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사실
피의자 이기철, 70세, 남)은 폐품을 수집하는 자이다. 2010. 5. 4. 13:1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3동 35의 1, 1층 출입문 밖에 피해자 현선미, 31세, 여)의 소유 남자 한복 1벌, 웨딩앨범 3개, 웨딩 DVD 2개, 웨딩사진 1개 등 도합 피해자 신고가격 300만 원 상당을 박스 내에 담아 보관해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위 피해품을 들고 가는 방법으로 절취하였다.
“결혼 기념품들을 왜 대문 밖에 내다 놓았을까요?”
“이사 가려고 내놓았거나, 이사 들어오던 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이사 중이었다면 다른 살림은 왜 없었을까요?”
“부부싸움을 했나봅니다. 홧김에 결혼 기념품을 내다버린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신랑이나, 와이프를 내다버릴 것이지.”
고 변호사와 나는 농반진반 주고받으며 기록을 검토했다. 폐품을 수집하는 이기철이 폐품이 아닌 것들을 무엇 때문에 들고 간 것인지 의문이었다. 웨딩앨범이나 사진들은 그 주인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재산 가치라고는 전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기철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지고 갔다가 폐품으로서도 별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고 자신의 집 어딘가에 두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바로 돌려주면 화해는 쉽게 성사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고 변호사의 의견이었다. 만일 그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폐품을 수집하는 노인으로서는 300만 원을 당장 변상해 주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 변호사와 나는 그럴 경우 몇 개월로 나누어 지불하는 방식을 권해보자는 것으로 상의를 끝냈다.
피해자, 31세, 여) 현선미가 조정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파리 제8대학 조형예술학부 석사과정에 있는 학생이라고 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같은 학생인 신랑은 먼저 프랑스로 떠났고, 자신은 남아서 짐들을 정리해 놓고 프랑스로 돌아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체류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복, 웨딩앨범, 웨딩 DVD는 굉장히 소중한 것들인데 왜 대문 밖에 내다 놓았던 것인가요?”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프랑스에 국제소포로 붙이려구요. 대문 밖에 내놓고, 콜택시를 부르기 위해 잠깐 집안으로 들어와서 전화 한 통 걸고 나갔더니 없어졌어요.”
현선미에 따르면 1시 7분에 물품을 대문 밖에 두었고 1시 9분에 다시 나갔는데 그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기철 노인이 가져갔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나요?”
고 변호사가 물었다.
“대문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그분이 들고 가시는 모습이 찍혔어요. 그래서 시간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고요.”
“꽤 무거웠을 텐데 70세 노인이 그걸 들고 그렇게 빨리 사라질 수 있나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이 분은 독특하게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폐품을 수집하시는 분인데, 골목을 쏜살같이 오르내리시고, 오토바이를 타지 않을 때도 한 손에 꼭 헬멧을 들고 다니세요.”
현선미는 이기철 노인을 처벌받게 하고 싶어서라거나 변상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소중한 기념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되찾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이기철 노인은 ‘대문 밖에 내다 놓은 물건이니 버린 것이다.’ 라고만 말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발생하고 나서 현선미는 이기철 노인이 같은 동네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종종 마주쳤다고 했다. 폐품이 아니기 때문에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현선미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기철 노인이 현선미를 만나면 슬슬 피해버려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선미의 설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이기철 노인은 조정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분이 처벌을 받더라도 제 물건들을 돌려주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봐도 피하시기만 하고 오늘도 저를 피하려고 안 나오시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한복과 앨범인 줄 알면서도 가지고 가신 게 분명해요.”
현선미가 자기의 짐작을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정황상 한복이라면 탐을 내어 가지고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는 약 30분가량 지난 후 이기철 노인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현선미가 먼저 조정실을 나갔다. 고 변호사와 나는 남은 서류와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정실을 나갔던 현선미가 다시 나타났다. 검찰청 입구에 낯익은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어 둘러보니 이기철 노인이 화단 근처에 헬멧을 끌어안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현선미는 시아버지를 수발드는 며느리처럼 이기철 노인의 한 팔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정이라는 거를 어디메서 허는 것인지 몰라 못 들어왔어. 내가 완지 벌써 1시간 솔찬히 지났을 거여, 잘 좀 갈케 주지.”
