동으로 옮기셨다

     19604.19 혁명 후 공직자 기강을 잡기 위해 혁명정부는 부패 공무원 숙정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 우리 아버지는 축첩으로 해고되었다. 밥을 위한 고난의 행군, 빵을 위한 나의 처절한 투쟁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 된다

     아버지는 퇴직금을 받아 대전 중동에 국제세탁소를 운영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외식업 경험도 없이 세종식당이란 거창한 상호로 식당을 개업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얼씬도 못하고, 작은 어머니가 카운터 보며 돈 관리를 전담하였다. 경험 없는 공무원출신 초짜 사장에 부실한 돈 관리로 2년을 못 버틴 채 우리 집은 풍비박산 되었고, 아마도 한 밑천 챙긴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 어머니는 떠났다. 그 해 국민학교 졸업한 19622, 나의 졸업사진에는 키 작고, 수십 번 빨아 빛바랜 교복을 입은 내가 퀭한 모습으로 서 있다

                                    < 서울 무작정 상경 >

     친구들은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내 앞은 캄캄했다. 돌파구를 찾아보자. 서울로 가자! 공부 못 할 바에는 돈 벌러 영등포로 가자! 영등포에는 공장이 많이 있다 하니 취직이 쉽지 않을까? 그러나 서울에 가 본적이 없는 내게 무슨 연줄이 있겠는가? 차비는 어떻게 하나? 밤새 고민하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빠방틀어(무임승차) 올라탔다. 화통에서 검은 연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증기기관차가 신탄진 금강 아치형 철교를 지나면서 덜컹덜컹 소리가 나는 순간, 나의 심장 박동소리도 더불어 덜컹덜컹... ! 정말 내가 고향을 떠나는구나 하고 실감을 느꼈다! 나는 객실에서 나와 승강계단의 양손잡이를 잡고 차가운 아침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엄니! 아부지! 저는 떠납니다! 서울로 돈 벌로 가유~~~! 어머니!!!”

     검표원의 열차표 검사가 수시로 있어 정차 시에 앞으로, 뒤로 숨바꼭질 하였다. 급하면 화장실로 숨어들고, 금방 지나갔는데 또 다른 검표원과 마주치자 급하게 의자 밑으로 엎드려 기어들어가 숨었다. 그 곳은 바로 어떤 아주머니 치마폭 아래였다.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라시다 검표원을 본 그 아주머니는 살포시 치마를 내려주어 나를 숨겨주셨다

     기차를 빠방 틀었던(몰래 들어감) 이야기를 하니 아득한 옛날 가설극장을 빠방틀던 일이 생각난다. 극장이 귀하던 시절 영화를 활동사진(움직이는 그림)이라 불렀다. 환등기로 대형화면에 정지된 그림의 만화만 봐도 신기했다. 변사가 구성진 목소리로 화면을 구연했던 무성영화만 봐도 가슴 설레던 시절이었다. 활동사진 상영을 위한 이동식 가설극장은 지주에 천막을 엮어 밑바닥을 단단하게 해야 빠방을 예방한다. 우리는 입장료 돈이 없으니 가설극장에 몰래 기어들어가다 극장 기도에 들켜 너 이놈! 어디를 기어들어 오냐막대기로 머리를 맞고 실패했던 경험도 있었다. 누구는 빠방틀 때 엉덩이부터 디밀어 뒤로 들어가면 극장 기도가 ! 너 어디로 나가? 거기는 출구가 아냐! 저쪽으로 나가하면 하면서 뒤로 빠꾸하여 가설극장 입장에 성공했다는 전설도 있었다

     무성영화는 변사가 영화장면을 보고 상황 설명하며 성우를 대신하여 구성진 목소리로 구연하는 것이다. 멀리서 서부의 총잡이가 화면을 향하여 말 타고 달려오면 변사는 영화장면을 구연 설명한다. “! 저기서 말 밥굽 먼지와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저자는 누구인가? ! 그것은 나도 모른다! 와봐야 안다!” 드디어 주인공 얼굴이 화면 스크린에 클로즈업 되자, “! 그것은 애꾸눈 짹크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영등포에 도착, 무작정 상경이었으니 무슨 대책이 있었겠는가? 주머니에는 몇 푼의 동전만이 떨그럭거렸다. 딱 눈에 띄는 것은 구두닦이들 이었다. 그러나 알지도 못 하는 사이인데 뭐라 말을 붙일까? 뭔가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무조건 걷는데 영등포 역전 영1동 창녀촌을 거쳐 도림동 철길 건널목을 건넜다. 오른쪽에 도림목욕탕 구인 광고에 숙식제공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반가워서 얼른 들어가 면접을 보고 일하기로 하였다. 숙식제공이란 게 급여는 보리쌀 2, 숙소는 목욕탕 보일라 굴뚝이 지나가는 락카룸 벽쪽, 온기가 늘 있어서 담요 한 장만으로도 그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

     욕탕 청소와 탕 속에 때가 떠다니면 잠자리채로 때를 걸러내는 일, 락커룸 문 따주는 일, 신발장 정리하는 것이 나의 일 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보통 일 년에 목욕을 한두 번 다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명절 전후에는 목욕탕이 손님으로 미어터졌다. 탕 속에서 때를 미니까 수시로 잠자리채로 때를 걸러내야만 했다

