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書는 공자가 요,순 임금의 덕행을 모아 엮은 역사책 이다.
필경 공자시대에는 종이가 귀해 죽간으로 그 기록을 해 놓았을것이고 이후에 책으로 만들어낸
소위 그들의 선조라 여긴 요,순 임금에 대한 덕행과 치세가 태평성세를 이루게 하였다는
기록물이다.
실제 상서대전에는 요순의 치세가 기록되어 있는데 요나 순임금이 고조선 단군께
朝覲(조근)한 기록이 후세 중국 사가에 의해서 교묘히 변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곡필아세로 그들의 민족적 열등의식을 이런식으로 숨기려 하였을것 이고
아마도 이것을 사마천이 인용하면서 먼저 곡필을 한 사람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이땅의 성리학자들이나 작금의 한학자들도 한글로 그 내용을 풀면서 이런 사항들에 대한
비판없이 그대로 중국사가들이 해석한 대로 배우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인 역사 사대주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먼저 <상서> <순전>의 귀절을 본다 .
----------- 尙書 舜典 -----------
歲二月東巡守至于 垈宗柴望秩于山川 肆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
세이월동순수지우 대종시망질우산천 사근동후 협시월정일 동률도량형
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동쪽의 제후를 알현하고,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 잡았으며 악률과 도량형을 일치시키고
脩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卒乃復.
소오례오옥삼백이생일사지 여오기졸내복.
오례와 오옥(홀,규,종 등...)세가지 비단,두가지 산짐승, 한가지 죽은짐승 및 예물을 정리 하였다.
다섯가지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 드렸다.
이 문장들에서 우리는 본인이 자주 올렸던 당시보다 먼 이전 아사달(홍산)으로부터 유래된 옥기가
얼마나 중요한 당시 이전 부터 왕국의 통치에 필요한 유물인지 알게된다.
그런데 글 내용을 보면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띈다.
肆覲東后(사근동후)라는 귀절이다. 이 귀절을 변조한것으로 보이는데 后를 天子로 해야 맞는 것이다.
글 그대로 라면 순임금이 동쪽을 순행하여 帝 보다 낮은 后 에게 覲했다(뵈었다)라는 말은 성립 될 수 없다.
아니면 순이 후이고 동쪽 후가 제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
曲筆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며 이러한 내용은 바로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중 순임금이 단군을 뵈었다는
4 대 오사구 단군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원문)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 혹자들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무자 5년(B.C2133) 둥근 모양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야별기(朝野別記)를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B.C2131)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B.C2119)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의 3부(部)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구을이 즉위하였다 | 당시 신정시대에는 옥기로 만들어진 홀,종,규 등 궁중에서 사용되는 천자의 상징과 도량형이 천자국 고조선과
邦國이 서로 일치하는지 확인하여 일치 시키고 천문현상인 역법을 배워가며 신성한 곳(소도)에서 하늘과
상국의 천자에게 예를 올렸다는 증거가 된다.
결국 순임금은 상국이자 天子國인 고조선 단군께 朝覲 (조정으로 찾아뵙고 알현하다)했다는 반증이다.
이래서 수천년간 역사는 서토족 그들의 열등감으로 곡필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파할수 있다. 원문보기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중국의 고대 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주나라의 정치철학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이다.[1]
크게 《우서(虞書)》·《한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 하나라 · 은나라(상나라) ·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 시대에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1] 혹은 상(尙)은 상(上)을 뜻한다고 보아 "상고지서(上古之書, 상고시대의 공문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5경(五經)에 속한다는 뜻에서 《서경(書經)》이라고 불렀다.
《서경》의 판본은 크게 나누어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 신나라(新, 8년 ~ 23년)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 ? ~ 23년)이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2] 현존하는 판본은 《위고문상서》와 《칭화대본 죽간상서》가 있다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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