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생각하는 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존재에 대해 가장 확실한 증거로 생각을 발견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보편적 오류인 '에고와 나를 동일시' 한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나와 생각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나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여전히 '인지하고 있는 나(awareness)' 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 실제로 존재하는 나는 의식 (consciousness)이다. 의식은 뇌에 있지 않으며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의식이라는 거대하고 고요한 바다 위에 작은 물결인 생각이 생성되었다 소멸되었다 한다. 생각은 의식의 아주 아주 작은 한 부분이다. 자신의 생각을 관찰 할 수 있는가? 있다면 이 관찰자가 진정한 나이며 의식임을 알 것이다. 관찰 할 수 없다면 생각과 나는 한몸이 되어 있으며 (데카르트의 선언처럼) 이때의 나는 에고이며 가짜이다. 참나를 찾는 것, 그것이 모든 인간의 존재 이유이다. 너와 나는 모두 그 것을 위해 여기에 와 있다. 찾아 가는 길이 모두 다르다 해도 핵심은 하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은 한 덩어리의 진동하는 에너지이다. 각각의 인간에게 있어 생각은 태어나서 (그리고 태어나기 전 생의) 개인적인 경험의 축적과 모든 인류의 집단의식이 합쳐져서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독립적 존재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생각은 정교하고 복잡하게 진화해 왔다. 현 문명에 이르러서는 그 힘이 너무 막강하여 자신의 숙주인 인간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할 정도로.. 머리가 아파서 하늘을 생각 없이 바라본적이 있을 것이다. 텅 빈 마음에 평화를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포츠에 몰입해 전혀 생각이란 없는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나서 상쾌함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위험한 등반이나 익스트림 스포츠에 빠지는 유일한 이유는 생각이 없는 순수 의식상태를 경험하면서 존재의 즐거움 (joy of being) 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승려들이 참선을 하면서 죽비를 맞는 광경을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명상은 생각 없이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며 이 때에는 주변에 일어나는 극도로 작은 현상세계의 움직임도 알아 차린다. 모든 것을 인식한다. 스승이 죽비를 어깨에 내려쳐도 전혀 놀람이 없다. 죽비를 맞고 작은 놀람이라도 있다면 그는 깨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일상생활이 명상일 수 있을까. 있다.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소명이다. 생각 바라보기 생각은 조금만 방심하면 혼자서 잘 났다고 날뛰게 되는 천방지축 어린아이와 같다. 생각이 없다면 바보가 될까? 무식해 질까? 궁금한 사람은 실험을 해 보시길.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할 수 있다면 생각을 없애 보라. 완벽하게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면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재의 종교는 생각이 한쪽 극단으로 치달아서 만들어진 도그마로서 가장 심하게 일그러진 인류의 실패작이다. 생각은 도구로써만 활용할 수 있다면 가장 좋으며, 그것이 사실 생각의 유일한 기능 이다. 생각은 도구로써 쓰여지지 않고 있을 때에는 반복적이며 조건화되어 있고 자동적이다. 생각은 대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다'. 몰입이라는 단어가 유행인데 flow란 생각없는 상태에서 의식이 우주의 지식과 소통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flow를 통해서만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생각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은 본질적으로 낡은 것이다. ------------------------------- 밀혼에게 쓰는 글입니다. 제가 올린 글을 보고 댓 글을 많이 달아서 질문을 했는데 답을 하고 싶어서 썼습니다. 밀혼이 말하는 깨어있슴은 생각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경우라고 봅니다.
자신의 생각을 관찰 할 수 있을 때, 생각을 멈추고도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2012-03-27 22:33:54 생활에서 이동 됨]
나무 기자를 불쌍히 여긴 1명에게서 카테고리 견인비 300뽕씩 삭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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