     당시 옷을 보관하는 락커는 아주 원시적인 기역자 () 꺽쇠가 마스터키였다. 시건장치라고 해봐야 문을 닫으면 문에서 일자로 사각형 숫놈 고리가 문틀 암놈 구멍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이 문을 열 때 커다란 ㄱ자 꼬챙이 꺽쇠를 문구멍에 넣어 숫놈 고리를 들어 올려 당기면 문이 열렸다. 나의 첫 직업은 키보이(Key boy), 그 후 인생의 어려운 문제의 문을 여는 기술을 이 때 터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재미있었던 일은 입구 남탕, 여탕 가운데 표 파는 곳에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잠깐 화장실 가면 살짝 여탕 락커룸을 훔쳐보는 아찔한 순간, 그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건전한 호기심은 삶의 의욕과 변화의 가능성, 새로움에 대한 갈증, 도전하는 단초가 될 수 있는 것 이지만.... 아무튼 이 직업 이후로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배달, 께끼장사, 우산장사, 껌팔이 등 닥치는 대로 온 몸을 부딪치며 살았다

                              < 운명적 지우의 만남 1 >

     바로 이 목욕탕에서 일 하며 평생의 지기 이병학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어느 날 내 또래 남자 두 명이 목욕하러 왔는데 형제 같았다. 그 중 형은 중학교 1학년 교복을 입었고, 동생은 국민학교 5학년 정도인데 덩치는 자기 형보다 컸다. 욕조의 때 덩어리를 잠자리 뜰채로 건지고 탈의실로 나오는 중 이었는데 동생놈이 날 보고

  ! 너 일루 와봐! 너 빨리 문 안 따? 신발은 니가 신발장에 넣어라!”

이 새끼가 순 반말로 지껄이는데, 순간 욱 하여 나도 자존심은 있어서

얌마! 너 날 언제 봤다고 반말 하냐! 존 말해도 알아먹는데 야! 너라니!”

뭐라고? 얌마? 이 좃만한 새끼가 범 무서운 줄 모르네!”

! 너 몇 살이야? 나도 학교 댕겼으면 지금 중학생이여, 국민학교 좃만한 새끼가

? 좃만한 새끼? 이게 정말 좃만한 새끼가 엉기네!”

보통 싸우다 할 말 없으면 나이를 무기로 삼곤 한다! 동생놈과 싸우는데 점잖게 생긴 중학생 형이 와서 말렸다

동생이 버릇없이 한 것 같으니 형씨가 그만 두시오!”하며 동생을 나무랐다

알겠습니다, 나도 학교 들어갔으면 형씨와 같은 중학생이요, 고맙습니다

     떡대가 나보다 큰 동생과 계속 싸웠으면 동생에게 졸라 맞을 뻔 했다. 또 목욕탕 주인이 알면 쫓겨날 뻔 했는데. 형놈이 싸가지가 있어 크게 번지진 않았다. 하긴 나의 키가 작고 얼굴이 어려보이니 동생 놈이 맞먹으려 한 거 이해는 간다. 나도 그 자리에서 화해하고 형놈을 눈에 박아 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놈은 도림동 부잣집 장남 이병학,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필연의 존재가 될 줄이야....

                              < 직업 전환: 구두닦이 >

     목욕탕 락커보이를 6개월 하였으나 도저히 생활이 안 되었다. 그래서 영등포역에 가서 뭐 할 거 없나 두리번거렸다. 당시 영등포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있었다.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 진등포라불렸다. 구두에 흙이 더덕더덕 붙어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두를 자주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구두닦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구두닦이 광택사(shoeshine boy)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닦새가 되려면 우선 구두를 찍어오는 찍새부터 해야 했다. 선배 닦새들이 몇 가지 교육을 했다. 구두닦이는 건달 끼가 있어야하고, 욕을 잘 해야 하며 웬만하면 손님에게 겁을 주듯이 말끝을 어~~으어~~!!! 해야 한다나!

1. 존댓말 쓰지 마!

1. 반말 비스무리하게 발음을 얼버무린다

(): 구두 닦으세요--> ~~어요, 으어~~!

신 닦어요 --> 씬 따~어여, 으어~~!

아저씨 구두 닦어요 --> 앗씨 꾸 따~으어,으어~!

아저씨 신 닦어요 --> 아씬 따~으어, 으어~!

욕은 실감나게 된소리를 많이 쓴다

1.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위아래로 눈을 야리며 다리를 떤다나, 별 드런 교육을 받았다

    인근 다방을 돌며 구성진 목소리로 위 CM송을 외치며 구두를 찍어 오다보니 자연히 닦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한 번은 다방에 나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손님이 있어 나는 구두 닦으라는 작업을 하였다

     아씨! 꾸 따~~으어, 으어~!!!”

안 딲어 임마!!!” 내가 키도 작고 어려 보이니 날 깔보았다

뭐 임마? 이런 씨~~! 아씬 따~~~으어, 으어!!” 눈을 내리깔며

안 딲어기가 죽었다

구 따~으어, 으어!! 어따 대고 반말이야!” 나의 목소리가 커진다

안 닦을래요!“ 존댓말 톤이다...히야시 먹었어

딲어! 씨발마!(씨발놈아)“

닦을래요!” 얼른 구두를 벗어준다

얼마에요?”

“30

? ? 예?  !!~~~~!”

