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개곰님이 글을 올렸네요. 1년2개월만입니다.
아래는 개곰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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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중앙은행
2010년 말 헝가리 집권당과 총리는 서방 언론에서 맹공을 당했습니다. 2010년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둔 피데스(헝가리시민동맹)는 헝가리 중앙은행의 총재를 총리가 임명하고 금리 결정 금리위원회의 위원도 지금보다 2명을 늘리되 늘어난 자리도 총리가 임명하는 법을 통과시켰거든요.
중앙은행을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유럽연합의 원칙입니다. 유럽연합과 유럽은행, 국제통화기금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면서 독재자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성토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언론도 좌우를 넘어 헝가리 집권당을 비난했습니다.
오르반 총리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긴 했지만 사실 국제 금융 기관을 상대로 큰소리를 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헝가리는 빚이 많았거든요. 빚을 갚느라 200억 유로의 자금을 빌리려면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헝가리의 나라빚은 새로 출범한 정부가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후 헝가리에도 민영화를 빙자한 사유화 광풍이 몰아닥쳤고 그 와중에서 연줄을 잘 활용한 공산당 청년 간부 출신들이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세력이 주축을 이룬 사민당의 당수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재빨리 서방 금융 기관에서 투자 기법을 배우고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헝가리 국민은 급격한 사유화에 불안을 느끼고 사민당을 8년 동안 집권당으로 앉혔지만 사민당이 집권하는 동안 사유화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나라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헝가리 국민이 우파에게 압승을 안겨준 것은 오르반이 예뻐서가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은 좌파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지요.
집권 후 오르반은 재정 적자를 줄이려고 부가가치세를 27%로 인상하고 누진세를 없애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일률적으로 16%로 통일하면서 다분히 우파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르반은 유럽의 어느 좌파 정부도 하지 못한 정책을 관철시켰습니다. 은행과 보험회사에 금융세를 물린 것이지요.
오르반 정부는 고통 분담을 요구하면서 500억 포린트(약 2360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금융기관에게 매년 자산의 0.5%를 세금으로 물렸습니다. 헝가리 최대 은행인 OTP 은행의 경우 350억 포린트의 순익 중에서 20%에 가까운 금액을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헝가리 정부가 국내외 금융 기관(대다수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외국 기업)으로부터 매년 거둬들이는 금융세는 10억 달러 규모에 달했습니다.
헝가리 정부가 중앙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것은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기에는 헝가리의 금리가 너무 높은데도 중앙은행이 고금리를 너무 완강하게 고수한다는 불만에서였습니다. 헝가리의 기준 금리는 당시 7%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제로 금리고 영국도 비슷했습니다. 돈을 찍어내면서 초저금리로 경제를 간신히 유지했다고나 할까요.
헝가리는 유로화를 쓰지 않으므로 당연히 다른 나라가 다 그러듯이 중앙은행을 통해 경제회생책을 도모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겠지요. 그러자면 금리가 낮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중에 돈이 풀리고 투자가 이루어지니까요. 금리가 높으면 돈 없는 사람은 이자 부담으로 허리가 휘고 돈 있는 사람은 앉아서 돈을 법니다.
오르반 정부는 전세계에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 헝가리 은행에 제공했던 공적 자금도 칼같이 회수했습니다. 헝가리의 OTP 은행은 정부한테서 지원받은 긴급 지원금의 잔여분 4천억 포린트를 갚은 지 오래입니다. 오르반 정부는 금융권 지원에 거액의 공적 자금이 묶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금융권을 상대로 거액의 금융세를 받아냈습니다.
반면 영국 금융권은 금융 위기가 터진 뒤로 구제 금융과 보증의 형태로 1조 파운드(약 1500조 원)의 정부 지원을 받았습니다. 국유화되었던 노던록 은행은 그 뒤 버진캐피털에 헐값으로 팔렸습니다. 국민의 혈세가 날아간 것이죠.
유럽연합에서는 토빈세(금융거래세)를 놓고 각국의 신경전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토빈세를 서둘러 도입하려고 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회원국 모두의 동의를 얻자는 입장이었고 영국은 유럽연합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금융거래세를 도입해야만 찬성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실상 반대한 셈이지요.
