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영이 주장한 ‘잃어버린 10년’이나 진보진영 일부가 주장한 ‘참여정부 실패론’은 객관적 평가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에 가깝습니다. 정부의 성과와 한계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정부 국정운영에 대한 객관적이고 생생한 평가를 위해 노무현재단과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은 ‘참여정부 정책총서 정부운영’ 편인 <진보와 권력>을 펴냈습니다. 청와대에서 해당분야를 담당했던 실무책임자들이 필자를 맡아 문재인 이사장, 이해찬 전 총리 등 참여정부 국정운영의 핵심책임자 30여명에 대한 인터뷰와 집담회를 통해 현재적 함의와 교훈이 살아있는 주체적 평가를 담았습니다.
정책총서 제1권인 <진보와 권력>에서는 인수위원회, 인사정책, 대통령비서실 조직과 운영, 권력기관 운영 등 4가지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방대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 주제를 5회 분량으로 축약해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 주제인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정태호 한국미래발전연구원 기획위원장이 집필했습니다. 정태호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과 대변인 등을 역임했습니다.
- <진보와 권력> ① 참여정부 지도제작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1화
대선 나흘 뒤 노무현 당선인 지시 “인수위를 짜시오” - 학자·전문가 대거 참여…초유의 ‘정책형 인수위’ 닻 올리다
1,201만4,277표. 득표율 48.9%. 2002년 12월 19일 국민들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을 선택했다. 기쁨과 감동도 잠시, 당장의 숙제가 떨어졌다. 대통령직 인수를 위한 활동, 바로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이었다. 선거 나흘 뒤인 12월 23일 노무현 당선인은 이병완 민주당 정책위 부위원장(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불렀다.
“‘인수위를 좀 짜시오.’ 아무 설명도 없이 (그 말만 했습니다). 당선인을 만나고 나와서 여의도 맨하탄호텔에다가 방을 하나 잡았지. ‘지금부터 일을 해야 되는 모양이구나.’ 그래서 그때 (대선)정책자문단 명단을 다시 가져오고…. 인수위원회 구성 발표가 거의 연말이 다 됐을 때였을 거예요. 그걸 짠 거예요.”(이병완)
인수위 구성과 개혁의 핵심, 대선정책자문단
이병완 전 실장은 대선정책자문단 명단을 왜 다시 살펴봤을까. 인수위 인적 구성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간 이들에 대한 당선인의 애정과 신뢰는 각별했다. 대선기간 동안 후보의 정책자문단은 지지율 등락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한때 늘어나던 정책자문단은 후보 지지율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하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인수위에서 정무분과 간사를 맡았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지지도가 내려가니까 몇몇 사람이 아주 공식적으로 통보를 해옵디다. ‘나는 거기 못 나가겠다.’ 그래서 지금 우리 학계의 중진들 중에 여러분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어요.”(김병준)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정책자문단이 수백명 되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 규모면에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이던가? 거기서 만찬을 겸해서 뭘 하고 계셨어요. 근데 20명 남짓이었지. 여당 후보의 자문단이 말이죠. 그때가 (2002년) 8, 9월쯤 되었을 거야. 다른 일 때문에 보고하러 갔는데, 기자들이 혹시 올지 모른다고 하니까 화장실로 숨으려 하더라고.”(이병완)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자문단을 이끌었던 주인공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었고, 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분노해 새로 자문단에 들어온 인사가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끝까지 대통령선거를 함께한 학자들에 대한 당선인의 동지적 신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정작 이들은 선거를 끝내고 짐을 다 싸놓은 상태였다.
“‘선거 끝났으니까 우리 역할 끝난 거 아니냐’ 해가지고 한 사흘 전화기를 꺼버리고 어디로 가버렸어요. 며칠 뒤에 나와가지고 보니까 내가 정무간사로 임명되었다고 신문에 나와 있는 거야, 길거리에서 봤죠.”(김병준)
“(정책자문단) 회의도 참석 못하고 이메일로 정책 아이디어를 보내는 정도였는데, 그런 사람이 인수위 들어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싶어서…. 자고 있는데 누가 전화를 해서 ‘당신 오늘 신문에 났다’는 거예요. 인수위 명단에 제 이름이 들어 있다고. 공식적인 통보 없이 자다 깨서 신문보고 알았어요. 누가 추천했는지 난 아직도 몰라요.”(이정우)
이병완 전 실장에게 인수위 구성을 지시한 이틀 후인 12월 25일 노무현 당선인은 인수위 위원장에 임채정 의원을, 26일 김진표 부위원장(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을 포함한 각 분과위원장을 임명했다. 27일에는 각 분과별 인수위원 16명, 국민참여센터 부본부장, 행정실장 등 인수위원 전체에 대한 인선을 마무리했다.
인수위원 25명 중 당 출신 2명, 관료는 1명뿐
25명의 인수위원 중 임채정 위원장과 이병완 기획조정분과 간사 2명만이 민주당 출신이고 김진표 부위원장은 유일한 관료 출신이었다. 대부분 대선정책자문단에 참여했던 교수나 관련분야 전문가로 구성됐다.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는 위원 27명 중 26명이,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전원이 전·현직 국회의원이었다. 인수위원 구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정치형’에서 ‘정책형’으로 확실한 전환이었다.