     나의 형뻘 되는 손님이 나에게 반말 했다가 혼구멍이 난 사건이다. 당시 구두 한 켤레 닦는데 5원 이었으나 어리숙한 손님 만나면 바가지 씌우는 갈취행위를 하였지만, 우리는 모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다반사로 행하였다

                                           ( 구두 닦는 기술 )

 1. 구두는 아무리 잘 닦아도 밑창 테두리(당시엔 대다리라 했다)가 더러우면 꽝이다. 먼저 대다리의 흙을 칫솔로 털고 구두약을 바른다. 그러나 구두약이 귀한 때라 대다리 구두약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검정빨래 비누에 검은 색소를 넣고 끓이다가 굳기 전에 휘발유를 살짝 얹어 섞어 쓰면 되는데 당장 닦으면 습기와 기름끼가 있어 까만색이 나지만 색소가 융합이 잘 안 되어 마르면 밑창 대다리가 희끗희끗 드러난다. 그러나 떠난 후의 일이니...진짜 구두약을 대다리에도 써야 깔끔하게 오래 유지 된다

 2. 구두에 곰보를 없애야 함으로 줄지기를 사용한다. 줄지기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폭 2cm 정도 되어 실을 풀어 써도 되는 국방색 줄지기가 있으며 아니면 구두끈 너비 2~3mm 되는 줄을 사용하여 쌰다시(구두약, 말표, 캉가루표) 바르고 쎄게 문지르면 기왕에 벗겨진 메끼의 곰보를 골고루 메꾸어 주기도 하며, 구두약이 구두가죽 표면에 스며들어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다

 3. 다음은 구두약솔로 구두약을 골고루 바르고 빽빽이(미군 압박붕대)로 좌우를 문질러 주면 광이 나기 시작한다. 문지르기 전에 빽빽이의 먼지를 턴다고 ~허공에 소리를 내고 문지르면 실감도 나고, 박자도 맞으니 열심히 닦는 신뢰감을 준다

 4. 손이 앞뒤좌우로 무지 빠르게 예술적으로 실감나게 구두약을 손가락으로 바르고, 깨꾸통(구두통)탁탁두 번 치면 왼발, 오른 발을 교대로 바꾸어 준다. 바뀐 구두에는 이미 약이 칠해져있어 가죽에 밀착 굳으려 할 때 다시 한 번 약솔로 칠하면 먼저 바른 약과 기름기가 섞인다. 이때 젖은 융보로나 메리야쓰 천을 손가락에 감아 침이나 물을 바르고 광을 내기 시작하는데 물메끼는 물보다 맑은 침을 뱉어 문지른다. 그냥 침이 아니고 혀를 살짝 내밀고 숨을 쉬익소리 내며 들여 마시면 혀 밑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맑은 침이 구두약과 잘 어우러져 메끼가 잘 먹는다. 어떤 손님은 침 뱉어 더럽다고 싫어하기도 한다. 이것을 통칭 물메끼라 한다. 가끔 불메끼도 하는데 좀 비싸다. 불메끼는 약을 많이 바르고 살짝 불을 지르면 구두약이 녹으며 가죽표면에 스며들어 광내기가 좋으나 약을 너무 두텁게 바르고 불을 쎄게 지르면 구두 꿰맨 실밥을 태워 물어줄 수 있어 위험하기도 했다

5. 메끼로 광을 내면 손가락헝겁으로 문지른 자욱이 남아 길난 융보로나 미군부대 모기장(아주 부드럽다, 미제가 좋긴 좋더라)으로 살살 문지르면 자욱이 없어져 광택이 깔끔하게 난다

     드디어 나는 딱새가 되어 장비를 준비해야 했다. 깨꾸통(구두통), 구두약, 구두솔(약솔, 광솔), 칫솔, 구두골(손등 같은 주걱으로 주름진 구두를 펴주는 것이 구두골이 나중 패쌈할 때는 무기로 둔갑), 융보로(비단 같은 헝겊), 모기장, 빽빽이(압박붕대) 등등 첨단 무기로 무장하였으니 나는 독립하여 영등포 삼구시장 근처 옛날 서울극장과 영보극장 사이 구역을 설치게(자기 구역처럼 영업하러 돌아다님) 되었다. 구두닦이에도 지정석이 있어서 이곳을 구두터라 했다. 지정석이란 건달들이 이미 구역을 정해놓아 상납 받는 곳으로 구두터 구역 권리금이 기본 10만원, 다방, 고층건물, 큰 여관(새벽에 닦는다) 등은 선점되어 잘못 들어갔다가는 다구리(몰매)를 탄다. 누가 정했는지 몰라도 독점적 구역이 있다니? 바다에도 각자의 어장이 있고 비행기도 정해진 길이 있다지만 언놈이 언제부터 누구 허락받고 지정했는지 불문율의 나와바리(관할구역)가 있었다

     구두닦이의 선수가 되다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 노름판에서 화투 칠 때 노름꾼들 사이에 밑창빼기가 있듯이 구두닦이에도 밑창치기가 있다. 구두약이 귀하던 그 시절 손님은 그 비싼 약을 많이 바르라 하니 손님이 볼 때는 구두약을 많이 바르는 척을 해야 했다. 약통 절반은 구두약, 절반은 구두약 없는 맨바닥인데 나는 맨바닥과 약의 중간에서 절묘하게 손가락이 놀며 따닥따닥 소리 내며 약을 칠 하다가 손님이 안 보거나 한 눈 팔면 왼쪽 약손의 약통을 오른 손으로 탁 치면 180도 돌아간다. 구두약 없는 약통 뒷면을, 특히 구두 뒤를 약칠할 때는 손님의 눈이 보이지 않으니 열심히 소리 내어 따닥따닥약 많이 칠하는 척 빈 통을 두드리다 손님이 볼라치면 다시 약통을 탁 쳐서 구두약 있는 면 원위치로 돌아가면 슬슬 약을 바른다. 광만 내면 되니까... 그러다 한 번 꼴통 손님한데 걸렸다

이 새끼가 어디서 색 써! 이눔 시끼야! 마빡에 사구라 꽃 피는 꼴 볼래?”

