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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2004.10. 청어람미디어
저자 박홍규
(알라딘, 작가 소개)
30년간 대학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며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천착해 온 진보적인 법학자이다. 하버드 로스쿨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자본적 생활 방식을 멸시해 가능한 한 반(反)자본적으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법이나 법을 비판하는 책들과 함께 자본을 싫어한 사상가나 예술가들에 대한 책을 많이 썼다.
가령『내 친구 빈센트』,『윌리엄 모리스 평전』,『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읽기』,『메트로폴리탄 게릴라』등이다. 그밖에 에드워드 사이드의『오리엔탈리즘』,『문화와 제국주의』등을 비롯한 많은 책을 번역했다.
(『 세상을 바꾼 자본』,『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대한민국 신 권리장전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 『예술,법을 만나다 』, 『 인간시대 르네상스 』, 『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 『그리스 귀신 죽이기 』, 『 플라톤 다시보기 』, 『 구스타프 클림트,정적의 조화 』, 『카페의 아나키스트,사르트르 』, 『반민주적인,너무나 반민주적인 』등...알라딘에서만 역서를 포함한 저서가 87권이 나온다.) |
참으로 기묘한 책이다.
16세기 사람 몽테뉴가 있고, 천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가 있는 탑에서 20년 동안 책 한 권을 고쳐 쓴 사람이 있다. 피의자가 된 박홍규 교수는 그 탑에서 쓰인 책을 다시 읽으며 몽테뉴가 ‘집안일이나 사적인 것’을 놓고 한 말을 책으로 다시 우리에게 들려주고, 우리는 그 이야기가 박홍규의 고백임을 어느덧 깨닫는다.
몽테뉴는, 이상적인 교육이란 ‘학문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독서인’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에세》를 쓴 동기도, 학문이 아니라 ‘집안일이나 사적인 것’을 말해보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박홍규 교수는 중학생 때 도서관에서 접한《에세》를 전쟁 무용담이나 무협지로 읽었고, 누군가의 오역으로 몽테뉴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오해한 적도 있으나, 이제는 웃으며 읽게 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준다.
나도 그즈음에 수상록이니 명상록이니 하는 책들을 읽긴 한 것 같은데, 마음에 남은 건 없다. 이런 안내서가 있었다면, 한국어로 잘 옮겨진 번역서였더라면, 고전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덕적 논설집’ 이라는 글쓰기 형식이 있었단다. 책 한 권 안에 여러 주제를 체계에 상관없이 쓰는데, 도덕적인 주제를 짧게, 간결하게, 그러나 익살스럽게, 독자에게 말하듯 들려주는 글쓰기 형식 이라고 한다. (봉팔러들의 글쓰기와 비슷하지 않나? 우리는, 독백과 역설과 격언이 버무려진 글을 썼던, 마키아벨리, 아우렐리우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종류의 책으로, 기묘하고 엉뚱한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그 기묘함 외에는 주목할 가치가 전혀 없다.”
박홍규의 이 책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기묘하고 엉뚱한 책이다. 몽테뉴가《에세》를 재미로 썼듯, 저자도 이 책을 재미삼아 썼으니 길라잡이용은 될지 모르나,《에세》자체를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에세》를 읽지 않았다. (그의 말에 고개 끄덕이지만...ㅜㅜ)
다만, 이상하게도 이 책이 가끔 생각나고, 그럴 때 다시 들춰보고 웃는다. 씩 웃으면서도 어쩐지 쓸쓸해지기도 하고, 천 권의 책이 있는 탑에 앉아 잡다한 이야기를 평생 고쳐 쓰는 옛날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가장 훌륭한 시대를 산, 가장 가치 있는 영혼과의 빈번한 교제가 가능하다.” 고 한, 그 옛날 사람의 영혼과 나누는 교감!
(이 말은 몽테뉴가 아동교육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여기서 가장 훌륭한 시대란, 그리스 로마다.)
책 내용을 좀 써 보려다가, 뭐 줄거리도 없고, 체계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몽테뉴나 《에세》를 아는 척하지 마라고 하셨으니, 책 서문에서 그대로 몇 부분을 옮겨본다. 게다가 박홍규 교수는 작은 출판사와 주로 작업하고 인세도 거의 받지 않으며 저작권에도 너그럽다 하시니 부담 없이...