헝가리 국민과 영국 국민 중에서 누가 더 자국 국민을 챙겨주는 민주적 정부를 갖고 있을까요? 금융권에 국민의 세금을 1조 파운드나 퍼부어주었으면서도 금융권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칠까봐 전전긍긍하는 정부를 둔 영국 국민이 헝가리 국민보다 더 민주적 정부를 가졌다고 자신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헝가리 중앙은행은 2016년 봄 헝가리의 예금금리를 기존의 0.1퍼센트에서 -0.05퍼센트로 내렸습니다. 마이너스 금리는 스위스나 일본처럼 통화 신뢰도가 높은 나라가 외국인 투자자의 스위스프랑화, 엔화 매입을 억제하여 자국 통화 가치 상승으로 인한 수출 타격을 막고 여유 자금을 가진 국내 소비자가 돈을 쓰게 만들어 국내 경기를 살리려고 쓰는 정책 아니던가요. 헝가리의 금리가 낮다는 것은 스위스프랑화나 엔화처럼 기축통화에 버금 가는 공신력을 가진 통화가 아님에도 헝가리 포린트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뜻이고 이것은 결국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신화에 기대지 않고 금융권에 대한 공적 자금 회수와 금융세 부과를 통해 헝가리 경제를 건실하게 만든 오르반 정부의 건실한 통화 금리 정책 덕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1차대전 직후 독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가 발생한 것은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해 돈을 마구 찍어내서였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의 통화 공급은 1차대전이 시작된 1914년 12월에 72억 마르크였고 전쟁이 끝난 1918년 11월 7일에는 284억 마르크였습니다. 1인당 통화 공급액이 100에서 430으로 늘었습니다. 도매물가는 1913년을 100으로 잡을 때 1918년 말 234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동안 노동자 평균 임금도 100에서 248로 늘었으니 1차대전이 독일의 통화 체계를 무너뜨렸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독일 중앙은행은 원래 정부의 일정한 감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승국들은 1922년 5월 26일 이런 감독 장치를 없애고 중앙은행을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독일 마르크를 돈벌이 대상으로 삼았고 독일 중앙은행은 여기에 충실히 부응했습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독일 은행에서 마르크화를 빌린 뒤 금세 팔았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마르크화 가치는 떨어집니다. 그러면 외국인 투자가가 갚아야 할 마르크화의 부담은 줄어들고 그만큼 돈을 벌게 됩니다. 이런 투기를 막을 아무 제동 장치가 없었기에 독일에서 천문학적 인플레가 생긴 것이었지요. 그런데도 그 책임을 엉뚱하게 아무 권한도 없었던 당시 독일 정부에 떠넘기면서 중앙은행 독립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드는 데에 독일의 전후 초인플레를 이용했습니다.
2차대전이 벌어진 것도 나치 정부가 국민 경제의 필요에 맞게 통화 정책을 독자적으로 효과적으로 운용하면서 영미의 금권 세력이 위기감을 느껴서라는 설도 있습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고 나서 1939년 2차대전이 터질 때까지의 기간을 기존의 영미 주류 역사학에서는 전쟁이라는 파국을 막으려고 히틀러에게 온건하게 나간 영국의 보수 온건 세력이 철퇴를 맞은 실패한 ‘유화’기로 봅니다.
그런데 독일 안에서도 그렇고 독일 밖에서도 그렇고 당시는 20년대 말의 대공황 여파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공황에 타격받지 않고 무섭게 성장하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노동자들이 선망을 품을까봐 두려워하는 자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1차대전 때 공산주의자들이 뒤에서 칼을 꽂는 바람에 독일이 이겨가던 전쟁에서 졌다고 믿고 공산주의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히틀러의 나치즘에게 자본가들이 반감을 품을 이유가 없었지요. 히틀러는 포드, GM 같은 외국 기업 유치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의 실업률은 급감했습니다. 도로, 발전소, 운하, 교량, 항만 같은 대형 국책 사업을 벌여서였지요. 그런데 전쟁빚에 허덕이던 독일이 어떻게 이런 대공사를 벌일 수 있었을까요. 두 가지 방법에 기댔습니다. 첫째는 석유, 고무 같은 원자재를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만든 기계류로 결제하는 물물교환 방식의 대외 무역을 확대했습니다. 둘째는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나 물자를 공급한 사업자에게 노동인증서를 발급했습니다. 그까짓 종이쪼가리가 어떻게 화폐 노릇을 하느냐구요? 달러도 유로도, 엔도 종이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유럽에서 지폐는 원래 영수증이었습니다. 금화나 은화는 큰 거래에서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은행에 가령 1만 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금 한 덩어리를 맡겨놓은 사람이 은행에서 1만 파운드라고 적힌 영수증을 받고 자기한테 1만 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땅을 판 사람에게 지급합니다. 그럼 그 1만 파운드짜리 종이 영수증을 받은 사람이 은행에 가서 영수증을 들이밀면 은행은 1만 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금을 내놓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은행에 대한 신용이 쌓입니다. 매번 금을 맡기고 찾고 하는 과정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면, 나중에는 영수증이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화폐처럼 돌아다닙니다. 1년이 지나도 금을 찾으러 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1만 파운드짜리 금 열 덩어리가 은행에 모였다고 합시다. 이제 은행은 머리를 굴립니다. 어차피 1만 파운드짜리 영수증 10장이 한꺼번에 몰려올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지금 있는 금 덩어리들을 바탕으로 종이쪼가리에다 1만 파운드라고 적어넣은 1만원짜리 영수증을 누군가에게 빌려줍니다. 이자까지 받으니 은행으로서는 곱으로 남는 장사지요. 결국 화폐의 가치는 신용이라는 겁니다. 더구나 막대한 재정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1970년대 초반에 금본위제를 포기한 뒤로는 미국 달러라는 기축 통화는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지급 보증 말고는 아무것도 담보랄 것이 없이 굴러가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달러를 왜 사람들이 믿고서 물건을 사고 파는 데에 쓸까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틀림없이 그 지폐의 가치를 보증하리라는 믿음이 모두에게 있어서입니다.