     하며 눈을 야릴 때는 간이 철렁! 내가 잘 못 했으니 할 말도 없었다. 색 쓴다는 말은 남녀가 운우지정을 나눌 때 여자가 싫어도 좋은 척 거짓 표현을 하는데 쓰이는 용어가 구두닦을 때 쓰일 줄이야? 결국 색 쓴다는 표현은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색 쓰는 사람이 또 있다. 화가가 그림 그릴 때 물감 쓰는 것도 색 쓴다하더라

     꿀림방(잠자는 곳)이 있어야 했는데 당산동 근처 근로자합숙소에는 온갖 잡놈들이 밤마다 모이는데 땀 내, 발 냄새, 때 냄새의 몹쓸 향기가 코를 찌르고 때론 코를 마비시켜 나중엔 방귀 냄새까지, 게다가 코를 고는 놈, 이빨 가는 놈, 그저 생지옥이다. 식사는 영등포역 앞, 우체국 옆에서 진 노란색의 짬밥 꿀꿀이죽(미군부대 잔밥을 끓인 것)을 사먹기도 했고, 영등포 경찰서 옆 근로자급식소에서 5원이면 세수 대야처럼 큰 냄비에 국수가 넘치며 맛도 괜찮아 한참을 줄서야 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영등포 삼구시장은 집단상가로 지붕이 통째로 쳐져있었다. 그 안에는 포목점이 많았는데 바닥은 흙길이었다. 포목점이 낮에는 장사하다 밤에는 폐점할 때 바로 나무로 만든 덧문 여러 개를 병풍처럼 밀어서 가게를 닫는다. 낮에는 이 덧문을 빼서 보관해야 했다. 바로 사람 다니는 흙길 통로를 밑으로 깊게 파면 공간이 생기는데, 덧문을 통로 바닥구덩이에 차곡차곡 보관하고 통로 위는 덮개로 덮어 사람이 지나다닌다. 자연히 밤에는 덧문 보관 장소가 비어 나의 침실이 되었다. 그러다 아침에 덮개 위로 사람이 다니면 저벅저벅 소리가 나니 알람시계가 없어도 자연히 기상을 하게 된다. 덮개를 열고 머리를 디밀어 나올라치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행인 앞에 웬 대가리가 ~나와 마주치면 그 행인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물론 밤에는 가끔 야경꾼이 돌아 잠을 설치게도 하지만 덧문 보관 장소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어 담요 두 장 가지고도 추위를 이길 수 있는 행복한 보금자리였다

                                         < 아이스케익 장사 >

    비가 안 와 날씨가 맑으면 구두손님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차피 구역을 설치는데 나는 아이스케익 장사를 겸했다. 투잡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바닥 난장에서는 장사치들이 외치는 소리는 거의 일정하게 반말 비슷하다. 나는 뜻도 모르고 선배들 하는 대로 Ice Cake아이스끼~, 어럼과자~” 영보극장 뒤에 백명당이란 우유 아이스께끼가 인기 있었다. 나는 이렇게 외친다. “아이스케익! 백명당 아이스케끼!--> 아이스끼게! 뱅마~아오스께!”로 구성지게 질렀다. 평소엔 께끼라 하며 외칠 때는 왜 끼게라고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바로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며 청자 도공 인간문화재 해강 유근형옹의 차남 유승열을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무형문화재 13호 해강 유근형 옹 (1894~1993) 100세에 하시고 장남 유광열씨가 대를 이어 도공의 길을 걷고 있다. 해강은 500년간 단절된 상감청자의 비법을 재현하신 분이다. 청자 가마가 있다면 전국 어느 곳이든 유람하시며 각 지역의 가마와 흙을 연구하고 도자 파편을 수집하여 깨알같이 번호를 매기셨다. 이천 해강 도자미술관의 국보급 청자보다 도자파편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신 분이다. 1956년 국가대표로 캘리포니아 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시어 금메달을 수상하셨고,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신 인간문화재 해강 유근형 옹이시다