▲ 저자 박홍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몽테뉴 (1533~1592)는 16세기에 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유명한 보르도 포도주보다 몽테뉴가 좋다. 그를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500년 전 프랑스 보르도의 한 시골사람이 쓴 책을 읽고 공감하여 웃을 수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 아닌가?
가령 책머리에 “이것은 추호도 그대를 위해서거나, 내 자랑을 늘어놓기 위해 한 일이 아니다.” “모두들 생긴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것 아닌 나를 보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쓰는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 못난 구석이 있는 그대로 나온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부질없는 일이니 그대로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된다. 그럼 안녕.” 이라고 써 있는 책을 본 일이 있는가? 절로 웃음이 나지 않는가? 우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나는 웃으려고 몽테뉴를 읽었고, 이 책을 썼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단해서, 그래서 읽고 썼다. 저 우스운 책머리를 썼던 몽테뉴는 평생을 전쟁에 시달리면서 인간의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목도했고, 동시에 자신의 못난 점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
한국에서 출간된 몽테뉴 책은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그 전부를 읽고 이 글을 쓰지는 않았다. (장담컨대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당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역시 웃었다. 왜냐하면 몽테뉴를 필요 이상으로 찬양하고 심지어 신비화하는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생긴 대로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책을 읽고 뭐 그리 찬양할 게 많은지 몰라 한참씩 웃었다.
그러나 몽테뉴는 개그맨이 아니다. 한갓 웃기려고 쓴 책이었다면 지난 500년간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들여 열심히 읽었을 리 없지 않은가. 개그맨은 연기자이다. 그러나 몽테뉴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심지어 섹스까지도 얼마나 무능한지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웃는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인간의 표상으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그 반대다.
그는 18세기, 볼테르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모든 지적 권위에 대한 치열한 비판자이자, 서양중심주의와 싸운 투사였으며 관용을 주장한 지성이었다. 몽테스키외가 등장하기 이전에 민속학과 비교법학을 주장하였으며, 페스탈로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자유로운 아동교육을 말한 선구자였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로, 헤르더 이전에 민중문학을 세우고 자연에의 회귀를 주장한 사람으로 숭상되었다.
또한 19세기에는 니체에 의해 거의 최초의 문화상대주의자이자, 간결하고 발랄한 회의주의자로 스승 대접을 받았다. 또한 실증주의에 근거한 사회학의 선구자이자 경험과 사실에 근거한 과학자로 대우받았다. 그리고 20세기,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과 함께 등장하기 이전에 인간 심리에 관한 가장 냉철한 관찰자 였으며,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분석해서 인류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프루스트의 수준에까지 다다른 시민 작가로 조명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반 일리히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탈학교’를 주장하였다. 레비스트로스나 에드워드 사이드가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다른 문화를 선입견 없이 받아들인 문화상대주의자이자, 자연을 존중하고 소박한 삶을 주장하고 실천한 생태주의자였다. 그리고 ‘여성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시몬 드 보부아르 이전에 이미 그렇게 언명한 사람이었다. 이렇듯 16세기의 몽테뉴는 후세 선구자들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가 온당한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시 꼼꼼히 따져보겠지만, 내가 그를 보르도 포도주보다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언제나 내게 웃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를 읽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앞에서 길게 늘어놓은 ‘대단한’ 사람 몽테뉴에 대해 나는 하나하나 비판할 것이다. 이것이 몽테뉴의 ‘웃기기’ 정신 이기 때문이다.
왜 지금 이 땅에서 몽테뉴인가?
수필의 시조라는 몽테뉴의《에세》는 자기 탐구 또는 삶의 고백록이다. 무엇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에게 그런 수필이 있었던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모조리 폼 잡는 글뿐이다. 여하튼 정직한 몽테뉴를 읽는 것은 즐겁다. 그것도 500년전의 사람이 쓴 고백이 아닌가. 그것도 갖가지 무능의 고백.
그러나 그는 결코 무능하지 않다. 그는 고등법원의 판사를 역임한 귀족이자 거대한 성을 가진 영주이고, 프랑스에서도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인 보르도의 시장이었다. 철학자들은 그를 동료로 보지 않았고, 스스로도 평생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철학사에 그의 이름이 없어도 좋다. 아니, 그는 역사가이자 문명비판가이고 사상가다. 유일하게 서양의 식민지 침략을 비판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조롱했으며 서양 문화를 우스개로 삼았다. 그의 비판과 조롱, 야유는 지금 봐도 즐겁다. 책 읽기가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 이 정도는 돼야 고전이다.