나치 정부가 발급한 노동인증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국민이 가령 100마르크라고 적힌 노동인증서를 들고 시장에 가서 10마르크어치 물건을 산다고 칩시다. 가게 주인이 거스름돈으로 90마르크짜리 진짜 마르크 지폐를 지불한다고 칩시다. 그것으로 100마르크짜리 노동인증서는 독일이라는 경제공동체 안에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가게 주인이 다른 손님들에게서 받은 10마르크짜리 노동인증서 9장을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주어도 손님이 진짜 마르크화로 달라고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정부가 지급 보증하는 화폐를 국민이 믿고 써주면 종이쪼가리가 얼마든지 돈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히틀러에게 이런 영감을 준 사람은 고트프리트 페더라는 경제학자였습니다.
페더는 돈의 가치는 금이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보증한다,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서 돈을 찍으면 인플레가 발생하지만 노동을 통해 생산된 양에 부응하여 돈을 찍으면 인플레가 안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치 집권 후 이루어진 독일 경제 회생은 페더의 이론이 공염불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금권 세력에게는 자기들이 빌려주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번영을 누리는 체제가 늘어나는 것은 무서운 재앙이 아니었을까요.
흔히 미국에서 독립혁명이 시작된 것은 1765년의 인지법으로 세금 부담이 갑자기 늘어난 탓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주민이 정말로 분개한 것은 식민지 화폐 발행권의 박탈이었습니다. 1763년 영국을 찾은 벤저민 프랭클린은 빈곤이 극에 달한 런던 거리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풍요를 누리던 식민지 미국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벤저민은 차이를 묻는 질문에 영국 서민과 달리 미국 서민이 잘 사는 이유는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돈을 찍어내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거래와 산업의 수요에 부응해서 생산물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원활히 넘어갈 수 있도록 돈을 찍기에 국민 다수가 골고루 구매력을 유지하고 아구도 비싼 이자를 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영국에서 통과된 통화법으로 미국은 영국 중앙은행에 이자를 물고 구입한 영국 화폐로 거래해야 했습니다. 개인 부채와 공공 부채도 영국 돈으로 갚아야 했습니다. 식민지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1년도 못 가서 미국 인구의 절반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주민은 빈곤의 나락에서 벗어나려면 영국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1933년 집권한 이후에도 히틀러는 국제 금융통이었던 햘마르 샤흐트를 독일 중앙은행 총재로 앉혔습니다. 샤흐트는 영국 중앙은행의 노먼 몬태규 총재와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 대로 협조적이었던 샤흐트가 시간이 갈수록 비협조적으로 나왔습니다. 영국의 압력이 있었겠지요. 결국 히틀러는 샤흐트를 해임했습니다. 히틀러는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도 샤흐트 해임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마지막 기대를 결국 영미 금권 세력이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돈줄을 풀었다 죄었다 금리를 낮췄다 높였다 하면서 소수의 금융 자본만을 섬기는 통화 금리 정책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맹신하는 모든 나라에서 다수의 서민 자산을 끝없이 갈취해온 금벌은 독립된 중앙은행을 불신하는 독립 국가가 저주스러웠을 겁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부가 인권 문제, 언론 문제, 난민 문제로 유럽연합에서 지탄을 받는 근본 원인도 오르반 정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불신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헝가리 중앙은행은 다수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고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은 은행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헝가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되지 않아서 그렇고 미국과 영국이 그럴 수 없는 것은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되었지만 소수 금벌에게 종속되어서 그렇습니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이 더 낫다는 것은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금권 세력이 퍼뜨린 가장 위험한 신화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정부는 국민을 섬깁니다. 국민을 섬기는 정부를 불신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불신받아 마땅합니다.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정부가 언어도단이듯이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도 언어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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