     그러나 당시 도자 예술인의 길은 춥고 배고픈 시절로 60년대에 서울 미도파 옆 시대백화점‘(지금은 없어짐) 2층에서 3층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매장이 있었지만 입에 풀칠하기에도 어려움을 겪으셨다. 한일회담 국교정상화 되고 70~80년대 일본경제가 호황을 누렸다. 이 때 일본인들이 해강작품의 가치를 높이 보게 되었다. 그 분의 작품이 일본에 수출되어 그 당시 번 돈으로 1990년에 해강 도자 미술관을 건축하였는데 지금은 운영에 문제 있어 국제대학이 기증받아 관리하고 있다. 당시에 일본 수상 기시노부스께나(전범) 각국 대사들이 방문하면 해강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행복해 하였다. 해강은 보청기를 사용하시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고 착용 거부하셨다. 말년에는 도자 성형은 못 하시고 음각만 하셨는데 손이 너무 떨려서 선이 흔들리게 음각만 하셨는데도 일본인들은 흔들린 버드나무가지가 추상적인 청자 작품이라 더 좋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여기서 나는 해강 선생의 차남 유승열과 청자에 얽힌 추억을 얘기하고자 한다. 유승열은 께끼장사 하다 만났는데 예술 도자기로 먹고살기 어려웠던 해강은 승열을 중학교에 보낼수 없었다. 그는 1965년에 검정고시학원에 입학하여 학원사환인 나와 또 만나게 된다. 그 후 유승열은 노량진 동양공고 요업과에 입학해서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미8군 쇼단 공연 때 승열이를 미군부대 데리고 다니며 귀한 양주, 양담배, 캔맥주를 사주면서 놀았고, 그 친구는 아버지 해강 작품 청자어룡형주전자를 나에게 선물했다. 수년 후 이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삼구시장' 양철지붕에 비가 오면 따발총 소리가 콩 볶듯이 날 때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우산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등포역 앞 경인선 시외버스 정류장에 있는 인천상회에 가서 비닐우산을 받아 우산 장사를 하였다 ~ 우싼요~웃싼~~!, ~웃싼요 웃싼!” 마침 기차역에서 내리는 여객손님과 아다리가 맞으면 등에 한 짐 짊어진 우산이 나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때로는 시외버스에 올라 껌팔이도 하며 꿈을 꾼다. 나도 언젠가는 기차 안에서 홍익회(당시엔 갱생회) 직원이 되어 김밥, 도시락, 껌을 파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속에서 공짜로 기차를 원 없이 타고 다녔다..... 사람은 꿈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림동 달동네에 들어가면 부엌 바닥은 흙이었는데 비만 오면 물을 퍼내야 했다. 평소에도 구덩이 판 곳에 물이 고였다. 이런 흙 토담 단칸방을 닭장집이라 불렀다. 취사 난방은 연탄을 사용하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는 일도 자주 있었다. 화장실은 3개로 수십 가구가 공동으로 이용했다. 아침에 줄서는 건 당연했다. 눈치 없이 안에서 오래 개기다가 싸우기도 하고, 빨리 나오라고 발질을 할 때는 항문이 저절로 속절없이 닫혀 허리춤을 손으로 잡고 나와야 하는 기막히게 가난한 달동네였다

     열악한 화장실, 푸세식 똥통에 쌓인 분변을 수거하려면 똥차나 지게를 이용한다. 그 시절 제대로 방수가 되는 저장탱크가 흔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도라무깡(드럼통)을 땅 속에 묻어 사용했다. 세월이 흘러 녹이 슬면 구멍이 송송 난다. 비가 오면 하수가 유입되어 물 반, 건더기 반, 대변 볼 때 발판에서 과녁 조준을 잘 못 발사하면 퐁당소리와 동시에 중력을 거슬러 튀어 오르는 오물을 피하기 위해 엉덩이를 좌우로 날렵하게 취해도 그 것이 그리 마음대로 되던가? 결국에는 파편이 엉덩이에 묻을 수 밖에 없으니 신문지로 씻어봐야 그 악취가 어디로 갔겠는가?

     도림동 유흥상회 앞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도라무깡에 자갈 집어넣고 밑에서는 장작으로 불을 땐다. 실장갑 낀 손으로 골고루 뒤집어 주면 고구마가 맛있게 익는다. 또 구성지게 외친다. “으어! 고구마요 고구마~! 으어 군고구마 야끼모~!군고구마 장사하며 목욕탕 인연 친구 이병학이 교복 입고 다니는 것을 볼 때면 그 교복이 그렇게 입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병학을 그렇게 내 눈에 또 박아 두었다

     밤에는 찹쌀떡 장사를 하는데 께끼통 비슷한 곳에 넣고 짊어지고 다니며 또 구성지게 찹쌀 뜨~! 찹쌀 사~! 찹쌀 뜨~!찹쌀을 강조 한다

     신문팔이 또한 빠질 수 없다. 신문이 귀한 시절, 신문이 매일 발행되어 나오지만 하루는 4, 하루는 8면 격일제로 바뀐다. 4면이라 해봐야 한 장 접으면 4면이고, 신문 2장을 접으면 8면인데, 4면은 5, 8면은 10원 이었으나 8면나오는 날 신문을 팔면 마진이 따블이다. 또 구성지게 외친다. 석간을 강조해야 방금 따끈따끈하게 나온 새로운 뉴스라는 야그다

석간 동아일보 810원이요--> “스억깐 또아일보 8면 시버너~~!” 읽을거리가 많다는 8면을 강조하면 ”8면 동아일보 석간 10원이요--> ”8면 또아일보 석깐 시버너~~~!“

  그야말로 밤낮이 없는 전천후 돌격대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나 내가 번 쇠푼, 쇳가루는 먹고살기, 아니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 보스와의 만남 2 >