피의자, 70세, 남) 이기철 노인은 볕에 그을린 피부 때문에 하얀 백발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주머니마다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듯 불룩 불룩했다. 이기철 노인은 헬멧을 꼭 끌어안고 앉았다. 무슨 소중한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어르신, 헬멧을 안고 앉으시면 불편하지 않으세요?” 내가 물었다.
“어? 이거 버릇이여. 내가 에미애비 없는 손주 둘을 키워. 나는 오래 살아야 되어. 그래서 이 놈을 노상 챙기다보니 기양 버릇이 돼버린 거여. 오도바이 탈 때는 헬멧을 꼭 써야 되거등. 버릇이 된 게 인제는 하나도 안 불편혀.”
이기철 노인은 헬멧을 품은 채로 안면 가득 주름살을 구겼다 펴가면서 말했다.
“어르신께서 현선미씨 한복하고 앨범 가지고 가셨다면서요?”
고 변호사가 물었다.
“내가 볼 적에는 헌옷 뭉텅이 하고 두꺼운 책이드만.”
이기철 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헌옷이에요? 한복은 몇 번 입지도 않은 것이고, 앨범은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책하고는 전혀 다른 것인데요. 더구나 제가 박스 안에 공기포장 뽕뽕이로 포장까지 해 놓았는데요.”
현선미는 이기철 노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따지고 들었다.
“대문 밖에 버린 거니까 죄 헌옷이고 헌책이지 뭐여.”
이기철 노인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할아버지, 그건 저희 결혼 기념 앨범이에요. 제발 돌려주세요. 종이가 아니니 파시지도 못하셨을 거 아니어요?”
“모르는 소리 말어. 그게 꽤 무겁더라고, 신문 더미 사이에 끼우면 무게가 많이 나갈 것 같아서 신문더미에 낑궈서 팔아버렸어. 수집쟁이가 근으로 달아 묶어 가지고 가버렸어.”
더 이상 찾지 말아달라는 말일 터였다. 현선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정실 안에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이천까지 갔드랬어, 색시.”
적막을 깬 것은 이기철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것을 팔고 난 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와중에 현선미의 소중한 앨범이라는 것을 알았고, 찾아서 되돌려 주려고 경기도 이천에 있는 폐지재활용 공장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앨범은 이미 분쇄되어 종이죽 속에 들어가버린 것인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한복도 헌옷 속에 끼워 무게 단위로 팔아버려 찾을 길 없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게 300만 원은 된다니 어떻혀, 물어줘야지......”
이기철 노인은 말끝을 흐렸다.
“할아버지 돈 있으세요?”
현선미가 눈을 동전만큼 동그랗게 떴다.
“췌서라도..... 줘야지......”
이기철 노인은 더욱 말끝을 흐렸다.
“현선미씨 결혼기념품들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고, 돈으로라도 변상 받으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손주를 둘이나 키우신다면서요?”
“내 손주하고 이 일이 뭔 상관이여?”
현선미의 언성이 날카로워진 듯하자 이기철 노인의 말도 뾰족해졌다.
“돈을 받아도 다시 살 수 없는 것들이에요. 할아버지.”
현선미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 때 하필 그게 내 눈에 띌 게 뭐여. 가뜩이나 눈이 안 좋아 뭣이 잘 안 보이는데 그것이 그날은 눈에 쏙 들어오더라는 말이지. 가지고 와서도 헌옷하고 헌책이라고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은 없었어. 색시한테는 정말 미안한 일을 해버렸고만.”
“주머니에는 뭐가 든 거예요?”
현선미의 질문은 느닷없었다. 고 변호사와 나도 얼결에 이기철 노인의 불룩한 조끼 주머니들을 훑어보았다.
“이거? 주웠어.”
이기철 노인은 주머니에서 미니자동차 모형과 로봇건담 조립조각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내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현선미는 이기철 노인이 ‘췌’서라도 주겠다는 물품값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복 많이 받고 잘 살게 생겼다는 말로 이기철 노인은 현선미의 손해를 배상할 수밖에 없었다. 헬멧을 끌어안은 이기철 노인을 데리고 현선미는 조정실을 나갔다.
조정실 창가에 서서 검찰청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이기철 노인은 오토바이를 끌고 앞서 걷고, 현선미는 좀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한 손에 헬멧이 들려 있었다. 놓여 있는 장소에 따라,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물건의 가치가 현격히 달라지는 일의 극한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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