프랑스 보르도 부근 시골에서 본 몽테뉴의 서재는 좁다란 삼층탑에 있었다. 서재는 삼층인데, 아주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그리고 사면의 벽을 가득 채운 1,000권의 책으로 가득했을 터.
그러나 정직해지자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미워한다. 그러나 민중과 함께 사는 것은 내게 매순간 고통이다. 나는 민중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지만, 상점 점원과 함께 살기보다는 한 달 중 반을 감옥에서 지내는 쪽을 택하겠다.”
쓴 웃음의 모럴리스트
일반적으로 모럴리스트란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 휴머니스트, 특히 회의론의 영향을 받은 17세기나 18세기의 철학적 작가들을 뜻한다. 몽테뉴 같은 반합리주의자, 반체계주의자, 반형이상학주의자가 이에 속한다. 그 공통의 관심은 인간을 특히 감정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자기인식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약화된다. 아니 과도한 지성이나 정신을 경계한다.
...
우리에게는 이런 모럴리스트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김동길, 이태규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겐 웃음이 없다. 최근의 박노자나 강준만에게도 웃음은 없다. 그들 역시 도덕 선생이다.
솔직하고 자유로운 회의주의자
“되도록 자세히 나를 살펴보고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발견되는 허약함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기 힘들다.......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 있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이다.”
바로 내 이야기다. 그래서 그를 읽는 것은 곧 나를 읽는 것이다. 따라서 즐겁다.
“참으로 인간은 놀랄 만큼 덧없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존재이다. 인간에 대해 영원히 변치 않는 판단을 내리기란 어렵다.”
...
인간의 지식은 모두 상대적이나 ‘상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그것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몽테뉴의 답은 명쾌하다. “서로 대화하라.” 이는 번잡하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에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단련시켜 준다.” 이렇게 책을 부정하기에 그를 읽는 것이 더욱 즐겁다.
인터넷 공간과 글쓰기
몽테뉴의《에세》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시론試論’이 될 것이다. 인간이 쓰는 모든 글, 즉 논論이란 나름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론이라고 한다면, 몽테뉴의《에세》는 모든 논문이나 논저를 비롯한 논술형 글쓰기의 시조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 시조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리 밝혀 두건대, 이 책이 논술고사를 비롯한 갖가지 실용적 문장 교재로서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몽테뉴는《에세》를 재미로 쓴다고 말했고, 정말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즉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쓴 게 아니다. 이 책도 그렇게 재미 삼아 쓰여진 것이다. 최근 나는 모 방송사 PD에게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되었다. 그리고 3개월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 지옥 같은 나날을 잊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나의 지난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착하게는 살고자 노력했기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이 책을 썼다.
(※ 2003년 신문 칼럼을 통해 KBS PD의 해외출장 ‘혈세낭비’를 고발했던 일.
KBS ‘TV 책을 말한다’ 방송을 위한 유럽촬영에 동행한 박홍규 교수는, 이 유럽 촬영에 담당 PD가 가족을 동반했고 출장비로 가족의 해외관광과 쇼핑을 했다는 내용을 폭로했고, 물의가 일자 KBS는 PD를 해임했다. 그 PD는 박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며 3개월 뒤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왜 나는 몽테뉴에 관한 책을 썼는가?
깨알 같은 활자로 된《에세》 원저는 1,100쪽이 넘고, 1965년의 한국어판《몽테뉴 수상》은 1,400쪽이 넘는다. 최근의 책처럼 활자를 크게 한다면 그 분량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나는 피의자로 보낸 3개월 동안 그 책을 읽었다. 전에도 몇 차례 읽었지만 이번에는 더 꼼꼼히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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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명히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나의 이런 책보다도 《에세》자체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내가 인용한 부분만을 읽고 몽테뉴나《에세》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읽어서는《에세》를 전혀 읽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중략)...이런 나의 태도가 인터넷 세대에게는 지극히 황당하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고전 자체를 읽지 않고 인터넷에서 정보만 베끼는 것으로는 어떤 지식도, 삶도 있을 수 없다.
------------------------------------------------------------- 《에세》의 마지막 장에서 한 부분. "인간으로서 훌륭하고 적절하게 살아가는 것만큼 멋지고 정당한 것은 없고, 어떻게 이 세상을 멋있게 그리고 자연에 따라 살 것인가를 아는 것만큼 곤란한 학문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병폐 중에서 가장 야만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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