     그래도 주업이 구두닦이로 영보극장 뒤 남의 구역을 설치다 그쪽 애들한테 걸려서 뒤지게 얻어터지고 구두약 빼앗기고 때로는 나의 밥그릇인 깨꾸통이 박살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남도극장 건달패를 만나 그 쪽 조직원이 되기로 하였다. 영등포에는 3대 깡패 건달이 있었는데 당산동 남도극장쪽의 새마을파신길동(오비, 크라운맥주 공장근처) ’똥바가지파영보극장 뒤의 북부동 삼일당파가 있었다. 새마을파에 들어가 보스 이병호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도 어엿한 구역을 배정받아 문래동의 판본방적(재일교포 서갑호가 인수 태창방적-->판본방적-->방림방적으로 변신)앞에서 구두를 닦았다

     패싸움이 잦아 집합명령이 떨어져 전쟁이 선포되면 구두닦을 때 쓰는 이 무기였다. 골은 구두가 물에 젖어 쭈그러들거나 할 때 펴 주는 기능이 있는데 앞에는 손등 같은 주걱이 있고 간격 조절하는 틀이 있어 구두 앞쪽에 쑤욱 집어넣고 틀 가운데를 누르면 구두 뒤쪽 반대편 쪽이 고정되어 밀어주니 구두가 좌아~악 펴지게 하는 것이다. 구두닦이에게 필수용품이 전쟁할 때는 무기로 사용되어 내려치면 손가락이 찢어진다. 어느 날 패싸움하다 도망가는데 땀이 얼마나 흐르는지 닦으며 열라 뛰는데 옆에 놈이 날 보고 만각아! 너 얼굴에 땀이 아니고 피다, !“ 내가 손바닥으로 피를 확인한 순간 그렇게 쏜 살같이 잘 뛰던 놈이 다리에 힘이 쭈우~욱 빠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부축해 가느라 철수는 고생을 했었다. 알려주지 않았으면 급행열차처럼 달려갔을 것을....어쩐지 땀이 끈적거리더라니....

     나의 구역이 있으니 상납하고도 벌이가 괜찮아 마음이 편해졌다.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 번쩍거리는 구두의 광, 어느덧 나는 구두닦이 달인이 되었다. 우리 오야지 두목은 영등포 성남고등학교를 나왔다. 성남학교는 친일파 일본군 육군 대좌출신으로 해방 후에는 국군 장성으로 변신한 카이젤 수염의 김석원 장군이 설립한 학교로 나의 보스는 우리를 정신교육 시킨다고 성남학교 교훈 의에 살고, 의에 죽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중에 나의 친구가 된 목욕탕 친구 이병학도 성남고등학교 출신이었으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 공부의 시작 >

    1965년 하순 어느 날 보스 이병호 형님이 이렇게 물었다

     만각아! 너는 공부할 머리 같은데 공부 시켜줄까?”

     이 형님은 건달이지만 한양공대 먹물 먹은 인텔리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차지철비서로 들어간 사람까지도 있었다. 그 때 차지철이 저술한 우리가 세워야할 좌표라는 책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난관 극복기에 대하여 썼는데 그 책을 돌려 보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 대필해준 책이란 얘기도 있었다

     ! 형님 공부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제가 국민학교 때 잘 했습니다

넌 아무리 봐도 이곳에서 썩을 놈이 아닌 거 같아서 내가 취직시켜 줄라고

어디로 취직합니까? 저는 어차피 돈 벌며 공부해야합니다

너를 영등포역 근처 전차종점 건물 2층 한림학원에 사환으로 넣어줄게

당시 건달은 힘이 있어서 가능했다. 국어를 가르치는 허일 원장을 소개했다

너는 사환이자, 장학생이다.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다니 열심히 해라!”

     내가 하는 일은 수강증 검사하는 기도, 강의 끝나면 칠판 지워주는 것, 학원시간표 전단지 학교 앞에서 등교시간에 돌리는 것, 학원 포스터 벽에 풀칠해 붙이는 것 등이다. 한림학원의 주 타켓은 검정고시반과 숙녀반 이었다. 영등포 공단의 아가씨들은 거의 국졸 출신으로 한글, 한문, 영어, 일반상식을 배웠다. 나처럼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은 국졸이나 중졸들은 검정고시반에 적을 두었다

     장학생? 말이 좋지, 머슴도 상머슴 사환이었다. 학원시간표 전단지 나누어 주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다. 영등포공고, 성남중고, 장훈중고, 영등포여고 에 가서 학원 찌라시를 왼팔에 늘어뜨려 잡고 횡렬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왼쪽에서 오른쪽 옆으로 차~~착 게걸음으로 옮기며 오른손은 번개처럼 전단지를 집어 나누어 주었다. 전단지 배포하는 달인이 따로 없다. 벽보 붙이는 것이 여름에는 쉬운 일 이었다. 하지만 겨울에는 벽에 풀칠하면 금방 얼어버린다. 얼기 전에 내 손으로 벽보를 꾸~욱 누르면 얼어붙은 내 손은 얼음장 같았다. 누르는 그 압력으로 대충 붙긴 붙었다. 언 손을 호호 불면서 공단지역에 숙녀반 포스타를 붙이며 돌아 다녔다. 그런 생활이었지만 공부는 참 즐겁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검정고시반 애들한테 원장이 교복을 나누어 주며 입으란다. 처음 중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 기분이란.... 그런데 모표와 학교 명칭이 00고등공민학교(정규교육 못 받은 애들에게 정부에서 보조해 주는 기관이다. 검정고시 봐야함)인데 우리는 공민학교에 모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코쟁이 미군들이 오더니 사탕과 초코렛, 학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김포 비행장으로 가서 미군 수송기 실내를 견학하고 선물도 받았다. 우리에게는 한 없이 즐거운 하루였다. 그 공민학교는 아마도 미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후원도 받는 학교 같았다. 정부에서 감사 나오거나 후원자가 방문할 때는 서로 학생을 꾸어주는 때도 있었다. 우리는 머릿수를 채워 후원금을 채우는 들러리 역할이었다. 웃기는 것은 헤어질 때 우리가 받은 선물을 회수하고 일부만 떼어주었다. 선물을 빼앗기어 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 즐거웠다. 사기와 도둑이 판을 치는 혼란한 세상을 눈으로 목격하며 자란 슬픈 10대였다....... 에라이~~~! 도둑놈들아!!!