‘정책형’에 방점을 찍어두고 다시 노 당선인이 이병완 전 실장에게 인수위 구성을 지시했던 2002년 12월 23일로 돌아가보자. 당시 당선인이 별다른 설명 없이 인수위 구성을 지시한 이유가 있었다.
인수위 구성 방향은 2002년 12월 21일부터 이틀간 가족과 실무자들이 함께 간 당선인의 제주도 휴가 도중 언론에 소위 ‘제주구상’이라는 형태로 이미 알려졌다. 12월 22일 이낙연 당선인 대변인은 “노 당선인이 실무형으로 인수위를 구성키로 함에 따라 인수위원장과 분과위원장도 실무형 인사가 포진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12월 23일 당선인은 민주당 선대위 전체회의에서 “인수위는 당이 바로 정부를 접수하는 권력접수형보다 정책적으로 분석․판단하는 실무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권력접수형’이 아닌 ‘정책 중심의 실무형 인수위’. 이는 선거와 정권에 대한 노 당선인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였다.
“(대통령께서는) 선거는 정책선거라는 생각을 쭉 가지고 계셨습니다. ‘선거는 정책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정책분야 회의를 하는데, 지지율이 14~15%로 떨어지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잘해봐야 스무명이 모이는 정책자문단 회의를 하고 계셔. 너무 황당했지요.”(이병완)
‘선거는 정책이다.’ 달리 말하면, 정권은 정책을 펴기 위해 잡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대선정책자문단 중심의 인적 구성과 정책형 인수위 구상의 배경에는 ‘개혁세력의 구축’과 이를 기반으로 한 ‘일관된 개혁의 추진’이라는 당선인의 전략적 목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당선인의 철학…정권은 정책을 펼치기 위해 잡는 것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인수위를 백화점식으로 하면 안 된다’, ‘개혁은 개혁세력이 해야 한다’. YS정권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개혁세력을 구축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인수위도 그런 성격으로 꾸몄다고 봅니다.”(임채정)
“결국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되는데, 그 환경이 굉장히 보수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정책 토론할 때 늘 걱정하셨던 거예요. ‘집권하면 우리가 로드맵과 같은 하나의 기본 계획을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정리해서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늘 하셨지요.”(김병준)
인수위 기획분과 위원을 맡았던 성경륭 전 청와대 정책실장 또한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한국처럼 역동적으로 변화가 많고, 온갖 문제가 터지고, 더군다나 언론환경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인수위 활동을) 학술집단들이 새로운 개념도 만들고 새로운 이론도 만들고 새로운 전략도 짜고 정책총서를 만들듯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5년을 거버닝(governing)하고, 5년 동안 할 정책 콘텐츠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버티지) 못합니다.”(성경륭)
이렇게 탄생한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그 어느 시기보다 가장 동질적인 철학과 지향을 가진 인수위로서 면모를 갖췄다. 일각에서는 조직의 지나친 동질성이 정책 추진의 객관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 관점에서 정책 인수와 새 정부의 정책과제 선정이라는 인수위의 역사적 역할에 비춰봤을 때, 이러한 동질성은 만만찮은 정치환경 속에서도 인수위가 제 역할을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인수위원은 내각이나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당선인의 선언은 진심이었을까, 전략적 발언이었을까
인수위의 면면이 확정, 공개되자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우려와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인수위원이 개혁적인 학자들로 채워짐에 따라 예상보다 거센 기업개혁 요구가 쏟아질 것”, “실무행정 경험이 거의 없어 탁상행정 우려”, “정책집행을 위한 정치권과의 연계나 공무원조직과의 유기적인 협조체제 구축이 여의치 않을 것” 등등의 전망을 내놨다. 심지어 인수위원 가운데 서울대 교수가 윤영관 외교통일안보분과 간사 한 명이라는 사실도 문제로 지적됐다. 노무현 당선인은 그래서 이런 농담도 했다고 한다.
“당선인한테 갔더니, ‘아, 당신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는 거야.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나오는 말들이 ‘대학교수를 쓰면 서울대 교수를 쓰지 왜 국민대 교수를 쓰느냐’부터 시작해서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이 많은데 왜 지방대 (출신) 교수를 쓰느냐’, ‘학계에서도 마이너다’….” (김병준)
민주당의 소외감도 컸다. 공개적인 갈등으로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의원들내에는 이런저런 불만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특히 향후 인수위원들이 내각에 중용될 것이라는 예측에 그러한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당에서는 인수위 멤버들이 내각으로 들어가는 데 대해서 굉장히 우려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당에서 계속해서 대통령께 와서 인수위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데….” (김병준)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자 인수위 출범 후 당선인은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인수위원하고 전문위원, 자문위원들이 한꺼번에 인수위 강당에서 첫 회의를 했어요. 그때 당선인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 온 분들이 내각이나 청와대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하셨어요. 다들 얼이 빠졌지.” (이병완)
당선인의 발언은 인수위의 권력화 현상을 방지하는 한편 인수위 구성에 대한 시비를 원천 봉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적절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전술적 언급이었는지 실제로 그런 방침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결과적으로 인수위에 참여했던 많은 인수위원들이 참여정부 청와대와 내각에 발탁됐다. 당선인의 선언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그 같은 인사는 12대 국정과제로 대표되는 참여정부 주요 정책의 일관성 있는 추진을 가능하게 만든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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