                                          < 신 문 배 달 >

     학원장이 주는 월급으로는 살 수 없어서 신문배달을 해야만 했다. 직장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노동착취란 생각은 못 했던 시절...아침에는 조간 조선일보, 저녁에는 석간 동아일보를 돌렸다. 신문배달부는 2가지 직책으로 나뉘는데 무엇이든 첫 골에 골인은 없었다. 나름 절차가 필요했다. 구두닦새는 찍새부터, 신문배달부는 보조부터, ’배달보조가 신문을 자기 구역에서 돌리다 나중에 승진하면 원 배달이라 하는데, 원 배달은 수금을 책임지고 마진을 먹으면서 배달보조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최근에는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신문도 속지나, 간지가 인쇄되어 자동으로 합쳐져 셋트로 나오지만 그 시절에는 8면이 나오는 날이면 제호지와 속지가 따로 지국에 배달된다. 그러면 지국에서는 배달부가 손으로 제호지 속에 간지를 집어넣었다. 왼손으로는 제호지를 벌리고 오른손으로 속지를 ~~밀어 넣는 속도는 윤전기처럼 빨라야 했다. 나의 배달구역은 신길동(진로서광주조, 장훈고, 영등포여고)으로 샛강을 끼고 있어 우기에 물이 넘칠 때는 신문 안 돌려도 되었지만 만각이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신문을 머리에 이고 허리까지 물이 닿는 깊은 곳을 지나 화장실이 넘치는 오물 속을 헤치며 집집마다 신문을 배달하였다. 참 언론인의 표상이 될 만한 배달부였다

    그해 겨울은 아주 추웠다. 영등포 동아일보 지국(지국장: 유재철, 주재기자: 유기자)은 기자 및 지국장, 직원들의 사무실과 제작된 신문이 트럭에 실려 지국에 올 때까지 배달부들이 기다리는 대기실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때 석간신문 올 때까지 난방시설이 전혀 없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하도 추워서 지국 사무실을 조금 열고 살짝 보니 조개탄 난로가 벌겋게 타고 있었다. 순간 후끈한 열기가 내 얼굴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문을 확 열고 들어가 난로를 쬐고 있었는데 아~씨바 주재기자란 새끼가 내 머리를 탁 쳤다

     ~임마! 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어? 당장 나가 이눔 쉐이

그러면서 한 대 더 때리는 거야, 나도 한 성질 하는데 구두닦이 하면서 깡부리면서 게기는 쿠세가 아직 살아 있었지

아이 씨~! 왜 때려, 아프잖아!”

이런 건방진 놈! 여기는 니들 나와바리가 아냐! 빨리 나가!”(또 꿀밤)

~이 쓰벌! 또 때리냐? 한 솥밥 먹는 동업자 끼리

한 솥밥, 동업자? 이런 맹랑한 놈! 이놈이 씨바씨바 욕부터 하네”(또 꿀밤)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냐? 씨발! 같은 언론인 끼리! 너무 하잖아!”

~~~라고라고라고라? 같은 언론인 끼리? 라고라고라고라

~~이 씨팔! 기사 써서 신문 내면 뭐하냐! 우리가 돌려야 신문이지!

     나는 안 나가고 버텼다. 참 당돌했다. 그날 이 후로 우리 배달부 대기실에도 조개탄은 아니지만 작은 19공탄 난로가 놓여졌다. ? 되네? 두드리지 않는 자는 결코 문을 열 수 없고, 가진 자는 절대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온 몸으로 체득한 기회가 되었다. 이 후 나는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싸움도 마다 않는 전투적 꼴통이 되었다

                                        < 검 정 고 시 합격 >

     이런 와중에도 공부에 손을 놓지 않았다. 모르던 것을 하나하나 배우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드디어 1966년 고입검정고시 합격이란 열매를 맺었다. 다음 차례 대입검정고시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공부에 열중하려고 학원을 그만 두었다. 그렇지만 민생고는 해결해야 하니까 그 정도의 돈은 벌면서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을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료도로가 제1한강교~영등포 구간인데, 이곳 공사판에 노가다(막노동)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시공사는 대림산업이었다. 하루 일당이 250원 이고, 이 전표를 15일 동안 모아서 한 번에 현찰로 교환해 주었는데 하루 벌어 사는 하루살이 인생들이 15일을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전표 1장을 당일치기로 현금화 해주는 와리깡 업자에게 210원을 받고 순대를 채워야만 했다. 포클레인이 없던 시절, 공사장 장비는 삽과 곡괭이자루로 구덩이를 파는데 이것을 호리가다판다고 했다. 오전 일 하고, 점심은 막걸리 술빵을 먹고 잠시 누우면 피곤에 절어 저절로 잠에 떨어지도록 힘들었다. 그러다 노가다 십장놈이 소리를 지르면 꾀도 못 부리고 벌떡 일어나는...이놈이 쉬는 꼴을 못 보더만... 이 최초의 강변유료 도로가 679월에 개통하였다. 한편 6812월에 경인 고속도로 준공, 707월에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었다. 내가 일한 강변도로가 나중에 88강변도로의 효시가 되었으니...... 나는 이렇게 67년 초에 최초의 유료도로 공사장에서 돈 벌어 책도 사고 독서실에 갈 수 있었다

     67년 대입검정고시까지 합격, 그야말로 형설지공의 모범이 되었다. 국민학교 내 동창들이 대학교 68학번이니 나도 대학에 들어가면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 있으니 교육공백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앞의 글 소제목에 서울상경이라 했는데 서울유학이라 문패를 바꿔 달만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도림동에 있는 교회가 운영하던 독서실을 갔는데 부잣집 아들이자 목욕탕 친구 이병학을 그 곳에서 만났다.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목욕탕 사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 때야 그 친구가 기억을 떠올렸다. 신분을 초월하여 평등한 수험생으로 당당하게 친구가 된 것이다

     그 후 이 친구는 경희대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갔고, 나는 고려대 법대를 시험 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 고등학교 6년 과정을 26개월에 퉁치는 것이 나에게는 언감생심 이었을까? 그래도 낯선 객지에서 대학생 친구를 사귀어 우정을 나눈 것은 행운이었다. 목욕탕의 우연이 필연이 되었다. 이는 잠자는 나 자신을 깨워 인문학, 문학, 역사, 철학, ,,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내 삶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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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만각                   날짜 : 2019-01-11 (금) 10:39 조회 : 479 추천 : 7 비추천 : 0

 
 
[1/7]   박봉추 2019-01-11 (금) 14:47
만각께서 대마초를 하셨다니 놀랍니다. 
급 김부선이 떠오르는 일인 봉추.

글 진짜 입에 딱딱 붙도록 찰지게 잘 쓰시네요.

대마초를 한 모금 빨아 입안에 물고 집중하던 태극선 모양의 동심원이 오버랩 되었다. 순간 나의 뇌는 동심원의 구심점인 나이테의 원점을 향하여 빨려들어 갔다
 
 
[2/7]   팔할이바람 2019-01-11 (금) 16:19
1. 서울로 돈 벌로 가유~~~! 어머니!!!”
어린 나이에...
웨케 슬프냐....ㅠ.ㅠ

2. 재미있었던 일은 입구 남탕, 여탕 가운데 표 파는 곳에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이거,
일본식 대중 목욕탕이 다 그럼.
1990년대중반 일본유학때 시껍했던 기억이....ㅡ,.ㅡ:

3.동생놈과 싸우는데 점잖게 생긴 중학생 형이 와서 말렸다
“동생이 버릇없이 한 것 같으니 형씨가 그만 두시오!”하며 동생을 나무랐다
이시절에는
피땡이덜도 애늙이같았던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나이가 영감이 되서도 저 에피소드를 기억하는거 보믄, 지고는 못사는(또는, 억울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만각에는 틀림없는 듯.

p.s.
마치 생활역사책을 읽은 느낌.
책의 발문을 써주셨다는 분 말씀대로 날것으로 글이 살아 움직이는 것같음
 
 
[3/7]   팔할이바람 2019-01-11 (금) 16:28
 
 
[4/7]   박봉추 2019-01-12 (토) 13:05
1. 구두닦이

내 어릴적 초등학교인근에 고아원 2개가 있어
그 아이들과 같은 반도 하고 보냈는데
대학 들어가 처음 다방에 갔다 만나 한참을 떠들었다.
 
고아원에서 도망나와 구두 닦기를 하였는데
호적도 없고 주민번호도 없어
파출소 순사들에게 매일 까이고 심부름을 하고
구두를 닦아 주면서도 돈도 못받았다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쓰게 웃던 아이,

그들 말로 옥수수가 털렸다는 뜻의
앞니가 다 깨진 슬픈 미소가 잊히질 않는다.
잘 살고 있을까?

마지막 본 그때가 1979년 봄이었다.

2. 만각 흉아 작품 옆에 떠다니는 옛섬들

- 이문희 <흑맥>
서울역 양동 어린 양아치 생활을 그린작품, 영화화 됨
- 이문구 <변사또약전>
이태원 해방촌 물막이 노가다 전표 와리깡 등을 그린 작품
 
 
[5/7]   순수 2019-01-12 (토) 13:52
만각/
흉아 대단혀~~~

나도 어린시절 힘들게 살았지만..
나보다 더 고생 많이 했어..





 
 
[6/7]   빨강해바라기 2019-01-12 (토) 16:14
 
 
[7/7]   만각 2019-01-14 (월) 10:59
박봉추/ 팔할이바람/ 순수/ 빨강해바라기/

뽕 후원은 고맙지만 사양 하고프고... 당시 대마초는 호기심으로 한,두번 피웠을 뿐

짧은 시간에 쓰다 보니 사람 이름이 생각이 잘 안나 고민...고생 기억은 온 몸에 새겨있어 잘 기억남

글 이라고 하기보다는 상형문자로 이해하여 주길 바랄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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